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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38화 (138/235)
  • 138화

    <1010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

    “으음.”

    미약한 신음과 함께,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직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여긴.”

    나는 격변한 풍광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어딜 둘러봐도 나무의 녹빛만 가득한 밀림. 까마득한 수해의 한복판이었다.

    “들어왔군.”

    전에 본 적은 없는 장소다.

    하지만 이게 큐브 안이라는 건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다. 단 하나의 불변하는 공통점 덕분이었다.

    나는 시선을 조금 위로 올렸다.

    ‘인공 태양.’

    내 정수리 위로 햇빛을 쏟아내는 시뻘건 구체.

    내리쬐는 햇빛도 진짜 태양을 닮아 따스했지만, 생김새가 척 봐도 인공물의 느낌이 다분했다.

    “쐐기벌은… 밀림 필드 몬스터였나.”

    큐브의 필드 구성은 몬스터와 시험의 내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쐐기벌이 등장한 1차 시험은, 그중에서도 밀림 필드였던 듯하다.

    “여왕벌 찾기… 힘들겠는데.”

    대평원. 유적 폐허. 카타콤 등등.

    많고 많은 필드 중에서 하필 밀림이라. 보물찾기하기엔 최악의 장소 중 하나다.

    1차 시험부터 일이 귀찮아질 각이 보여, 나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부우우우!

    ―파스스스스!!

    그리고 그 순간. 귓가에 어렴풋이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진동음이었다. 바로 방금 전에 시민들을 학살하던 쐐기벌들의 날개소리.

    곧장 소리 난 방향으로 눈에 힘을 줬다.

    ‘현자의 눈.’

    파지짓! 탐색형 파동을 구성해 전방위로 방사했다.

    나무와 수풀, 그 외 수많은 엄폐물들을 투과한 파동이 다시 내 눈으로 돌아왔고. 수많은 정보를 사냥해 왔다.

    그때, 발상 하나가 번득였다.

    “…하긴. 그러면 되겠구나.”

    생각해 보니 그리 어려운 시험이 아니었다.

    이건 진짜 보물찾기가 아니다. 찾아야 하는 건 쐐기벌 군락의 ‘여왕벌’ 개체. 살아있는 몬스터 중 하나다.

    그러니까…….

    ‘쐐기벌만 찾아 족치다 보면. 언젠간 나오겠군.’

    투학!

    곧장 쐐기벌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신형이 나무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고. 이내 십수 마리의 쐐기벌 무리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ㅡ키이이!

    ―키키키키!

    놈들은 갑자기 습격해 온 내 기척을 눈치채고 경계 어린 포효를 내질렀지만.

    파파팍! 내 단검이 진형을 유린하는 게 더 빨랐다.

    ―키이이이이!!

    ―케에에엑!

    전의에 찼던 괴성이 순식간에 비명으로 바뀌어 간다.

    우직, 파사삭! 벌들의 두터운 갑각이 박살나며, 푸른 체액과 살점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 * *

    비약 스킬을 발동. 지면을 박차고, 단숨에 사선 방향으로 솟구쳤다.

    키이잉! 등 뒤로 한 줄기 백광이 허공을 갈랐다.

    “여기도 끝.”

    푸화악! 퍼버벅!

    질주 경로에 있던 다섯 마리의 쐐기벌이 일제히 반 토막 났고.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버둥버둥. 아직 신경 줄이 살아있는 쐐기벌들이 팔다리를 징그럽게 꿈틀거렸다.

    ―키… 에에엑!

    ―케엑! 케에에엑!!

    나는 놈들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굳이 확인 사살은 하지 않는다. 어차피 지나가는 과정의 일부. 내 목적은 일벌이나 병정벌 따위를 사냥하는 게 아니니까.

    ‘벌들의 경계가 훨씬 삼엄해졌어.’

    다만 주위를 둘러보며 그것을 실감했다.

    시야가 온통 푸른 체액으로 뒤덮여 있다. 수십… 아니, 족히 백 마리가 넘는 쐐기벌들이 나무와 수풀들에 마구잡이로 널려있었다.

    ‘군집의 개체수가 점점 많아진다.’

    이 모든 벌레 시체가, 단 한 군집에서 나온 것.

    첫 사냥에 비해 군집의 규모가 훨씬 커져있는 상태다.

    “이건 호재지.”

    삼엄해진 경계는 오히려 내가 잘 찾아왔음을 알리는 신호다.

    놈들이 필사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여왕’이 가까워졌다는 증거. 군락 중심지로 다가왔음을 의미하니까.

    ‘곧 만나겠네.’

    놈들의 규모를 대략적으로 예측해 본 결과. 금세 그런 결론을 도출했다.

    파팟! 나는 곧장 다음 사냥감들을 찾아 다시 밀림을 수색했다.

    “…찾았다.”

    그렇게 몇 번의 군집을 더 초토화시킨 결과.

    눈앞에는 드디어, 내가 찾던 보물… 쐐기벌들의 여왕이 등장했다.

    [몬스터 정보]

    [명칭: 쐐기벌―여왕]

    [체력: 3 마력: 32]

    [힘: 1 민첩: 2 지능: 38]

    [상세: 제2던전, ‘연옥의 지평선’의 특수 던전 마스터 중 하나. 모든 쐐기벌 군락의 우두머리. 물리전투력은 일벌보다 못하나, 휘하 병정의 강화 스킬을 능란하게 사용한다.]

    우선 눈에 띄는 건 사이즈였다.

    사람의 상체만 한 일벌. 그보다 약 1.5배 정도가 더 큰 병정벌.

    그리고 눈앞의 여왕벌은, 성인 남성의 두 배는 될 법한 어마어마한 크기다.

    ―츠츠츠… 키키키키……!

    나는 지금껏 정면에서 당당하게 군락을 쳐부수며 왔다. 그렇기에 여왕벌 역시 내 존재를 모를 리가 없었다.

    여왕벌은 정확히 내가 있는 곳을 쳐다보며, 더듬이를 비벼 위협적인 소리를 내고 있었다.

    ―키이이이이!!

    어느 순간. 여왕벌이 고개를 쳐들고 드높은 굉음을 내질렀다.

    지금껏 수많은 쐐기벌을 학살하며 어학연수(?)를 해온 나는, 본의 아니게 놈들의 신호 해독법을 조금이나마 터득한 상태다.

    방금 여왕의 비명은, 공격 명령이다.

    ―키키키키!!

    ―키이이이이!!

    아니나 다를까.

    주변에 우글거리던 일벌과 병정벌이 더듬이를 빳빳이 치켜세웠다.

    동시에 쿠구구구! 여왕벌을 기점으로 붉은 마력의 파동이 군세를 빠르게 휘감았다.

    ‘여왕벌의 스킬인가.’

    그 효과는 피부와 육안으로 즉시 체감되었다.

    놈의 충직한 병정들이 한층 더 빨라졌고. 기세가 눈에 띄게 흉포해졌다.

    일종의 버프형 스킬이 작용한 듯하다.

    ―키이이……!

    ―키에에에엑!!

    벌들이 하늘을 향해 우렁찬 울음소리를 연발했다.

    스스스스. 직후 놈들의 신형이 일제히 내 쪽을 향했고. 일사불란하게 나를 조여들었다.

    “오호.”

    스크럼에 빈틈이 없다.

    단숨에 사방이 철저하게 포위되었다.

    신속 정확한 명령 체계와 절대복종. 수백 마리라는 개체수가 무색하게,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의 움직임을 보는 듯하다.

    “꼴에 여왕벌이라 이거냐.”

    지금까지 쳐부숴 왔던 군락들은 이렇게까지 체계적이지 않았다.

    리더의 명령이 떨어질 때마다 약간의 버벅거림. 또 몇몇 벌들은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래서 그 빈틈을 찌르면, 쉽고 빠르게 군체를 와해시킬 수 있었건만.

    ‘그런 꼼수는 안 통하겠군.’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지.

    정면 돌파. 하나씩 전부 사살.

    순수한 무력으로 압살해 주마.

    ‘마법으로 싹 조질까?’

    최초로 떠올린 건 그런 생각. 그러나 금세 고개를 휘젓고 단념했다.

    ‘마력은 최대한 온존한다.’

    앞으로 갈 길이 멀다. 아직 5개의 시험 중 첫 번째니까.

    아무리 2차 붕괴로 등장한 던전이라지만. 이 <연옥의 지평선>은 나올 확률이 극히 적은 만큼, 난이도 역시 약간 독자적인 면이 있다.

    ‘정보가 별로 없으니 신중해야지.’

    2차 붕괴라도 스테이지 조합에 따라서는, 7차나 8차. 심지어 10차 이상의 붕괴에 버금가는 최종 보스가 나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내가 이 던전 처음 도전했을 땐… 바로 그 운 없는 케이스가 걸렸었다.

    ‘그러면……. 그래.’

    아이템을 사용하자.

    스킬보다 적은 마력으로 높은 위력을 낸다. 그것이 아이템 고유스킬의 특장점이 아닌가.

    지금도 인벤토리에서 썩어 나는 무기와 방어구들, 이럴 때 안 쓰면 어디다 쓰려고.

    ‘지금 필요한 건.’

    하늘을 빽빽하게 메운 저 군집을 단검으로 일일이 썰어죽이려면. 농담 안 하고 오늘 하루를 다 쏟아도 모자랄 것이 당연지사.

    광범위 공격기가 달린 무기가 필요했다.

    “인벤토리 오픈.”

    파지직!

    나는 찢어진 허공에 손을 집어넣고, 적절한 아이템을 물색했다.

    “범위기가 달린 놈이 분명…….”

    그래. 찾았다.

    이게 그나마 제일 쓸 만하겠다.

    스르릉! 아공간에서 빠져나오는 내 손 위. 거대하고 새빨간 칼날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꺼내보는데. 이거.’

    한참을 빼내고 나서야 겨우, 대검이 제 모습을 완전히 보였다.

    손잡이부터 가드, 두께가 내 몸통만 한 칼날까지 피처럼 시뻘건 대검. 날 길이만 3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특 대검이었다.

    그야말로 그것은, 검이라기엔 너무 거대했다.

    “흐음.”

    쿠우웅!

    그 시뻘건 흉물을 바닥에 기대자, 그것만으로도 지축이 울렸다.

    ‘혈천갑이 생긴 뒤론 쓸 일이 없었는데…….’

    꽤나 오랜만에 보는 웅장한 자태. 그리고 익숙한 핏빛의 색상 덕에 추억이 새록새록 돋는다.

    삐빅. 오랫동안 쳐다보니 자연스럽게 상태창이 떠올랐다.

    [아이템 정보]

    [명칭: 다인 슬라이프(B급)]

    [타입: 무기/특대검]

    [효과: 유효타 성공 시 적의 생명력 일부 흡수. 특수스킬 ‘혈의 누’ 사용 가능.]

    [효력 범위: 사용한 생명력에 따라 유동적.]

    [상세: 제68던전의 던전 마스터, ‘세븐 미스트레스’의 클리어 보상. 스킬 ‘혈의 누’를 발동할 시, 폭주하는 피의 파동을 칼날에 씌워 태산명동의 일격을 가한다.]

    딱 봐도 그렇게 생겼지만. ‘다인 슬라이프’는 혈질 장비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혈질 장비는 랭크의 고하와 드롭한 던전을 막론하고, 무조건 한 단계 이상급의 고성능을 자랑하는 것이 불변의 특징.

    그것은 이 대검 또한… 당연히 그러하다.

    ‘숨길 거 있나.’

    곧바로 필살기부터 들어가자.

    대검을 쥔 손끝에 힘을 줬고, 푸화악! 손바닥에서 막대한 피가 터져 나왔다.

    [스킬 발동: 혈의 누]

    스르륵, 스륵.

    쏟아진 내 피를 다인 슬라이프가 탐욕스럽게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쿠르르륵! 이내 손잡이를 타고 올라간 시뻘건 기운이, 거대한 칼날 전체를 뒤덮고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찔한 탈력감에 달뜬 숨을 내뱉었다.

    “후우우…….”

    콰콰콰콰!!

    동시에 칼날이 선명한 핏빛 오라를 휘감아 더더욱 거대해졌다.

    내 방대한 생명력의 10% 정도를 갈아 넣은 결과. 다인 슬라이프의 칼날은 붉은 기운에 휩싸여, 5미터에 육박하는 리치를 자랑했다.

    “그럼.”

    쿠구구구!

    그 거대한 대검을 양손으로 힘껏 쥐고. 목검처럼 쉽사리 들어올렸다.

    철컹! 그리고 어느새 지척까지 우글거리는 쐐기벌들에게, 그것을 겨누었다.

    “와봐라.”

    마치 내 말이라도 알아들은 양, 부우우우! 사방에서 거대한 벌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키이이이이!!

    ―키기기기긱!!

    위협적인 포효. 그리고 세찬 날갯짓 소리가 순식간에 사방에서 가까워진다.

    나는 사나운 웃음을 지었고.

    “후웃……!”

    호흡을 한껏 머금은 뒤. 그대로 대검을 수직으로 휘둘렀다.

    검 끝이 지면을 후려치는 그 순간.

    ―키이이……?

    콰콰콰콰쾅!!

    맞닿은 칼날을 중심으로 가공할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시뻘건 충격파에 얻어맞은 쐐기벌들은 흔적도 없이 분쇄되어 갔다.

    ‘태산명동’이라는 상태창의 수식어는, 일말의 과장도 없었다.

    ―쿠에에에엑!!

    ―키익! 키이이이!!

    다인 슬라이프로 내리친 단 한 방.

    나무는 온통 뽑히거나 부러지고, 바위는 갈려나가 잔해만 가득하다. 지면도 깊숙하게 움푹 파여, 마치 운석이 떨어진 듯했다.

    주위 50미터에 이르는 영역이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키이이… 키이……!

    나를 향해 달려들던 쐐기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가까이 있던 놈들부터 수백 마리가 즉사했고. 그나마 후방에 있어서 살아남은 놈들조차 사지가 온통 너덜거렸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죽기 직전의 처절한 울음소리만 간간히 들려온다.

    “여전히… 파워 하나는 절륜하네.”

    나는 그 처참한 파괴 현장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역시 다인 슬라이프. 파괴력은 여전히 내 스킬들 중에서도 원탑급이다.

    내가 스피드 중시의 헌터만 아니었어도. 그리고 생명력 소비 효율이 살짝만 더 좋았어도… 이 무기가 내 주력이 됐을지도 모르지.

    ‘그런 무기가 B급에서 머물 리가 없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휘젓는 한편.

    철컹! 붉게 번들거리는 다인 슬라이프를, 다시 전방에 겨누었다.

    “그럼 이제…….”

    거대한 칼끝은 정확히 여왕벌의 미간을 노리고 있었다.

    히죽. 한층 잔인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죽자.”

    수많은 군세가 방금 일격에 갈려나갔다.

    여왕의 주변엔 이미, 초라한 패잔병 수십 마리밖에 없었다.

    ―키익. 키이이……!

    파르르. 부스스스!

    놈의 더듬이와 날개가 미친 듯이 떨리며 공명하고 있다. 공포 때문인가? 아니면 분노 때문인가? 그것까진 모르겠다.

    이세계 괴물벌 생태 따위, 딱히 알기 싫다.

    ―키에에에엑!!

    여왕벌이 최후의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것이 놈의 유언이었다.

    ―케에에엑!

    ―쿠에에에엑!!

    퍼억! 퍼거걱!

    나는 우악스럽게 거병을 이리저리 휘둘렀고. 비장하게 달려드는 패잔병들의 돌격을 손쉽게 분쇄해 버렸다.

    그렇게 휘두르고, 나아가고. 한 발짝씩 차근차근 전진하길 잠시.

    “죽어.”

    마침내 나는 여왕벌의 코앞에서 거병을 치켜들었고.

    퍼걱! 그대로 내리쳤다.

    ―크레레레렉!!

    일격사.

    놈은 단말마와 함께 단박에 두 조각으로 짓이겨졌다.

    푸화악! 엄청난 양의 체액이 온몸으로 튀었다.

    “…쓰읍. X발.”

    나는 불쾌감에 휩싸여 즉각 여왕벌에게서 떨어졌다.

    소매로 대충 얼굴을 북북 닦아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제1시험에 통과하셨습니다.]

    [제2시험의 시작까지 남은 시간: 1분]

    어느새 눈앞엔 그런 패널이 떠올라 있었다.

    큐브의 1차 시험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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