151화
<1020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
벌컥벌컥.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 시원하게 들이켰다. 알싸한 청량감이 가슴 언저리를 두들긴다.
언제나처럼 반통 가까이 비운 후, 그제야 입을 뗐다.
“후우.”
숨을 몰아쉬고 뒤늦게 사위를 살폈다.
가장 먼저 자연스럽게 시계에 눈이 갔다.
11월 28일. 시간은 아침인 오전 8시 20분. 솟아오르는 아침놀로 주위는 충분히 밝았다.
‘평균보다 일찍 깼군.’
악몽을 꾼 영향인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그게 맞을 것이다.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침대로 걸어갔다.
‘다시 잠이나 자자.’
1차 붕괴 전까지 어차피 할 일도 없다. 깨있어 봤자 나만 손해다.
그런 생각으로, 다시 잠이나 자려고 한 것이다.
“…….”
하지만 침대 앞까지 도달한 순간. 나는 발을 멈추고 어깨를 퍼뜩 떨어야 했다.
이불 위로 빼꼼 튀어나온 새빨간 시선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
“…….”
빨간 시선… 이브와 나 사이에 잠깐 침묵이 오간다.
전에도 분명 비슷한 전개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약간 기시감이 든다. 그리고 벌써 익숙해지려하는 내 자신이 놀랍고도 무섭다.
나는 전에도 그랬듯이, 침묵을 유지한 채 가볍게 무시하려 했다.
“아빠. 어디 안 좋아?”
그러자 전에도 그랬듯이, 이브에게 저지당했다.
나는 침대로 다시 누이려던 몸을 우뚝 정지했고. 엉거주춤한 그 상태 그대로 대답했다.
“전혀. 평소랑 똑같다.”
내게 ‘평소랑 똑같다’는 ‘죽지 못해 산다’와 동의어다.
둘 다 그냥저냥 살 만하다는 뜻이다.
“흐응. 정말이야?”
이브가 의심스러운 시선을 빤히 보내왔다.
나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정말로.”
“그래? 내 생각엔 아닌 거 같은데.”
“근거는.”
“아빠. 지금 표정이 엄청 굳어있어. 몰랐어?”
“…….”
이제 와서 표정관리는 해봤자 늦었겠지.
내 표정이 읽기가 쉬운 건가. 수아와 이브가 유별나게 잘 읽는 건가. 아니면 그냥 여자들의 종특인 건가.
어쩌면 셋 다일수도 있다.
“무슨 일인데, 아빠.”
펄럭. 결국 이브가 이불 밖으로 상체를 들어올렸다. 걱정스러운 그녀의 얼굴이 한껏 가까워졌다.
나는 결국 한숨을 삼키며 이실직고했다.
“악몽을 좀 꿨다.”
“악몽? 어떤 악몽인데?”
“그냥. 좀.”
“그놈의 그냥 좀. 아주 그냥, 그게 말버릇이지?”
이브가 징글징글하다는 듯이 진저리를 쳤다.
이내 벌떡,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성큼성큼 나를 지나쳐 걸어간다.
나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어디 가냐.”
“화장실. 밤새 참아서 급해.”
“…그래.”
아마 사실은 아닐 거다.
이브가 뭘 먹는 건 본 적이 있어도, 싸는 건 본 적이 없다. 내가 제대로 말을 안 해주니 살짝 삐진 것 같다.
덜컹. 화장실 문이 닫혔고, 내 방은 적막에 휩싸였다.
“…후.”
그 시점에서 잠들기는 그만뒀다.
다만 이브가 사라진 화장실 문을 빤히 응시할 뿐이다.
“…….”
방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이브가 없는 내 집은 원래부터 이런 느낌이었다.
분명 이런 상태로 지낸 세월이 압도적으로 많을 텐데. 지금 상태가 숨 막히도록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허전하구만.’
그새 거대해져 버린 이브의 존재감에 혀를 내둘렀다.
그만큼 회귀할 때마다 그녀가 내게 주는 에너지가 거대하다. 그렇게 생각해도 될 것이다.
“에너지…….”
상념이 깊어지니 자연스레 옛날 생각이 떠오른다.
내게 에너지를 주는 사람. 키워드와 관련된 인물들이 속속들이 떠올랐고. 그중 가장 강렬한 기억까지 되짚어 올라갔다.
거기엔 모든 걸 포기한 한정용과, 시커먼 안대의 여인이 있었다.
“…이세라 때도 이랬던가.”
어쩌면 그때 포기하는 게 옳았을지도 모른다.
세상이야 망하든 말든. 수아고 나발이고 알 게 뭐냐. 무거운 사명감은 전부 내려놓고, 쾌락과 본능이 이끄는 대로 죽이고 죽으며, 영원회귀를 전전하는 것.
그게 내 팔자에 맞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들인 노력이 아깝다곤 해도.’
그때 포기했다면 지금의 나보단 편했겠지.
손해 볼 게 확실한 종목을 포기할 땐, 들어간 매몰 비용을 과감하게 배제할 것. 주식 투자자들이 항상 강조하는 내용 아닌가.
‘그게 마음처럼 안 돼서 문제지.’
어디 인간사 그렇게 이성적으로만 돌아가던가. 그랬으면 코인으로 전 재산 잃고 한강 수온 올려주는 치들은 진작에 없어졌어야지.
이제와선 다만 이런 의문이 들뿐이다.
‘그때 이세라를 만난 거. 과연 호재였을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포자기에 들어가려던 그 순간. 타이밍 귀신같게 이세라를 만났다.
이세라와 대화하고, 예언자라는 것을 알고. 내 진짜 정체……. 수백 번이나 종말을 맛본 회귀자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이세라는, 그냥 믿어줬다.’
예언자인 이세라는 이 세계가 멸망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미래의 수많은 나와 미리 대화를 마친 상태였다.
그렇기에 가타부타 말없이, 단박에 나를 믿어줄 수 있었다.
‘고작 그것뿐이지.’
그것만으로 다시 도전해 볼 힘이 났다.
그 회차에서 이세라가 나한테 해준 건 딱 그것뿐인데.
난 ‘얘가 있다면 다시 해볼 만도 한데?’라는 생각을 했다.
‘이번 이브 때도 그랬지.’
이브는 스며들 듯이 내 영원회귀에 침투해왔다.
나는 대체 어느 순간부터 이브를 귀중하게 인식했던 것인가. 스스로 돌아봐도 잘 모르겠지만, 추측되는 구간은 분명히 있었다.
‘이브가 회귀 후에도 나를 기억했을 때.’
그 시점에서 이미 내겐 유일무이한 존재.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었다.
거기서 난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단순하기 짝이 없는 새끼인지.
“나는 그냥… 대화 상대가 필요했던 건가.”
반복되는 영원회귀.
켜켜이 쌓이는 인간 불신. 속속들이 마모되는 감정.
친구 하나 없는 찐따 회귀자라, 속 터놓고 대화할 친구가 필요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면. 역시.’
이세라를 만난 것도. 이번에 이브를 만난 것도.
호재가 아니라 악재였던 것 같다.
‘이 둘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때려치웠는데. 이딴 미친 짓 따위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만이 실현 가능한 희망.
그 실낱같은 희망 하나만 보고, 무수한 시도와 죽음을 반복하며 발생하는… 엄청난 권태감과 회의감. 그리고 절망감.
그 책임에서 도망칠 구실이 번번이 막혀버렸다.
“…세상이 억까하네.”
씁쓸하게 웃으며 한마디 중얼거렸고.
그것으로 추한 지지리 궁상을 깔끔하게 접었다.
끼이익. 때마침 화장실 문이 열리며 이브가 다시 등장했기 때문이다.
“아빠. 그새 뭐 좋은 일 있었어?”
갸웃, 이브가 날 보더니 고개를 꺾었다.
나도 태연하게 고개를 저어줬다.
“아니. 없어.”
“그래? 근데 왜 실실 웃고 있어? 평소엔 잘 웃지도 않으면서.”
“…그냥. 좀.”
“또또 저래. 저 말 못 하게 막아버리고 싶다. 으휴.”
이브가 팔짱을 단단히 끼우며 투덜거렸다.
반사적이었다. 나는 어느새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쓰다듬고 있었다.
화들짝, 이브와 내가 동시에 놀랐다.
“으, 응?”
“…….”
동그랗게 뜬 두 시선이 허공에서 진득하게 얽혔다.
이브는 처음엔 어리둥절해했지만, 이내 아무래도 좋아졌는지 가만히 머리를 맡겨왔다.
그녀가 눈을 슬며시 감고 연신 헤죽거렸다.
“아빠, 내가 뭐 칭찬받을 짓을 했던가? 나 잘했어?”
“…어. 잘했다.”
“대체 뭘 잘했는데, 내가?”
“그냥. 좀.”
“으응?”
이브가 눈을 끔벅이며 나를 올려다본다.
그 순진한 반응조차 인간적이다. 사람 흉내도 잘 못 내게 된 1020회차 한정용으로선, 질투가 날 정도로 풍부한 표정.
입맛이 쓰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으음. 뭐라도 괜찮아! 더 쓰다듬어 줘, 아빠. 히히!”
“그래. 얼마든지.”
죽을 때가 된 사람한테 세상이 갑자기 자상해지진 않는다.
다만 죽을 때가 된 사람은, 갑자기 세상에 자상해지곤 하더라.
죽을 때가 된 것 같다.
* * *
이브와 나눈 짤막한 대화.
이것이 1020회차부터 1030회차까지. 무려 10회차의 전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였다.
[1023번째 도전은 실패했습니다.]
[기억과 유물을 계승하고, 1024번째 도전을 실행합니다.]
나도 도저히 믿기지 않으니 한 번 더 말하겠다.
10회차다. 1회도 3회도 5회도 아니고. 무려 10번이나 내 목을 푹 찍어서 과다 출혈로 뒤질 때까지.
그나마 기억에 남을 만한 일화가, 저것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1025번째 도전은 실패했습니다.]
[기억과 유물을 계승하고, 1026번째 도전을 실행합니다.]
유효 던전이 1025회차까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메인 타깃인 41던전 ‘장난감 왕국’은 고사하고. 베르페아노의 ‘연옥의 지평선’을 비롯해, 그나마 쓸 만한 아이템과 스킬을 뱉어주는 던전들.
정말 이빨 단단히 악물고, 절대로 등장해 주지 않았다.
[1027번째 도전은 실패했습니다.]
[기억과 유물을 계승하고, 1028번째 도전을 실행합니다.]
“진짜 X발.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냐?”
오죽하면 1028번째에 눈 뜨자마자 처음 한 말이 그것이었다.
내 경험상, 원래 2차 붕괴에서 41던전이 붕괴할 확률은 약 15~20%에 달한다. 10번 회귀했으면 한두 번쯤 만나는 게 정상일 정도로 빈번했단 말이다.
운영자… ‘의지의 화신’의 확률 조작을 진지하게 의심했다.
[1029번째 도전은 실패했습니다.]
[기억과 유물을 계승하고, 1030번째 도전을 실행합니다.]
‘이거… 회귀 텀을 좀 늘릴까?’
결국 1029번째 생에도 에티를 만나지 못했다.
칼자살 후 1030번째 처음으로 돌아온 순간. 나는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하지만 이내 그것도 기각되었다.
‘안 돼. 너무 비효율적이다.’
붕괴 초창기일수록 나오는 던전이 한정된다.
그리고 후반으로 가면, 점점 던전별 출현 확률이 고르게 분포된다.
‘2차 이후는… 확률이 너무 극악이야.’
내가 자살런에서 괜히 2차까지만 끊는 게 아니다.
가장 효율적으로 제41 던전을 뽑아먹을 수 있는 게 딱 2차 붕괴까지다.
이후 붕괴에선 41던전은 확률상 후순위로 전락한다. 더 봐봤자, 회전율만 질질 늘어질 게 뻔했다.
“좀 더 죽더라도. 이게 맞아.”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푸직! 질리지도 않고 또 나온 ‘유령의 축제’ 던전 앞에서, 나는 칼자살 했다.
[1030번째 도전은 실패했습니다.]
[기억과 유물을 계승하고, 1031번째 도전을 실행합니다.]
그리고 1031번째 11월 31일. 월미도.
나는 눈앞에 뜬 패널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번에 월미도에 붕괴한 던전의 상태창이다.
[던전 정보: 제41던전―장난감 왕국]
농담 안 하고. 울 뻔했다.
“와… 드, 드디어. 드디어 나왔다!!”
옆에서 이브도 감격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나는 울 뻔했지만 이브는 실제로 울었다.
그녀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절박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아빠! 이제 그 미친 짓거리 그만 해도 되는 거지?”
“그래. 안 해도 된다.”
“아빠가 혼자 죽는 거, 그만 봐도 되는 거지?!”
“그래. 안 봐도 된다.”
“아아, 드디어. 드디어……!!”
이브가 한동안 북받친 감정을 추슬렀다.
이내 스스슥!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으로 광학미채 슈트를 받아 입는 이브.
나는 빠릿하게 준비를 마친 그녀를 자연스럽게 안아들었고. 단단히 품에 고정했다.
“아빠, 돌격!!”
처척!
이브가 힘차게 손가락을 뻗으며 호기롭게 외쳤다.
나도 좀 신나서 대답했다.
“라저.”
푸화악!
나는 비행 스킬로 곧장 월미도 상공을 꿰뚫었다.
목적지는 장난감 성 정문. 던전 마스터 에티가 기다리는, 성주의 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