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37화 (137/235)

137화

<1010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

1010회차. 11월 31일.

이번에 월미도에 붕괴한 던전을 처음 눈에 담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거… 당첨으로 봐야 하나.”

최우수상은 제끼고 봉사상, 노력상 정도의 애매한 당첨.

1004회차부터 시작해서 1010회차까지 돌렸으니. 약 7번 만인가?

그래도 자살런 7회차 만에 처음으로, 당첨에 근접한 던전이 하나 등장했다.

―생각보다 빨리 만났군, 도전자.

내 눈앞에는 노인 형상의 푸른 마력 응집체가 떠있었다.

나는 귀찮은 행색으로 그것을 노려봤지만, 노인은 내 반응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신난 듯이 말을 걸어왔다.

―이렇게 금방 재회할 줄 알았으면… 전에 그런 감상적인 말을 지껄이지 않았을 텐데.

마력으로 이루어진 노인의 허상이 추레한 로브를 뒤집어쓴 채 클클 웃는다.

허상의 노친네가 연신 의미심장하게 웃길 잠시. 이내 머쓱하게 볼을 긁적인다.

―신나서 이것저것 쫑알댔던 게 좀 부끄러워지는구먼. 허헛.

그리고 오가는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놈은 나와 구면이었다.

한참 전의 전생에서 나와 만났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왜 아까부터 한 마디도 없나. 그새 회귀를 너무 반복해서… 날 잊어버리기라도 했나?

놈의 이름은 ‘현자 베르페아노’.

제2던전 <연옥의 지평선>의 던전 마스터. 연옥의 지평선의 메인 필드이자, 던전 기믹 자체이기도 한 ‘하이퍼 큐브’의 주인.

‘그리고…….’

내 영원회귀를 인지하고 있는 세 존재 중 하나.

내가 웬만하면 만나지 않길 바랐던, 최후의 한 놈이기도 했다.

“존나게 오랜만이구나, 베르페아노.”

오랜만.

무르무르에게나 할 인사를 놈에게 박았다. 말하면서도 입에 잘 안 붙는다.

내 인사를 받은 노인… 베르페아노가 성성한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 자네 기준으론 꽤 오랜만인가 보구먼. 내 입장에선 눈 감았다 뜨니 다시 보는 느낌인데……. 흘흘.

“그 동네는 시간이 좀 다르게 흐른다고 했던가.”

―그렇지. 이 큐브 안에서 썩고 있으면 말이야. 시간 감각이 없어지는 게 제일 문제라네.

“흐음.”

나는 긴 침음을 흘렸고. 시선을 조금 높이 올렸다.

월미도 테마파크 상공. 하늘을 까마득하게 메운 거대한 황금빛 입방체를 가만히 주시했다.

저것이 이번에 붕괴한 던전의 알맹이. ‘하이퍼 큐브’라는 구조물이었다.

‘크구만. 언제 봐도.’

황금의 사면체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적게 잡아도 직경 5킬로미터에 육박하는 인공 구조물. 판타지 영화의 거대한 부유 섬, 혹은 SF영화의 우주선 같기도 하다.

‘저게 행여 추락하면…….’

아마 월미도의 모든 생명이 그대로 아작 나리라.

저런 거대한 물체가 물리법칙을 일체 무시한 채 허공에 둥둥 떠있다.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경이와 경탄을 자아냈다.

“세, 세상에…….”

“저게. 저, 저, 저게… 뭐, 뭐야……?”

주변의 인파들이 내 생각을 증명해 준다.

누구 하나 빠짐없이 넋을 잃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하이퍼 큐브의 웅장한 자태에 압도된 것이다.

모두 두려움 이전에 경외를 느끼고 있었다.

―뭐 아무튼. 슬슬 시작할까 하는데. 어떤가, 도전자.

나 역시 반쯤 넋 놓고 큐브를 구경하던 와중. 베르페아노의 태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지직. 마력으로 제작된 그의 허상이 심하게 지직거리고 있었다.

―첫 도전은 당연히 자네. 그렇게 알고 있어도 되겠나?

베르페아노는 할 말을 마치고 사라지려 하고 있다.

이제 놈을 다시 만나려면 저 ‘하이퍼 큐브’에 도전하여, 큐브의 시험을 돌파해야 한다.

그 끝에 자격을 증명한 자만이… 던전 마스터 베르페아노와 다시 만나고. 놈이 준비한 ‘특별한 보상’을 거머쥘 권리를 얻게 된다.

“시작해.”

어쨌든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호쾌한 대답에, 클클클. 베르페아노의 허상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재회를 기대하고 있겠네, 도전자.

파짓. 놈의 허상이 신기루처럼 허물어졌다.

쿠구구구! 동시에 거대한 큐브가 육중하게 진동하기 시작했고. 사면체의 표면에서 눈부신 황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가공할 광량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악!! 뭐, 뭐야!”

“X발… 누, 눈이 안 보여!”

모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팔을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섬광이 잦아들고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조심스레 눈을 떴다.

그리고 일제히 표정이 얼어붙었다.

“…뭐, 뭐야?”

“저, 저, 저건……!”

벌레의 군집이 등장했다.

월미도의 하늘을 메운 거대한 큐브. 그 아래로 한층 더 빽빽이, 창공을 시커멓게 뒤덮은 정체불명의 거대 벌레 군단.

그것이 어느샌가… 월미도를 점령하고 있었다.

―프스스스!

외형은 벌을 꼭 닮아 있다.

다만 그 크기가 너무 거대했고. 온몸이 시커먼 칠흑의 갑각으로 뒤덮여서 위압감이 굉장했다.

―부우우우……!

―부오오오오!

그리고 인간의 상체만 한 몸통에 달린, 그보다 한층 거대한 날개 한 쌍.

둔중한 날갯짓 소리가 연신 공기를 울렸다.

“……!”

“으, 흐으……!”

간간이 신음이 흐른다.

꿀꺽.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 정도로 압도적인 침묵이, 군중들 사이를 무겁게 흐르고 있었다.

―키이이이!!

침묵을 깨부순 건 벌레들의 포효였다.

부우우우! 날개짓 소리가 한층 거세졌고. 벌레들이 일제히 지상을 향해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넋 놓고 있던 군중들은,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다.

“으, 으아! 으아아악!!”

“온다! 내, 내려온다아아!!”

“꺄아아아악!!”

주변이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 되었고. 까드득! 뿌드득! 찢어지는 비명 속에서 섬짓한 파육음이 연신 울렸다.

벌들의 거대한 턱이 인간을 씹어 삼키는 소리였다.

―키이이이이!!

―키에에에에에!

장수말벌 한 마리가 꿀벌 군락을 초토화하듯. 놈들은 문자 그대로 일당백, 일당천의 기세로 인간의 군집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끄… 카하악!”

“아아아악!!”

푸직! 빠드득!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인간의 사지가 잘려나갔다. 벌들은 사냥감의 뱃가죽에, 꽁무니의 독침을 깊숙이 박아 넣었다.

“아, 안 돼. 싫어……. 제발!”

“하지 마… 살려줘……!!”

“꺽, 커헉… 키힉!!”

침에 맞은 사람들은 게거품을 물며 사지를 경련했다. 아무래도 마비 독이 있는 듯했다.

벌들은 완전히 무력화된 사람들을 다리로 단단히 붙잡은 채, 머리통부터 으적으적 씹어 먹기 시작했다.

“욱… 끅……!”

“…! …!!”

혀까지 마비되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분당 수십 수백의 생명들이, 침묵 속에서 절명해 나간다.

―키이이이이!!

물론 멍하니 대기하고 있던 내게도 벌이 몇 마리 달려들었다.

나는 손을 슬쩍 들어 올렸고.

[스킬 발동: 아공간 개방]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손을 빼내, 가볍게 전방을 향해 휘둘렀다.

쉬쉭! 청백색 궤적이 예리한 호선을 그렸다.

―케에에에엑!!

―크키키키킥!

푸확!

참격의 궤적을 지나치던 두 마리의 벌이 두 동강이 났고. 거슬리는 비명소리와 함께 바닥에 추락했다.

―케엑! 키에에엑!

버둥버둥.

벌들의 반으로 토막 난 두 몸이 지면을 비벼댔고. 거대한 다리들을 징그럽게 펄떡였다.

나는 인상을 슬쩍 찌푸리며 발을 들어올렸다.

“거, 족같이도 생겼구나. 진짜로.”

퍼걱, 푸확!

한 번. 그리고 두 번. 절단된 벌들의 대가리를 밟아 터뜨려 버렸다.

비로소 내 주변은 다시 조용해졌다.

[큐브의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템포 늦게, 삐빅. 내 앞엔 패널 하나가 떠올랐다.

이미 뭔 내용일진 대충 알고 있었지만, 일단 확인차 한 번씩 훑어봤다.

[제1시험―쐐기벌 군락]

[하이퍼 큐브에 입장하여, 입방체 어딘가에 기거하는 군락의 우두머리를 제거하십시오.]

[완료 보상: 제2시험으로의 퀘스트 진행]

딱히 변한 건 없었다.

현자 베르페아노의 유산인 ‘하이퍼 큐브’가 기동했고. 그래서 큐브의 시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통보다.

베르페아노가 찜해 놓은 첫 번째 ‘도전자’인 나는, 이제 저 거대한 큐브로 입장해야 한다.

“쐐기벌 군락……?”

패널과 주변 참상을 번갈아 쳐다봤고. 이내 의문을 담아 벌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삐빅. 현자의 눈으로 상태창을 스캔하기 위함이다.

[몬스터 정보]

[명칭: 쐐기벌―일벌]

[체력: 8 마력: 2]

[힘: 9 민첩: 11 지능: 0]

[상세: 제2던전, ‘연옥의 지평선’의 특수 몬스터 중 하나. 개체의 무력은 강하지 않으나, 철저한 지휘 체계와 압도적인 개체수로 도전자를 압도한다. 꽁무니의 쐐기침에는 강력한 마비 독이 깃들어 있다.]

한동안 상태창을 유심히 정독한 결과.

놈들이 긴장할 건덕지가 딱히 없는 좁밥임을 깨달았다.

‘별건 없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삼스럽게 상태창을 확인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놀랍게도 저 벌들은, 내 생전 처음 보는 몬스터들이었다.

‘그래봐야 2차 붕괴니까, 당연한 건가.’

1010번째 회귀자인 나조차 처음 보는 몬스터가 나온다.

이것이 좋게 말하면 제2던전의 두근두근한 묘미. 나쁘게 말하면 거지발싸개 같은 점이다.

나는 주로 후자로 표현하는 편이다.

‘100개 중에서 무작위 시험 5개. 돌파한 시험의 결과에 따라 최종 보스가 달라진다……. 이거 맞던가.’

100개의 선택지 중 무작위 스테이지 선발.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아닌가? 내 영원회귀가 딱 이 짝이다.

제2던전인 <연옥의 지평선>은, ‘내 영원회귀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던전이었다.

‘지금까지 이 던전을 마주친 게 아마…….’

내 기억이 맞는다면 딱 두 번뿐이다.

한 번은 너무 초창기라 최종 보스에서 꺾여버렸고.

나중의 한 번은… 지금도 유용하게 써먹고 있는 S급 스킬. 현자의 눈을 얻었지.

‘역시, 데이터가 많지는 않다.’

어쨌든 연옥의 지평선은 1010회차인 나도 얼마 못 겪어본 극희귀 던전.

그것이 데이터가 부족한 이유였다.

“…후우.”

나는 무의식중에 진득한 한숨을 내쉬었고. 저벅저벅. 느리적하게 큐브 쪽으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존나 가기 싫네.”

생각만 한다는 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렇게 희귀한 던전인 데다 기대 보상이 엄청나건만, 이렇게 질색하는 이유? 내가 베르페아노를 극도로 꺼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베르페아노를 극도로 꺼리는 이유?

‘씨불이는 게 엥간히 족 같아야지. X발년 그거.’

하이퍼큐브의 5차 시험, 그리고 최종 보스는 도전할 때마다 달라진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던전 최종 보스는 따로 있다.

바로 베르페아노의 X같은 아가리다.

‘또 시험 하나 끝날 때마다… 존나게 말 걸어오겠지.’

앞으로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이 최소 5번 예약. 그것도 그놈과 나만 아는 전생의 이야기들을 신나서 들먹여 댈 게 뻔하다.

생각만 해도 벌써 끔찍했다.

“…비약.”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투학! 나는 스킬을 사용해 공중을 박찼고. 큐브를 향해 솟구쳐 올라갔다.

[스킬 발동: 비약]

[스킬 발동: 비약]

[스킬 발동: 비약]

………

파파팟!

연속으로 스킬을 사용해 순식간에 중력을 거스른다. 거대한 큐브의 황금빛 표면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것이 코앞에 도달할 때까지, 콰콰쾅! 계속해서 허공을 밟고 도약했다.

‘일단 끝낼 생각이나 하자.’

빨리 시험을 끝내야 일대의 학살이 종식된다.

누구라도 시험을 통과하면, 일단 그 시험에 소환되었던 몬스터는 전부 사라지니까.

그래봐야 다음 시험, 그다음 시험에 또 몬스터들이 왕창 소환될 테니……. 월미도의 인원은 이미 몰살이 확정이긴 하지만.

“…어디.”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나는 금세 큐브의 지척까지 도달했고. 신형이 중력에 따라 추락하기 전에, 재빨리 큐브의 표면에 손을 갖다댔다.

피잉! 내 손바닥을 중심으로 눈부신 황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첫 번째 도전자의 생체 정보가 인식되었습니다.]

[몰락한 대현자의 유산, 하이퍼 큐브로 입장하시겠습니까?]

시스템 패널이 내게 묻는다.

마음 같아선 거절하고 싶지만, 울며 겨자 먹듯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한다.”

파지지직!

큐브의 표면에서 격렬한 금빛의 전류가 발생했고. 내 손을 타고 빠르게 온몸으로 흘러들었다.

딱히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그으.”

텔레포트를 사용할 때와 비슷한, 극심한 현기증이 잠깐 일었다.

눈앞의 모든 것이 일순 흐릿해진다 싶은 순간.

[큐브의 시험을 시작합니다.]

쿠르르륵!

큐브의 표면이 액체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고. 내가 접촉했던 오른손을 시작으로, 순식간에 온몸이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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