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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35화 (135/235)

135화

<1004번째 로그라이크 헌터(4)>

얼마나 많은 인간 모양 짐승을 베어냈을까.

[남은 수라의 수: 32개체]

푸확! 퍼버벅!

얼마나 도륙내고. 대나무 숲을 시커먼 선혈로 물들이고.

[남은 수라의 수: 25개체]

―크… 카학.

―아. 아아... 선향. 선향의 빛이, 눈앞에……!

―…어머니. 저는. 정말…….

[남은 수라의 수: 14개체]

얼마나 많은 수라들의 단말마를 지나치고.

의미는 모르겠지만, 괴한들의 절절한 유언들을 연주해 냈을까.

[남은 수라의 수: 7개체]

온통 잘리고 부러지고, 질척한 검은 핏자국으로 쑥대밭이 된 대나무 숲 한가운데.

마침내 최후의 수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은 수라의 수: 1개체]

푸직.

우지직. 우드득.

마지막 수라의 잔영은… 이미 죽은 일반인 하나를, 칼끝으로 연신 헤집고 있었다.

―후우. 후우… 후욱!

놈은 유일하게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길게 묶어 산발하는 검은 머리칼. 중년에 가까운 외형. 고목처럼 갈라지고 메마른 잿빛 피부.

그리고 다른 수라와 똑같이, 시커먼 안구에 시뻘건 눈동자.

―카하……. 하아. 이걸로, 또… 하나.

거칠게 흩날리는 시커먼 도포. 지금도 열심히 위아래로 움직이는 거대한 참마도까지.

그 모든 것들을 과시하듯, 놈은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인가. 나는, 아직도… 이래도. 아직인 것이냐.

온 힘을 다해서, 우지직.

광기로 희번덕한 눈을 빛내며, 우드득.

그 반복 행동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가듯이, 뿌드득.

이미 죽은 시신을 계속해서 찢어발긴다.

―하아아아…….

문득 놈의 광기 어린 행동이 멎었고. 허연 입김이 메마른 입에서 흘러나왔다.

잠깐 장내에 쥐 죽은 듯한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선향에 갈 것이다.

그리고 놈이 입을 놀렸다.

시뻘건 시선이 곧장 하늘로 향했다. 대나무와 안개 사이로 어렴풋이 비치는 햇살을 보며, 놈은 중얼거렸다.

―불의를 심판하고. 대의를 쫓고. 자격 없는 자들을 처단하다 보면… 언젠가 선향에 닿는다. 그렇게 믿었지.

우드득!

마침내 남자는 시신의 목을 잘라내 버렸다.

스르릉. 날 길이만 2미터가 넘는 거대한 참마도에서, 선혈이 뚝뚝 흘러내린다.

―아아……. 아아아. 그래. 이 소리야. 그대는, 들리지 않는가?

문득 남자는 이마를 싸매고 중얼거렸다.

뚫어지게 쳐다보던 햇빛 사이에서 뭔가라도 본 듯이.

그리고 스산한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이 대숲에서, 뭔가라도 들은 듯이.

―선향이 나를 부르고 있다. 어머니가 계신 고향이. 드디어, 나를…….

번뜩. 놈의 시뻘건 안광이 내게 향했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흐느적거리며, 철컹. 내게 거대한 참마도를 들이밀었다.

―그대. 선향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구나.

당연한 소리를 지껄이는 최후의 수라.

미친놈 귓가에 지금 뭔 소리가 들리고 있는지? 내 알 바가 아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보나마나 지나가던 개부랄 뜯어먹는 소리겠지.

―그래. 네놈이 마지막일 것이다. 너로, 마지막.

놈은 미친놈처럼 나를 향해 연신 중얼거렸고.

투학! 곧 놈의 온몸에서 시커먼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선향이 가까워졌노라.

투기는 꿀럭거리며 놈의 오른쪽 반신을 감쌌고. 참마도의 표면도 집어삼켰다.

이내 시커먼 무정형의 갑주가 되어, 칠흑의 화염처럼 맹렬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너를 죽이고, 나는.

번쩍.

투기로 가려진 오른쪽 눈두덩.

그 안에서 시뻘건 안광이 폭사했다.

―어머니가 잠든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놈의 상체가 한계까지 낮게 깔렸고. 직후 시야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공격.’

잠깐의 깜빡이는 점멸. 순식간에 참마도가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놈이 정면으로 쇄도해 들어온 것이다.

“어딜.”

슬쩍, 재빨리 상체를 숙여 검의 궤도를 벗어났다.

쉬이잉! 서늘한 금속음. 날카로운 일섬이 머리칼 몇 개를 스친다.

반경 약 30미터. 우리를 둘러싼 대나무들이 일제히, 참격의 절단면을 따라 우수수 쓰러져 내렸다.

―하아아앗!!

가공할 위력의 일격이었지만, 놈은 지치지도 않고 제2격, 3격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쉬익! 쉬쉬쉭! 날카로운 풍압이 연신 내 주위를 할퀴었다.

―차하아압!

우렁찬 기합 소리가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거대한 참마도에서 가공할 돌풍이 일어났다.

푸화악! 대나무는 물론이고, 안개와 공기마저 우악스럽게 잘려나간다.

“쓰읍.”

나는 잠깐 공격할 생각을 접고 회피에 집중했다.

왼쪽. 오른쪽. 그리고 상단과 하단. 놈의 파상 공세는 그 뒤로도 쉼 없이 이어졌다.

결국 회피를 반복하던 나는, 어느 순간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귀찮게 하네. 진짜.”

절공(切空)의 일섬.

기술 이름 그대로, 공간 자체를 절단하는 스킬이다.

정확히는 그냥 스킬은 아니고, 무기 스킬이지.

‘저 거대한 참마도…….’

저 검에 달린 부가 스킬 같은 것이다.

어째서 알고 있냐면, 내가 이미 똑같은 물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놈을 사냥해서 얻은 저 참마도에 분명 저런 스킬이 달려 있었다.

‘가드 불가. 게다가 방어력 관통이었던가.’

공간 자체를 절단하기에 통상적인 가드는 불능.

어떻게 스킬로 막아낸다 해도, 상대의 방어력을 약간이나마 관통하는 기능도 달려있다. 무려 크로노스 대거와 블라이스의 단검 효과가 합쳐진 스킬.

그래서 순간적인 화력 면에서 보면, 분명 굉장히 좋은 스킬이다.

‘어디까지나 B급치고는, 말이지만.’

다만 무기 자체의 성능 차가 심해서 쓰일 일이 없다.

이미 비슷한 효과가 기본 옵션으로 달린 ‘크로노스 대거’를 보유한 나다. B급의 그저 그런 참마도는 크로노스 대거에 비빌 구석이 없었다.

‘직접 쓰기는 좀 계륵이고. 상대하기도 껄끄러운, X같은 무기.’

상대하기 껄끄러운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저놈이 줄기차게 사용하는 것만 봐도 알겠지만. 절공의 일섬은 마력 소모가 굉장히 적어서 필살기급 스킬 같은 게 아니다.

말하자면 지금 저게, 놈의 평타였다.

―도망치지 마라……!

키이잉!

문득 날카로운 검광이 눈앞에서 번득였고. 최후의 수라가 지척에서 등장했다.

순간적으로 서로의 신형이 스쳐 지나갔다.

놈은 이를 악물고, 핏발과 증오가 어린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너를 죽이고. 선향에 갈 것이다아아!!

미친놈처럼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는 수라의 잔영.

당최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놈의 말에 대꾸를 해줬다.

“3.”

쇄애액!

동시에 날카로운 종베기가 작렬한다. 나는 허리를 다이내믹하게 꺾어, 그것을 가까스로 피해냈다.

피싯. 얕게 스친 볼에서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2.”

그쯤에서 나는 한 번 더 중얼거렸다.

정작 미친놈처럼 난도질을 해대는 수라의 잔영은 그것을 듣지 못했지만. 솔직히 듣든 못 듣든 딱히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이 싸움은, 곧 내 승리로 끝날 거니까.

―하아아앗!!

푸화악!

칠흑의 투기를 두른 혼신의 일격이, 내 머리를 쪼갤 듯이 쏟아져 내렸다.

당연히 나는 그것을 피해냈고. 검은 칼날은 지면을 거세게 후려쳤다.

콰아앙! 시커먼 광풍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

콰콰콰콰!

마구잡이로 몰아친 바람이 용오름을 만든다.

조각난 대나무가 휩쓸려 올라갔고, 안개가 순간적으로 걷히며 시야가 확 트였다.

나는 두 다리를 잔뜩 굽혔고. 얼굴을 가린 채 그 자리에서 버티기 시작했다.

“…1.”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카운트다운이었다. 무엇에 대한 카운트다운인가 하면…….

―크, 허억……!

절공의 일섬 지속 시간.

그 임계점에 도달하는 카운트다운이다.

―카하악… 학, 하악…!

털썩.

수라의 잔영이 별안간 시커먼 핏줄기를 토해내며 그대로 무릎부터 바닥에 쓰러졌다.

놈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나를 노려볼 뿐. 더 이상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서, 선향……. 나는, 선향…에……!

휘두르긴커녕, 탱그랑!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손은 점차 힘이 빠졌고. 놈은 참마도를 놓쳐버렸다.

게임 셋. 상황은 이미 끝났다.

“내가 그래서 안 쓴다. 그거.”

비웃음 반 동정심 반으로 중얼거렸다.

지속 시간 끝나면 반드시, 무조건 탈진. 그것이 절공의 일섬이 가지는 최악의 단점이다.

그 단점은… 검의 원래 주인인 수라의 잔영도 피할 수 없다.

‘공격 일변도… 수준을 넘었지. 저건.’

내가 죽기 전에 상대를 무조건 죽여버린다는 마인드. 사실상 자폭 테러에 가깝다.

저 참마도를 지금껏 장난으로라도 쓰지 않는 이유. 바로 저것이다.

뒤가 없어도 너무 없어.

“그래도 민첩이 낮던 시절엔, 너만큼 빡치는 놈도 없었다.”

그래서 이놈은 기믹 보스가 아님에도 기믹 보스와 비슷한 면이 있다.

저 일격필살의 참격을 피할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것으로 난이도가 심각하게 갈린다.

못 피할 스펙 때는 얘만큼 어려운 놈도 없었지만. 일정 스펙을 넘은 후론, 그냥 시간만 버티면 알아서 자멸하는 놈으로 전락했으니까.

―아……. 아아. 선향……. 선향은, 어머니는 어디에 있는가…….

최후의 수라는 이미 죽음을 직감한 표정이다.

눈을 지그시 감고 피눈물을 줄줄 흘리며. 놈은 여전히 입으로는 선향을 부르짖고 있었다.

참 X발 한결 같은 새끼다.

“개소리 좀 그쯤 하고. 가라.”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한편.

푸화악! 곧장 놈의 대가리를 밟아 으깨버렸다.

[남은 수라의 수: 0개체]

마침내 패널이 모든 수라를 사냥했음을 알렸다.

이제 남은 것은 던전 소멸 통보뿐.

[제14던전 ‘망향의 검림’의 던전 마스터, ‘망향의 수라’들이 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

[게이트가 힘을 잃고 소멸합니다. 던전의 붕괴가 종식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생각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패널이 튀어나왔다.

그러면 이제, 내가 가장 기다리던 핵심만이 남았는데.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오랜만에, 큰 거 오나.”

기대감을 담아 중얼거렸고.

유난히 오랜 기다림 끝에, 삐빅. 드디어 보상 패널이 등장했다.

[던전 마스터 ‘망향의 수라’ 사냥 보상을 획득합니다.]

[아이템 ‘선향의 참마도’를 획득하셨습니다.]

“예미.”

짝! 이마를 소리 나게 후려갈겼다.

내 반응은 둘째 치고. 이름만 봐도 짐작이 되지 않는가?

얻은 보상은… 문제의 쓰레기 스킬을 내장한 참마도. 최후의 수라가 남긴 유품이었다.

“…뭘 기대하겠냐.”

실망이 잔뜩 깃든 한숨을 내쉬는 한편. 그대로 오른손을 들어 목 주변으로 가져갔다.

스르릉. 시퍼런 단검 날이 곧장 목으로 맞닿는다.

“후욱, 후우.”

심호흡을 몇 번 한다.

그걸로 아쉬움은 전부 날려버리고. 망설임도 함께, 강제로 잊었다.

푸화악! 곧장 칼날을 목 깊숙이 밀어 넣었다.

“……!!”

털썩.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엎어졌다.

신음을 억지로 삼켰다. 반사적으로 격렬해지는 숨에, 시뻘건 피거품이 섞여 솟아난다.

“그… 후우, 그윽……!”

이내 죽어가는 사람 특유의 그르렁거림만이 새어나왔다.

의식이 빠르게 멍해지고, 오직 ‘아프다’라는 생각만이 새빨갛게 뇌리를 점철해 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놀랍도록 온몸이 편해진다.

“…하아아.”

본능적으로 숨을 길게 내쉬고. 나는 직감한다.

이것이 이번 생의 내가 내뱉는 마지막 호흡이다.

“…이브.”

문득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브를 부르는 목소리. 누가 낸 것인지 멍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난가?’

사실 생각할 것도 없이 당연히 나다.

그러나 나는 죽어가느라 정신이 없다. 단숨에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다.

“이…브.”

어쨌든 무의식적으로 이브를 부르짖고 있었다.

죽는 마당에 갑자기 왜 불렀을까. 미안함? 아니면 일종의 원망과 야속함?

그것도 아니면, 다음 생에 눈 뜨자마자 변명할 걱정 때문인가?

“…컥.”

잘 모르겠다.

그 뒤로 곧장, 모든 것이 암전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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