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100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6)>
11월 28일. 심야.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해운대. 한 으슥한 골목길.
나는 드디어, 애덤 크로스와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
“…….”
감동의 상봉 직후.
우리는 서로를 빤히 주시하며 대치하는 중이다.
“…….”
“…….”
눌러 죽인 날 선 침묵이 감돌았다.
날카로운 시선이 서로를 할퀴듯 오간다.
일촉즉발의 상황 한가운데. 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인질을 교환하자.”
교환 제의였다.
당연히 말만으로는 끝내지 않았다. 즉시 행동으로 보여줬다.
“이 여자를 살리고 싶으면. 이세라를 넘겨라.”
내가 가진 교섭 카드를 크로스 박사에게 어필한다.
스르륵. 기절한 로즈 휴스턴을, 크로스 박사 쪽으로 디밀었다.
“…크윽……!”
애덤 크로스가 비통한 신음을 흘렸다.
놈의 시선이 초조한 듯이 방황했다. 연신 내 면상과 자기 품에 바짝 안긴 안대의 여인… 이세라를 번갈아 쳐다본다.
이내 그는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이런, 지미 X발!”
그리고 씹어뱉듯이 욕지기를 주워섬겼다.
‘오, 뻑’도 아니고. ‘피스 옵 쉿’도 아니다. 그렇다고 ‘지숫스 크롸이슷’도 아니었다.
분명히 한국어로 ‘지미 X발’이다.
“…….”
금발 벽안 중년 외국인이 구사하는, 나보다 찰진 네이티브 X발을 듣고 있노라면. 아까부터 약간 인지 부조화가 오는 느낌이다.
생각보다 많이 어질어질하네, 이거.
“…미안. 정말 미안해. 로즈……!”
이내 애덤 크로스는 제 혼자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철그럭! 놈이 들고 있던 권총이 바닥에 떨어진다. 그를 쫓듯 애덤 크로스 본인도, 금세 바닥에 무릎부터 엎어졌다.
“내 탓이야. 이것도. 모두, 전부 나 때문에……!”
자학과 후회로 찌든 넋두리를 염불처럼 중얼거린다.
일견 미친 사람처럼도 보일 정도다.
“대체 어쩌다, 우리가 이런 꼴이… 크윽.”
마지막 그 말에는 나도 동감이었다.
대체 어쩌다 이런 꼴이 연출되었지. 부푼 꿈을 안고 해운대에 올 때만 해도, 절대 이럴 계획이 아니었는데.
나와 크로스 박사는, 대체 어쩌다.
이런 꼬라지로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되었는가.
‘…복잡하구만.’
절대 한두 마디로 정리가 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
상념이 뭉게뭉게 뇌리 한편을 채워갔다. 이 꼴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 * *
헌터 협회에서는 심야가 되어서야 귀가했다.
불가피하게 카일 인더스트리 연구원의 조사는 내일로 미루어졌다.
‘괜찮겠지?’
첫 게이트 붕괴는 11월 28일 저녁쯤부터 11월 29일 오후 3시 이전까지. 그 사이의 언젠가에 일어난다.
내가 해운대에 가 있는 사이 붕괴가 일어날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러면.’
진짜 그렇게 되면, 헌터 협회가 열심히 일해주길 기대하는 수밖에.
웬만하면 다음 날인 11월 29일에 일어나니. 이번만큼은 신에게 빌어봐야겠다.
그렇게 하릴없이 잠든 뒤. 다음 날이 밝았다.
“…저기, 오빠?”
한창 이브와 함께 부산으로 직행할 채비를 하던 와중.
어김없이 전생들과 같은 시간에 수아가 찾아왔고. 바쁘게 움직이던 나를 수아가 불러 세웠다.
나와 이브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어. 왜.”
나는 분주하게 준비하면서도 꼬박꼬박 대답해 줬다.
수아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이어졌다.
“혹시, 어디 여행이라도 가세요?”
“어. 좀.”
“…그래요? 되게 갑작스럽네. 어디 가시는데요?”
“해운대.”
“와! 해운대. 왜요?”
“좀 일이 생겼다.”
“헤. 일이요……?”
스르륵.
옅은 탄성과 함께 수아의 시선이 이동했다.
이내 여행용 가방을 기웃거리는 하얀 머리의 미소녀, 이브를 눈에 담는다.
“혹시, 이 애랑 같이 가나요?”
“그야…….”
즉각 긍정하려다 중단했다.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
뭐라 정확히 설명은 못하겠는데.
아무튼 지금 수아의 표정이,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였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새로운 표정을 수집했다는 기쁨도 잠시. 등줄기에 알싸한 긴장이 치달린다.
“음, 그.”
나는 약간의 침묵 끝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수아가 한발 앞섰다.
“맞나보네요?”
“…어. 뭐. 그렇게 됐다.”
하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런 서늘한 반응이 당연했다.
지금 상황은 수아가 많이 혼란스러울 법하다.
‘이번 회차의 수아는… 이브를 생판 모르는 상태지.’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던 특이한 외모의 미소녀. 이브가 갑자기 우리 집에 늘어나서, 같이 살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전후 맥락도 없이. 저 멀리 부산의 해운대까지 여행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오해가 생기기 너무 좋은데. 이거.’
빨리 이브의 정체를 해명하지 않으면. 또 전생처럼 이상한 오해가 생길지 모른다.
그렇게 판단한 내가 황급히 입을 열려는 그 순간.
“잠시만요. 거기 가만히 있어 보세요?”
“……?”
이번에도 반 박자 빠른 수아에게 선수를 뺏겼다.
수아가 태연하게 휴대 전화를 들어 올리더니. 어딘가로 빠르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수아야?”
“…….”
수아는 내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깔끔하게 무시하고 그대로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침묵을 지켰다.
이내 상대방이 받았는지, 수아가 반가운 양 입을 열었다.
“아. 경찰서죠? 네, 다른 게 아니고.”
파박!
빛살처럼 움직여 수아의 핸드폰을 뺏었다.
삐리릭. 전화를 냉큼 끊어버렸다.
“컷.”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아는 허전해진 자기 손을 잠깐 쳐다보다가, 이내 당당하게 내게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빨리.”
“…신고 안 하겠다고 약속하면.”
“납치범을 보고 어떻게 그냥 지나쳐요? 빨리 주세요.”
“납치……?”
그럴 줄 알았다. 세기말 반인륜적 오해를 하고 있잖아.
이번엔 또 무슨 말로 그녀를 납득시켜야 하나. 몇 번째인지도 모를 고민을 이번 생에도 하고 있던 그 순간.
“아빠. 뭐 해? 엄마랑 또 싸워?”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이브가 귓가에 소곤거렸다.
순진하게 치켜뜬 눈으로 우릴 쳐다보는 이브. 나는 그 시선을 한동안 마주하다, 이내 깨달았다.
‘그래. 우선은…….’
확산 방지. 오해가 불어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
나는 이브의 팔뚝을 힘껏 붙잡았고. 그녀를 데리고 수아에게서 멀어졌다.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이브.”
“어, 응? 으응.”
이브는 어지간히 얼떨떨한 얼굴이다.
하지만 일단 아무런 저항 없이 내게 이끌려 왔다.
어느 정도 수아와 거리가 확보된 뒤. 나는 수아의 의심이 짙어지지 않도록, 요점만 짚어 신속하게 통보했다.
“이브. 거래를 하자.”
“응? 갑자기 무슨 거래?”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듣고 그대로 따라라. 그러면 딸기우유 다섯 개를 주지.”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외형이 성숙하게 변해도.
이브에게 먹히는 가장 거대한 교섭 카드는, 여전히 딸기우유였다.
“헥, 다섯 개… 진짜?!”
그 반항적이었던 사춘기 이브가, 딸기우유 소리가 나오자 단숨에 고분고분해진 것을 보라.
캐피탈리즘 호. 애덤 스미스 만만세다.
“짠돌이 아빠가 갑자기 웬일? 뭐 심각한 일이야?”
“그래. 진짜 진지하게 중요한 일이다.”
“무, 무슨 부탁인데?”
“한동안 수아 앞에서 날 아빠라고 부르지 마라. 그리고 수아를 엄마라고도 부르지 마.”
“…엥?”
“넌 지금부터 수아랑 완전히 처음 보는 사이인 거다. 우린… 그래. 대충 외국인 조카와 삼촌인 걸로 하자.”
“으으음?”
진지한 얼굴로 한 부탁치곤 뜬금없어서 그런가. 이브는 김샌다는 표정이었다.
이내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헛숨을 들이켰다.
“아빠가 부탁하니 들어는 주겠는데. 갑자기 왜 그러는데? 왜 내가 엄마를 모른 척해야 돼?”
“…좀 복잡하니까. 그건 묻지 말고.”
여기서 이브에 대한 토막 상식.
이브는 내가 죽었을 때. 시간이 되돌아온다는 현상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되돌아오는 것으로, 당연히 다른 사람들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건가?’
어쩌면 그녀에겐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이브 본인은 시간이 돌아와도 기억이 남아있다.
그것이 본인 기준의 정상이다. 그러니 비정상인 다른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되는 거다.
‘한 번, 설명하려다 포기했었지.’
내 부족한 어휘력으론 그 괴리를 메꿀 수가 없었다.
왜 기억이 사라지는데? 그 의문에 대답해 주기가 애매했다. ‘원래 그게 정상이다’ 같은 건, 원래 그렇지 않은 이브에겐 대답이 안 될 게 뻔하니까.
그래서 깔끔하게 포기해 버렸다.
“일단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줘.”
“흐응. 뭐, 알았어! 딸기우유 준다는데.”
우리는 빠르게 작당을 마치고 다시 수아의 앞에 섰다.
나는 이브를 향해 슬쩍 눈짓했고. 사인을 받은 이브는 쭈뼛쭈뼛 수아의 앞에 섰다.
그리고 씨익, 급조한 티가 역력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 안녕하세요? 엄므…가 아니라, 언니!”
이번 생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면. 이브는 나와 비슷한 과였다.
연기도 거짓말도 끔찍하게 못한다.
“어… 사, 삼촌한테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저, 사, 삼촌의 조카예요!”
“아. 예에.”
수아는 약간 알딸딸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전혀 믿는 기색은 아니다. 그것은 직후 수아의 행동이 여실히 보여줬다.
“저기, 이브… 씨?”
수아는 이브에게 어색한 존칭을 사용했다.
이브가 중고등학생 정도의 외형이라 그렇겠지. 수아 입장에선 당연한 반응이다.
그런데 그 데면데면한 광경이 어쩐지, 나에겐 끔찍한 괴리감으로 다가왔다.
“아, 아! 네네, 넷?”
그리고 이브는 수상할 정도로 화들짝 놀랐다.
수아는 그 반응에, 옳다구나 하는 표정이 되었다.
“혹시 방금요. 정용 오빠한테 협박당하고 왔나요? 그렇게 말하라고?”
“아… 네?”
“방금 둘이서 대화했잖아요. 오빠가 시켰죠? 자기 조카라고 하라 그래요? 맞죠?”
“아, 아아, 아닌데? 아닌데, 그런 거 아닌데에……?”
이브야 X발. 거기서 그런 ‘들켰다’ 싶은 반응을 해버리면 어떡하냐. 내 입장이 심히 곤란해지지 않겠냐.
실제로 협박은 안 했잖아. 최소한 그거라도 부정해 줘야지.
“…세상에.”
수아의 흔들리는 시선, 일그러진 표정이 내게 꽂혔다.
반쯤 농담이었던 가정들이 점점 실체를 가져간다. 이제 좀 진심으로 불안해진 것이다.
“오, 오빠. 저 지금,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거든요?”
수아가 후다닥, 도망치듯 현관으로 달려갔고. 거칠게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그녀는 집을 나가기 직전. 흘깃 뒤를 돌아 나를 쳐다봤다.
“어… 시, 신고도 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일단 생각 정리할 시간을 주세요.”
“수아야.”
“나중에! 뭔 변명을 하시든지. 나, 나중에 들을게요. 오빠.”
“…….”
털컹.
문이 닫히고, 수아는 그렇게 허겁지겁 돌아갔다.
한동안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못 박혔다. 닭 쫓던 개새끼 마냥, 수아가 사라진 현관문을 우두커니 주시했다.
“허.”
일련의 전개를 머릿속으로 한 번 리플레이해 봤다.
나오는 것은 한숨과 헛웃음뿐이었다.
‘애가 좀 커졌다고. 이렇게까지 반응이 차이나나?’
전생과 딱히 다를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훌쩍 커버린 이브의 외견. 그리고 바쁘게 외출 채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어느 부분에서 반응이 갈린 거지.’
이번 생의 수아는 곧장 나를 의심부터 했다.
반쯤 장난으로 시작했다곤 하지만. 꽤나 극단적인 가정이 곧바로 튀어나와 버렸다.
‘애초에 납치범 의심은, 어린애였던 전생에 더 어울리는 거 아닌가?’
다시 한번. 전생의 초반부를 찬찬히 복기해봤다.
그러자 빛살처럼 뇌리를 스치는 가정 하나.
‘설마.’
그렇군. 수아와 이브의 만남 부분이 달랐다.
그때는 이브의 ‘엄마’ 발언에 놀라서, 미처 납치까진 생각이 못 미친 건가.
가능성 있다. 꽤나 일리 있는 가설이다.
‘그러면. 오히려 이브를 통제시킨 게 실수였나?’
이론상으론 사리는 맞다.
하지만 표본이 하나씩밖에 없으니, 확실하진 않다.
“…어렵네. 이거.”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이런 자잘한 선택의 순간이 던전 마스터와의 전투보다도 힘들다.
선택에 따라 변화하는 수많은 결과들. 그걸 전부 나 혼자 감당해야 하니까.
“쓰으…….”
선택하는 것 자체도 힘들고.
거기서 반드시 발생하는 후회 역시, 무겁다.
쉽지 않다. 회귀자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