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36화 (136/235)

136화

<1005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1004번째 도전은 실패했습니다.]

[기억과 유물을 계승하고, 1005번째 도전을 실행합니다.]

유물은 딱히 고민할 거리가 없다.

좀 쓸 만한 스킬이나 아이템이 하나도 안 나왔으니까.

스스로 끊고 온 전생이기에, 생에 대한 미련도 일절 없다.

[유물의 계승이 완료되었습니다.]

[초인 ‘한정용’의 선택에 의해, 시간선이 역변합니다.]

그렇기에 어느 때보다도 허무의 공간에서 금세 빠져나왔다.

시간이 돌아오고, 다시 눈을 뜨기까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현재 시간선: 2031년 11월 27일. 오후 2시.]

혼탁했던 정신이 천천히 재정립되고. 나는 머리를 한 번 뒤흔들고 사위를 살폈다.

토 나올 정도로 익숙한 정경. 찐득한 공기의 냄새가 코끝을 파고든다.

“후우.”

밀려드는 허탈감을 뿌리치기 위해서 한 번 더 고개를 뒤흔들었다.

언제나처럼 졸리다. 잠이나 잘까 했다.

비척비척 걸어가 무의식 상태로 침대에 향했다.

그리고 침대 맡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선객과 맞닥뜨렸다.

“…….”

“…….”

선객……. 이브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다.

붉고 투명한 시선이 심히 부담스럽다. 나는 졸린 와중에도 슬쩍 눈을 깔았다.

그러자 별안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왔네? 아빠.”

“…그래.”

“상대가 너무 강했어? 도저히 못 버틸 정도로? 아님 방심했어?”

“…방심했던 걸로 하자.”

“와아. 대단하네. 엄청나게 강한 아빠를, 이렇게나 빨리 죽여버릴 상대라니. 이러면 내가 도와줬어도 무조건 죽어버리는 거 아니야?”

이브가 미미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한다.

멕이는 거군.

도중부터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대놓고 나한테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이내 흐흐, 허탈한 미소가 이브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렇게나 강한 상대면. 내가 도와줘도… 아무리 열심히 응원을 해줘도, 아무런 의미도 없겠네. 그렇지?”

“…이브, 그게.”

“응. 그러면 말이야, 난 그냥 계속 여기에 있을게. 아빠가 다시 날 부를 때까지.”

“…….”

“그러면 되는 거잖아. 지금 아빠는 내가 그래주길 원하는 거잖아. 그렇지?”

뿌리 깊은 체념이 느껴지는 목소리다.

표면상으론 얘기가 놀랍도록 스무스하게 잘 풀리고 있었지만.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건 뭔가 다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래야 돼? 아빠.”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 이브의 질문으로, 내 추측은 확신이 되었다.

이브는 태연한 척 연기를 하고 있다. 겉으로만 잘 풀리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나도 모르겠다. 아직은.”

운이 좋으면 앞으로 딱 3번. 나쁘면 30번, 300번까지 갈지도 모른다.

이런 대답밖에 못해 주는 처지가 약간은 서글프다.

‘어쩌겠냐.’

이게 직면한 현실이다.

나 역시 모두가 고통스러운 자살런 따위는 하기 싫다. 그런데 하고 싶지 않아도 할 수밖에 없는 짓이다.

어쨌든 피곤하기 그지없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잠깐 좀 잔다.”

그래서 나는 짤막하게 통보했고. 이브의 옆으로 기어들어가, 침대에 몸을 뉘었다.

눈을 감고 몰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기자니.

“엄마는 있잖아.”

사라락.

내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부드러운 손길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내 머리 땋아줬던 거… 벌써 다 잊어버렸겠네?”

심장에 누군가 덜컥, 돌을 얹어놓은 듯하다.

숨 쉬기가 약간 괴로워졌다. 뭐라 해줄 말을 찾아봤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그냥 이 악물고 자는 척을 했다.

“지금 이 머리도, 이 옷도… 엄마가 준 것들인데. 정작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 나는 전부 기억하고 있는데.”

이브는 혼잣말을 넋두리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점점 젖어간다. 이마 위로 체온을 머금은 물기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까보다 좀 더 귓가에서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이러면 있잖아. 내가 알던 엄마는… 그냥 영영 죽어버린 거 아니야?”

“…….”

“아빠는, 죽는 게 엄청 익숙해 보였지. 지금까지 이걸 얼마나 계속해 온 거야? 10번? 아니면 100번? 어쩌면 1000번도 더?”

“…….”

“너무 가슴이 아파. 엄마랑, 또 모르는 사이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니까… 죽을 것 같아. 나 미칠 것 같아. 이렇게 괴로워 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야. 아빠.”

“…….”

“그래서 아빠가 너무 원망스럽고 싫은데……. 또 한편으론, 엄청 불쌍하기도 하다?”

혼잣말하는 나를 구박했던 이브가 맞나?

그녀는 끊임없이 중얼거렸고. 이마 위로 떨어지는 눈물도 멈출 생각을 안 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이브가 쥐어짜내듯이 말했고.

그 심각하게 익숙한 질문에, 자는 체도 잊고 온몸을 퍼뜩 떨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가 있는 거야? 나 도저히 이해가 안 돼. 도저히……!”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어조였다.

이내 방 안에 흐느끼는 소리만 가득해졌다. 이브가 울음을 참을 생각도 없이 펑펑 울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몸을 크게 뒤척이며 손을 뻗었다.

“나는 남은 게 이것밖에 없으니까.”

잠꼬대와 함께 이브의 머리를 천천히 쓸어줬다.

이브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지만. 이내 아무 말 없이 내게 몸을 더 밀착해 왔다.

인간과 똑같은 그녀의 체온이 전해져 온다.

“으, 흐흑. 미안. 미안해, 아빠……. 내가, 도와줄 게 없어서… 미안……!”

이브가 사과하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미안해’는 듣기 싫은데.

그건 수아가 내 앞에서 죽을 때마다 빼먹지 않고 내뱉던 소리라서. PTSD가 몰려온다.

“나야말로. 미안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원만하게 넘어가지 않았나. 이브가 성숙해져서 천만다행이다.

졸린 와중에 그런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흐윽, 흐흑. 으아아앙……!”

이브는 그 뒤로도 한참 울었다.

그녀가 훌쩍이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이번엔 진짜로 잠에 빠져들었다.

* * *

[1005번째 도전은 실패했습니다.]

[기억과 유물을 계승하고, 1006번째 도전을 실행합니다.]

다음 시도도 시원하게 X박았다.

1005회차. 두 번째 붕괴에서 ‘유령의 축제’가 튀어나왔고. 묘지기 광대와 빌어먹을 꼭두각시 인형 년이 나를 반겼다.

뭐, 경험상 2차 붕괴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던전이다. 예상을 못한 건 아니었다.

“…X발.”

그래서 그냥 깔끔하게 칼자살 했다.

어차피 ‘유령의 축제’는 기대 보상을 내가 전부 아는 던전. 얻을 아이템도 스킬도 전부 이미 획득한 상태니까.

우드득! 광대들이 보는 앞에서, 미련 없이 목을 찔렀다.

[초인 ‘한정용’의 선택에 의해, 시간선이 역변합니다.]

다시 시간은 돌아간다.

그리고 난, 위의 과정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1006번째 도전은 실패했습니다.]

[기억과 유물을 계승하고, 1007번째 도전을 실행합니다.]

딱 봐도 꽝인 던전이 나오면 칼자살.

그래도 아직 기대할 만한 보상이 있는 던전이라면, 클리어 후 칼자살.

[1007번째 도전은 실패했습니다.]

[기억과 유물을 계승하고, 1008번째 도전을 실행합니다.]

이브의 반응은 그때그때 달랐다.

정확히 말하면. 회귀가 쌓여갈수록 점점, 다이내믹하게 변모해 갔다.

“아빠, 괜찮아? 진짜 무슨 일 있어? 왜, 벌써 또 돌아온 거야?”

처음 몇 번은 진심으로 내가 걱정되는 눈치였다.

며칠 만에 벌써 3번이나 처음으로 돌아왔다. 이건 확실히 뭔가가 잘못됐다.

내가 일부러 자살을 반복하고 있다. 그걸 이브도 눈치챌 수밖에 없다.

“…….”

하지만 난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여기서 괜히 내가 무슨 말을 해봤자 역효과만 난다. 그런 판단이었다.

“아, 읏……!”

이브는 본인이 해놓은 ‘방해하지 않겠다’라는 약속에 스스로 묶였고. 그래서 그날도 2차 붕괴를 막으러 떠나는 나를, 막지 않았다.

그로부터 약 30분 뒤. 나는 자살했다.

[1008번째 도전은 실패했습니다.]

[기억과 유물을 계승하고, 1009번째 도전을 실행합니다.]

“아빠… 대체 뭘 하려는 건데?”

걱정이 소용없자, 다음은 추궁이 이어졌다.

내가 회귀하고 정확히 5일 뒤. 2차 게이트 붕괴날인 11월 31일에 반드시 죽는다는 걸 이브도 슬슬 눈치챘다.

그녀는 어김없이 나가려는 날 단단히 붙잡고, 본격적으로 캐물었다.

“좋아. 좋다 이거야. 안 막기로 약속했으니까, 난 아빠를 안 막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지나 알려줘.”

“알려달라고?”

“그래! 최소한 알려줄 수는 있잖아! 나는, 아빠가 왜 이렇게 죽어대는지, 알지도 못해……?!”

“…그건 아니다만.”

그러나 나는 뚜렷한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왜냐고? 스스로도 뭘 하고 있는 건지. 정확히 정의하기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뭔가… 찾는 게 있다. 중요한 거.”

그런데 뭘 찾는 건지는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찾을 수 있다. 그것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뭐 이 정도로 대답은 해줬는데.

“…뭐야. 그게. 무슨, 개소리야 대체……?”

당연히 이브는 납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다음엔, 대뜸 불같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서릿발 같은 붉은 시선이 내 미간에 꽂혔다.

“자기도 뭘 하는지 몰라? 그런 불확실하고 하찮은 일 때문에……! 엄마를 그렇게나 죽여댄 거야?!”

“…….”

“그렇게까지 가치가 있는 일이야? 엄마랑 아빠의 목숨, 무려 다섯 개만큼이나??”

그 말에는 온몸의 모공이 아가리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 뒤는 딱히 말로 하지 않았다.

“비켜라. 이브.”

“……!”

거칠게 이브를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소요가 일어난 지 채 10분이 되지 않아, 나는 자살했다.

역시나 꽝이었다.

[1009번째 도전은 실패했습니다.]

[기억과 유물을 계승하고, 1010번째 도전을 실행합니다.]

그 뒤로 이브는 내게 완전히 마음을 닫았다.

그저 침대 구석에 쭈그려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고. 내가 시야에 들어오면, 표독스럽게 빤히 노려볼 뿐이다.

“…….”

“…….”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하루 종일.

죽일 듯이 시뻘건 안광을 빛냈다.

“오, 오빠. 아무리 지인이 맡긴 애라도 그렇지. 저거 괜찮은 거 맞아요?”

참고로 자살런을 진행하는 동안. 수아에게 둘러댄 이브의 정체는… ‘지인이 맡긴 마케도니아 혼혈이면서 동시에 편부 가정인 불쌍한 친척’.

스스로 말하면서도 좀 쪽팔린, 끔찍한 혼종으로 고정된 상태였다.

“눈빛이 엄청 사나운 게……. 아까부터 오, 오빠를 계속 노려보잖아요. 정신병 같은 거 있는 앤가?”

수아가 그 수상한 변명을 믿는 회차도 있었고, 완전히 불신하는 회차도 있었다.

솔직히 나도 이브 건으로 머리가 좀 아파서 반쯤 자포자기 상태다. 그래서 믿든 말든, 크게 신경은 쓰지 않았다.

어쨌든 이번 생은… 운 좋게 변명이 먹힌 쪽이었다.

“좀 위험한 애 같아요. 저거 신고라도 해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수아가 내 귓가에 그런 말을 속삭인다.

이브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 내용까진 듣지 못했지만. 수아가 보내는 경계 어린 분위기와 시선만큼은, 확실히 느낀 듯하다.

“으… 흐윽, 흐아아앙……!”

이브가 날 노려보다 말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배신감과 억울함, 그리고 서러움으로 점철된 울음이다.

그야말로 나라 잃은 나라님이 옆에서 울다 머쓱해질 정도의… 처절한 통곡 소리.

“오, 오빠. 왜 저러죠? 애가 갑자기 우는데……. 오, 오빠!”

상황이 갑자기 그렇게 되자, 수아는 크게 당황하며 오히려 미안해했다.

수아가 내게 도움을 바라는 시선을 간절히 쏘아보냈고. 그래서 나는… 그녀의 의문을 해소해 줬다.

“…죽은 제 어미라도 생각났나 보지.”

이기철 뺨아리 후려갈기는 불꽃 패드립을 시전했다. 희미한 조소와 함께.

당연히 수아는 대경실색했다.

“오, 오빠!! 어떻게 말을 해도……. 너무하잖아요!!”

“너무할 것 없어. 사실이니까.”

“아니, 아무리 사실이라도……!”

“잠깐 용건이 있어서 일 좀 갔다 온다. 그동안 쟤나 좀 달래줘.”

“오, 오빠! 그런 게 어딨… 오빠!!”

덜컹.

이브의 통곡 소리. 간절한 수아의 부름도 무시한 채.

나는 1010번째 2차 게이트 붕괴지, 월미도를 향해 날아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