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16화 (116/235)

116화

<100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5)>

그렇게 고대했던 검사 작업을 시작하려는 순간.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문제가 터져 나왔으니.

“아 싫어! 안 할 거라고! 이, 이거 놔아앗!”

검사의 당사자. 이브가 신체검사를 극렬히 거절했다는 점이었다.

“그, 이브야? 잠깐. 아주 잠깐이면 되니까……!”

“익! 이익! 저리 가! 만지지 말라고!”

원통형 신체 스캔기에 어떻게든 이브를 눕히려는 오원태. 그리고 오원태의 손길을 필사적으로 뿌리치려 온몸을 버둥거리는 이브.

두 사람의 실랑이가 한동안 지리멸렬하게 이어졌다.

“아니, 이브야! 아픈 것도 아니야! 가만히만. 그냥 몇 분 동안 가만히만 있으면 돼!”

“몰라! 이 변태! 변태야! 죽엇! 저리 가라고!!”

퍼억!

별안간 시원한 타격감이 울린다.

이브가 격렬하게 휘두르는 팔다리에, 오원태가 복부를 가격당한 것이다.

“크학! 이, 이건, 뼛속까지 아프다!”

털썩. 오원태가 순간 눈알이 핑 돌며 패잔병처럼 무참히 쓰러진다.

이브는 그 틈을 타 오원태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허, 헌터님!”

“아, 아빠!”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둘 다 간절한 구원을 바라는 표정이다.

이 무의미한 싸움에 가해자 따윈 아무도 없다.

내 눈앞엔 오직, 피해자만이 있었다.

“아, 아빠! 구해줘! 이 변태 아저씨가! 나 못살게 굴어! 아빠아아앗!!”

이브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울먹이며 외쳤다.

선즙 필승 시전. 선수를 빼앗겨 버린 오원태는 유구무언.

그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아픈 배를 문지를 뿐이다.

“…후우.”

나는 영혼을 토해내는 통렬한 한숨을 내쉬었고. 결국, 오원태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항복의 사인이었다.

“잠깐 쉬죠. 제가 설득을 좀 해보겠습니다.”

“허억, 헉… 이, 이것 참. 알겠습니다.”

그렇게 오원태는 전선에서 리타이어. 으르렁거리는 이브 앞에 내가 대타로 나왔다.

나는 지긋이 이브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뭐가 문제냐. 이브.”

“가, 갑자기 무슨 검사를 하겠다는 건데? 나, 난 멀쩡해! 아픈 데도 하나도 없단 말이야!!”

“딱히 문제가 있어서 검사하는 게 아니야.”

“문제가 없으면! 검사를 왜 하냐구! 내가 저 아저씨를 어떻게 믿고!!”

“그건…….”

이브의 입장에선 지극히 옳은 소리. 대답할 말이 좀 궁색하다.

나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자아 찾기?”

“헛소리하지 마, 아빠! 갑자기 뭔 놈의 자아를 찾아!”

“그냥 MBTI 검사한다고 생각해라. 이브.”

“그건 또 뭔데!”

“옛날에 유행했던 성격 테스트 같은 건데…….”

“아니, 누가 설명해 달래?! 뭐든 간에 싫어! 다 싫으니까 빨리 집이나 가자, 아빠! 응?! 나… 무섭다고! 무섭단 말야!!”

이브는 불안에 떨다 못해, 결국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

하긴. 갑자기 모르는 장소로 끌려와서, 자기 아빠와 결탁한 중년 탈모 아저씨한테 대뜸 신체검사를 받는다는데.

싸구려 에로 만화 전개냐. 불안하고 무서울 만도 하다.

‘그래도 우는 것까진, 좀 예상 밖인데.’

내 생각보다 많이 무서웠나 보다.

이건 사전 설명을 부실하게 해준, 내 부덕의 소치지 싶다.

‘너무 무신경했나.’

내가 이런 면으론 원래부터 주변머리가 좀 없다.

회귀를 반복하면서 일부러 없앤 것도 좀 있다. 타인의 감정 변화에 너무 민감하면, 회귀자 생활 오래 못하니까.

“…이브.”

그래서 이런 상황에 어떻게 설득을 하면 좋을지. 그런 건 잘 모르겠다.

그저 내 방식대로, 정공법으로 파헤쳐 나갈 뿐이다.

“날 믿냐.”

“으, 응?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의 소리다. 너는 나를 신뢰하고 있냐, 이브.”

“그, 그야. 당연히… 내 아빠인걸.”

이브는 좀 쑥스러운지, 허리를 슬슬 꼬며 중얼거렸다.

일견 기쁘면서도 다행인 대답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계속 말했다.

“저 아저씨는 절대 널 해치지 못한다.”

“하, 하지만……!”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한다 싶은 순간. 내가 저 새끼 사지를 박살 낸 다음, 대가리를 터뜨려 버릴 거다.”

“……!”

“제발 죽여달라고 빌 때까지 괴롭히다, 결국엔 죽여버릴 거다. 그러니 걱정은 마라.”

이브는 벙찐 표정으로 날 응시했다.

그 대신이라 하면 좀 뭐 하고. 오원태 쪽에서 자지러지는 반응이 나왔다.

“아니, 갑자기 왜 나갖고 지랄……!?”

오원태가 해쓱해진 표정으로 연신 얼굴을 더듬거렸다. 아직 자기 머리가 잘 붙어있는지 확인하듯이.

이내 그가 진절머리 내며 몸서리를 쳤다.

“허, 허튼짓 안 해요, 안 해!! 칵 퉤 X발!”

오랜만에 딸내미랑 정서 교감 좀 한다는데. 지방방송이 좀 많이 시끄럽다.

‘사람이 눈치가 없군.’

이래서 이과충들이란.

아무튼 나는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믿는 나를 믿어라. 이브.”

“…치, 말은.”

그렇게까지 말하자, 이브도 어쩔 수 없이 납득했다.

저벅저벅. 그녀가 결국 신체 스캔기를 향해 자기 발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이브가 스캔기에 몸을 누이기 직전.

짐짓 간절한 시선으로, 나를 흘깃 돌아봤다.

“…아빠.”

“왜 그러냐.”

“저, 절대, 나 두고 어디 가면 안 돼?”

“안 간다.”

“진짜지? 저번처럼 또, 나 떼놓고 혼자 죽어버리거나… 그러는 거 아니지?”

“절대로 안 그런다. 약속할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실 안 그러는 게 아니고. 내 입장에선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한눈팔다 이브한테 사단이라도 나면? 그 뒤로 어떻게 감당하려고.

‘오원태를 100퍼센트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이야.’

그러니까 검사하는 내내, 오원태를 눈에 불 켜고 밀착 감시할 예정이다.

허튼짓한다 싶으면. 아까 선언한 대로, 즉시 목을 비틀어 뽑아버릴 거다.

“…응. 알았어.”

이브는 단호한 내 대답에 용기를 얻은 듯했다.

그녀가 입술을 잘근 물며 고개를 끄덕였고. 희미한 미소와 함께 나를 쳐다봤다.

“그러면 나, 검사받을게.”

“그래. 잘 생각했다.”

“난 아빠를 믿으니까. 아빠가 나한테, 해로운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그렇지?”

“…그래.”

그건 좀 무거운 신뢰였다.

불과 2회차 전까지만 해도 이브를 죽일지 말지 툭하면 고민했고. 수틀리면 언제든지 죽여버릴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연명할 수 있었던 건, 지극히 실리적인 이유 때문이다.

‘수아랑 엮여있고. 혈천갑의 모체니까.’

그때의 내게 이브란?

혈천갑을 빌려주는 외계인 소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니. 생각하다 보니 뭔가 말이 이상하다.

‘…그때는?’

그때의 내겐 그랬다?

그러면 지금은 어떻지. 회귀가 반복된 동안 뭔가 심적인 변화가 있었나.

1003회차에 이른 지금. 나는, 이브를 어떤 스탠스로 대하고 있지?

“그, 그럼. 헌터님.”

들려온 목소리 덕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어느새 오원태가 다가와 있었다.

“검사를… 슬슬 시작해 보겠습니다. 괘, 괜찮습니까?”

아까 내가 말했던 으름장 때문인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한층 더 조심스러워져 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시작합시다.”

이브는 신체 스캔기에 정자세로 누웠고. 오원태가 기계를 만지작거린다.

위이잉! 묵직한 작동음이 울려 퍼졌다.

* * *

CT나 엑스레이, 그리고 채혈 등의 고전적 방법.

던전의 각종 오버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헌터 협회의 최신 기술까지.

이브의 신체검사엔 눈알 돌아갈 정도로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고. 덕분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소요했다.

“그… 이브 님. 잠깐 따끔합니다?”

다른 건 별문제 없이 스무스하게 넘어갔는데. 채혈 쪽에선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다.

‘따끔’ 소리에, 이브가 단숨에 움츠러든 것이다.

“아저씨. 그, 그, 그 뾰족한 거. 뭐, 뭐야?”

“어… 이, 이걸로 이브 님의 피를 좀 뽑을 겁니다. 혈액 성분도 분석해야 하니까…….”

“설마, 그 바늘로. 나를 찌르겠다고?!”

“어… 네.”

“히이익!! 시, 싫어! 저리가! 이 악마! 악마야!!”

이브가 주사기를 보고 엄청나게 겁을 먹었고.

덕분에 나한테 모가지 뽑힐까 봐, 오원태도 엄청나게 겁을 먹었다.

“아, 아빠!”

“허, 헌터님!”

아까와 똑같은 상황. 양쪽에서 구원을 바라는 시선이 쏟아진다.

나는 한숨을 흘리며 이브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많이 무서웠구나. 이브.”

이브의 어깨에 양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녀가 진정하도록 천천히 쓸어줬다.

“으응, 아빠……!”

이브는 자기편을 들어줬다고 생각했는지, 울 것 같은 목소리를 냈다.

그 순간. 나는 이브의 양어깨를 그대로 단단히 붙들었다.

“엑?”

갑작스러운 전개에 이브가 탄성을 흘렸다.

그러든 말든. 나는 이브를 옴짝달싹 못 하게 의자에 앉힌 후, 오원태를 향해 내밀었다.

“아, 아, 아빠?”

“가만있자. 힘주면 안 아플 것도 아프다.”

미안하지만 이브.

이번엔 오원태의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진행시켜.”

단호한 판결.

두 사람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당연히 이브는 절망했고, 오원태는 안도했다.

“아빠아아! 이, 이 거짓말쟁이! 나, 날 속였어!!”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짓이다. 이브.”

“거짓말! 입만 벌리면 거짓말! 다시는, 닷씨는! 내가 아빠를 믿나 봐라!!”

이브가 빽빽 소리를 지른다.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지만, 내가 짓누르는 힘 앞에선 모든 저항이 무의미했다.

푸슉. 주삿바늘이 그녀의 여린 팔뚝을 뚫고 들어갔다.

“으읏!!”

이브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눈꼬리 끝에 눈물이 찔금 맺혀 흐른다.

쭈우욱, 혈액이 주삿바늘을 타고 서서히 차올랐다.

“…….”

나는 그 모습을 홀린 듯이 묵묵히 관망했다.

주사기 안에 넘실거리는 이브의 피. 전생과 현생 통틀어 처음으로 목격한 그녀의 선혈은… 선명한 빨간색이다.

‘…똑같네.’

평범한 인간처럼 붉은색.

그것이 어쩐지 신기하면서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 * *

모든 검사 작업이 끝난 것은 거의 심야가 된 뒤였다.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입장에선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피곤함에 못 이겨 하품을 연신 쩍쩍하던 와중.

“후우. 이걸로 일단, 제 선에서 가능한 건 전부 끝났습니다.”

오원태가 굽혔던 허리를 쫙 펴며, 홀가분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이브는 ‘끝났다’라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내 쪽으로 총알같이 달려왔고. 곧장 내 뒤로 숨어들었다.

나를 오원태의 방패막이로 세운 것이다.

“…하핫. 참내.”

오원태는 그 반응에 쓴웃음을 짓는 한편. 내게 슬쩍 손짓했다.

부르는 제스처다.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뭡니까.”

“잠깐 둘이서 대화 좀, 괜찮겠습니까.”

뭐가 또 궁금해지셨길래.

그런 생각을 잠깐 했지만. 거부할 이유가 없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시죠.”

이브를 대충 앉혀 놓은 후, 연구실 구석까지 멀찌감치 떨어졌다.

오원태와 둘이서 한동안 대치했고. 이내 그가 한층 작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일단, 결과가 나올 때까진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그렇습니까.”

당장 뚝딱 나오진 않는군. 아쉬운 마음에 대답이 좀 쳐졌다.

그런데 그것을 이상하게 해석했는지, 오원태가 허겁지겁 변명을 주워섬겼다.

“이, 이건 저를 패 죽여도 어쩔 수가 없어요! 혈액 검사나 마력 파장 검사 같은 건, 시약이 반응할 때까지 기다려야 해서… 빨라도 내일 오전입니다!”

“딱히 의심한 거 아닙니다. 쫄지 마요.”

“아… 나, 난 또.”

내가 고개를 젓자, 그제야 오원태도 안심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한결 긴장이 풀린 얼굴로 계속 말했다.

“그럼 어떻게, 지금 당장 나오는 검사 결과들이라도… 취합해서 알려드릴까요?”

나는 쭈뼛거리는 오원태를 잠깐 주시했다.

이내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됐습니다.”

“아. 그, 그래요?”

“예. 모든 결과가 나오면 그때 연락 주십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 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나는 던전 생물의 검사나 조사에 대해선 일자무식이다. 문외한인 내가 일부 검사 결과만 먼저 들어봤자 아무것도 모른다.

그럴 바엔 그냥, 전문가인 오원태한테 종합 소견을 듣는 게 나을 것 같아서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답니까.”

나는 고개를 까딱이며 물었다.

그러자 오원태가 눈에 띄게 주저하기 시작했다.

“어, 뭐… 예. 필수적인 전달 사항은 이게 다긴 한데. 그…….”

척 봐도 이게 다는 아닌 것 같은 행색. 필수적 전달 사항 말고, 뭔가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잡담이라도 잠깐은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해보십쇼.”

“그, 그렇습니까?”

“예. 저 다짜고짜 주먹부터 나가는 사람 아닙니다.”

“허… 그러십니까.”

오원태가 노골적으로 ‘퍽이나’ 하는 표정을 띄웠다.

기껏 호의를 보여줘도 그렇게 삐딱하게 나오면, 원태야. 내가 주먹부터 나가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것을 오원태도 금세 깨달았는지, 퍼뜩 안색을 고치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다른 게 아니고요. 그냥 좀 궁금한 게 생겨서.”

“예. 뭡니까.”

“저 던전 생물… 이브라고 했던가요?”

“맞습니다.”

“그쪽, 한정용 헌터님을 ‘아빠’라고 부르던데.”

“아.”

“아니 뭐, 민감한 사안이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개인적으로 내막이 좀 궁금해지긴 하네요. 예…….”

저건 정말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일까.

아니면 모종의 이유로, 내게서 최대한 정보를 빼내기 위한 추궁일까.

어느 쪽이든 내 대답은 변하지 않는다.

“그건 우리가 좀 더 친해지면. 그때 말씀드리죠.”

“아. 예, 뭐. 아쉽게 됐네요.”

참고로 난, 이 이상 오원태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래서 그냥 ‘노코멘트’를 길게 늘인 것과 다름없었다.

멋쩍게 입맛을 다시는 오원태에게, 나는 역으로 말을 걸었다.

“그럼 오원태 씨. 이번엔 제 쪽에서 좀 묻고 싶은데.”

“아, 예. 뭡니까.”

“계좌 번호 좀 알려주십쇼.”

“…예?”

다짜고짜 그에게 계좌 번호를 요구했다.

오원태는 미심쩍어했지만, 결국은 반항하지 못했다. 조심스레 내게 계좌를 알려줬다.

나는 핸드폰을 빠르게 조작했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보냈습니다.”

“…보내다니? 뭐, 뭐요.”

“오늘치 검사의 보수. 한화로 10억 정도 보냈습니다.”

“어? 으엥?!”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부릅뜬 오원태. 황급히 자기 핸드폰을 매만지기 시작한다.

이내 액정을 쳐다보는 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일, 십, 백, 천, 만… 지, 지, 진짜네. 10억이……!”

“이건 의뢰의 보수 겸. 입막음 비용 포함입니다.”

“아, 아아……?”

“이걸로 당신은 명실상부, 나와 한배를 탄 겁니다. 이 돈이 그 증거가 될 거고요.”

단순히 고마워서 주는 돈은 아니다.

이건 일종의 협박이기도 했다.

‘행여 밀고를 생각하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관둬라.’

밀고해도 나 혼자는 죽지 않는다.

이 10억이라는 거금의 흐름을 증거 삼아서. 나는 어떻게든 너를 공범으로 연루시킬 것이다.

‘이 돈이 증거가 된다’라 함은, 그런 의미다.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면 10억을 더 드리죠. 우선은 선불 10억입니다.”

“으, 어… 아, 아니… 이, 이렇게 큰돈을 대체, 어디서……!”

“더러운 돈은 아니니 걱정 마십쇼.”

이건 순도 100% 사실이다.

저 10억은 내가 내 물건 팔아서, 정당하게 벌어들인 돈이다.

나는 오늘 헌터 협회에 방문하기 전. 헌터들을 위해 마련된 던전 장비 거래처인, ‘아이템 옥션’에 잠깐 들렀었다.

‘B급 장비 네댓 개 파니까 뚝딱이더만.’

인벤토리에 썩어 넘치는 B급 이하의 장비들을 몇 개 팔아치웠다.

애초에 이럴 때 급전으로 땡겨 쓰려고, 계승해서 쟁여놓은 아이템들이다.

내겐 딱히 도움도 안 되는 저급 아이템. 아까울 건 전혀 없었다.

“그럼.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이브를 대동한 채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덜컹. 연구실 문을 닫고, 그새 어둠에 잠겨버린 연구동 복도로 나왔다.

“어… 어, 어어……?”

내가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오원태는 정신을 못 차린 채 어버버거리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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