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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15화 (115/235)

115화

<100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4)>

그리하여 이브는 내 번개에 무참히 지져져, 인간 모양의 시커먼 숯덩이가 되었을까?

유감.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알림: 스킬 사용 불가]

[해당 대상은 모든 스킬에 면역 상태입니다. 스킬 효과를 일체 무시합니다.]

역시나 이변은 없다.

이브는 어김없이 모든 스킬에 면역 상태.

전신을 휘감았던 세찬 번개 줄기는, 하얀 살결에 닿는 족족 시퍼런 마력 덩어리로 허물어질 뿐이다.

“흐아… 뭐, 뭐야?!”

다만 육체적으론 멀쩡했지만. 정신적으로는 그렇지 않아 보였다.

“까, 깜짝이야! 뭐냐고, 갑자기!!”

이브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고.

이내 쌍심지를 확 치켜세우며, 내게 도도도 달려들었다.

“아빠앗! 갑자기 뭐 하는 거얏!”

“…아.”

“진짜 엄청 깜짝 놀랐잖아!! 심장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구!”

퍽퍽. 이브가 투정 부리듯 내 가슴팍을 때려댄다.

그러고 보니 당사자인 이브한테 사전에 고지를 안 해줬군. 이건 놀랄 만도 했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하다. 내가 좀 급했네.”

“쫌! 조심 좀 해줘!”

“그래. 앞으론 주의한다.”

“흥.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는 거야. 알겠지?”

“그래. 고맙다. 이브.”

이브와의 소요 사태는 원만한 합의로 마무리됐다.

다행이다. 전처럼 또 토라져 버리면, 생각만 해도 벌써 골치가 빠개지니까. 앞으론 이브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으… 으, 응?”

번쩍거리는 섬광 세례가 완전히 사라진 뒤.

책상 밑에 엎드린 채 눈을 깜빡이던 오원태가, 마침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 어엉?”

그리고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이브를 눈에 담고. 얼빠진 탄성만 연신 흘려댔다.

그가 퍼뜩 나를 쳐다봤다. 나는 뭘 보냐는 듯이 오른손을 까딱거렸다.

“이래도 이브가 평범한 외국인 같냐. 아일랜드랬나?”

“그, 그… 그건.”

“속임수 같냐. 정 못 믿겠으면, 직접 맞아 볼 기회도 주지.”

파지지직!

아까와 똑같은 출력. 똑같은 크기로 번개의 나선을 그러모았다.

오원태는 화들짝 놀라며 내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양손을 들어 빠르게 손사래를 쳤다.

“돼, 됐습니다! 이미 충분히 알았습니다! 믿는다고요!”

“좋은 대답이야.”

푸쉭. 손 위에서 세차게 몰아치던 번개가 일순간에 흩어졌다.

그제야 오원태는 안심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직후. 놈은 나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보기 시작헀다.

그리고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온다.

“다, 당신.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직전과는 180도 다른 태도.

아까는 경멸과 무시가 주된 감정이었다면, 지금은 짙은 두려움이 가장 먼저 느껴졌다.

절로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어렸다.

‘조교 완료.’

이브를 위협하는 퍼포먼스를 보인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내가 직접 밝힌 대로, 이브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내 힘을 눈앞에서 보여주는 것으로, 오원태에게 공포를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함부로 깝치지 마라. 반항하지도 마라.’

‘너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릴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대충 이런 의미가 내포된 행동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이제야 좀 원만하게 대화할 만한 상태가 되었다. 나는 훌륭하게 조교된 오원태에게 본론을 꺼냈다.

“내가 원하는 건 간단하다, 오원태.”

턱턱.

팔짱을 끼고 토라져 있던 이브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리고 아까 그랬듯이, 스륵. 다시금 그녀를 오원태의 앞쪽으로 들이밀었다.

“이 애의 신체를 조사해 주는 것. 그것뿐이야.”

“조, 조사……? 그 애… 아니. 그, 그 암컷 던전 생물을 말인가요?”

“그래. 네가 평소에 일하던 것처럼. 이 애를 검사하고 연구해 주면 된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 나와서 그런가.

오원태는 약간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퍼뜩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 아니. 정부 허가도 안 받은 던전 생물을, 그것도 인간형 지성체를 밀반입한 것도 모자라! 그걸 사적으로 조사까지 하란 소리냐, 지금……?!”

“잘 알아들었네. 그거다.”

“그, 그건 중범죄 중의 중범죄잖아! 테러 모의급이라고!!”

“나도 알아.”

“혀, 혀, 협회 상부에 걸리면 그냥 모가지로 안 끝나, 이 사람아! 당신이나 나나! 최소가 철창살이 20년이라고, 20년!”

“안다고 했다. 자꾸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자꾸 귀찮게 땍땍대길래 약간 살기를 머금어 뇌까렸다.

흠칫. 오원태가 벼락이라도 맞은 양 온몸을 굳히더니, 이내 구운 오징어처럼 바싹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위축된 상황에서도 꿍얼대길 멈추진 않는다.

“그, 그걸 안다는 사람이, 무슨 터무니없는 소릴……!”

“가타부타 잔말하지 마라. 내가 물어본 건 그게 아니잖아.”

“윽…….”

“할 거냐. 말 거냐.”

파지직!

손가락을 까딱이자 시퍼런 스파크가 지글거렸다.

꿀꺽. 오원태는 그것을 목격하고 마른 침을 어렵사리 삼켰다.

“거절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냐.”

“자유롭게 상상해 봐라.”

“…….”

박사쯤 되는 양반이니 문맥 파악이 어렵진 않을 테다.

힌트는 많이 줬다. 지금도 내 손가락에 세찬 전류가 흐르고 있으니, 말이 더 필요한가.

결국 오원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그래. 알겠다. 워, 원하는 대로… 해준다. 해준다고. 됐냐!”

“좋아. 생각 잘했다, 오원태.”

“이 X발… 대체, 뭐냐고. 안 그래도 요즘 되는 것도 없는데! 이런 X같은 인생 같으니. 이건 또 대낮부터 뭔 난데없이, X발……!”

오원태가 억울해 죽겠다는 양 연신 꿍얼거렸다.

자기 기구한 팔자가 어지간히도 원망스러운 기색. 나는 발광하는 오원태를 한동안 가만히 응시했다.

지금껏 채찍질을 오지게 가했으니. 이제 당근을 좀 줄 때도 됐지.

“너무 그렇게 낙담하지 마라. 오원태.”

나는 미미하게 웃음을 머금는 한편. 오원태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기 시작했다.

오원태는 접근하는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갑자기……! 오, 오지 마!”

내가 다가가는 만큼, 그가 황급히 후퇴해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가속했다.

팔연적으로 우리의 거리는 점점 좁혀져 갔다.

“던전에 대해 알고 싶지 않냐. 오원태.”

“뭣?”

“협회는 연구부의 연구에 사사건건 훼방만 놓지. 적법한 루트로 반입한 던전 생물도 구실을 붙여 압류해 가고. 연구부가 마땅히 받아야 할 정부 지원금도 이리저리 빼돌려서, 무식한 헌터 새끼들 배나 채워주고 있다. 틀리냐.”

“……!!”

오원태가 내 말에 헉, 숨을 삼켰다.

땡그랗게 부푼 두 눈이 나를 쳐다봤고. 이내 혼란스러운 듯이 나를 삿대질했다.

“여, 연구부 소속도 아닌 놈이. 어떻게 그런 것까지……!”

어떻게는. X발아.

전생의 당신이 직접 내 앞에서 열변을 토했잖아.

그렇게 말할 순 없으니, 그냥 피식 웃어서 얼버무려 버렸다.

“그저 연구하고 싶을 뿐인데.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 그리고 네 오랜 염원을 위해서.”

그리고 나는 계속 말했다.

내가 절대 알 수 있을 리가 없는 것들을 언급하며. 그의 심리를 낱낱이 파고든다.

“협회는 그런 당연한 행위조차 허락해주지 않아. 무식한 새끼들한테 폭력으로 이래저래 휘둘리니, 어지간히도 답답하겠군. 그렇지?”

“그, 그… 그건.”

“그런 개족같은 협회가 만든 규칙이다. 왜 이 악물고 지키고 있는 거냐.”

오원태는 잠깐 온몸이 굳어버렸고. 나는 아직도 계속 걷는다.

그의 코앞까지, 앞으로 채 몇 보가 남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서 나를 도와라. 이브를… 저 애를 전력을 다해 조사해 봐.”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의 코앞에 우뚝 섰다.

당당하게 정면에서, 놈의 눈동자 그 안을 꿰뚫을 듯이 응시했다.

“저 애가 열쇠다.”

“…열쇠? 무, 무엇의.”

“던전에 관한 모든 것.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알게 해줄, 진실의 열쇠.”

“……!!”

오원태의 갈 곳 잃은 시선이 허공을 헤맨다.

잠깐의 방황 끝에, 다시 내게 돌아왔다.

떨리는 눈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진짜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여전히 내 입가엔 비틀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진위 여부는 알아서 판단해라.”

“아니. 뭐냐, 그게……!”

“다만, 어차피 네게 선택권은 없어.”

“…으, 으으.”

오원태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쥐어 싸맸다.

놈의 손가락 사이로 요동치는 눈동자. 그 눈부처엔 내 얼굴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한창 벼랑 끝에 몰려 있는데… 타, 타이밍 좋게 갑자기 찾아와서, 그런 제안을 해오다니. 이거, 뭐… 옛날얘기도 아니고.”

“…….”

“당신. 변장한 악마라도 되나? 괜히 손잡았다가, 어? 나중에 뭐, 영혼이라도 쪽 빨리는 거 아냐? 응?!”

장난 반, 진심 반이 섞인 공허한 말들.

반쯤 실성한 얼굴로 연신 중얼거리지만. 나를 향한 경계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피식, 쓴웃음을 머금었다.

‘뭐라 대답하면. 잘 대답했다고 소문이 나지.’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깨달았다.

내가 무슨 대답을 하든 오원태는 결국 내 제안을 거부할 수 없다.

그러니 아무 말이나 적당히 주워섬기면 된다.

“당신 협조에 따라 난 천사도 될 수 있고. 악마도 될 수 있습니다, 오원태 씨.”

수련회 조교 메타로 가자.

마침 다시 존댓말로 돌아올 타이밍이었지. 잘 됐다.

“하. 그러시겠지. 빌어먹을…….”

오원태는 비웃음을 흘리며, 다시 나와 안전거리를 벌릴 뿐이다.

나름 분위기 좀 풀어보겠다고 익살을 부린 건데. 자길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불쾌한 기색만 가득하다.

“씁.”

경계와 두려움이 잔뜩 도사린 오원태의 시선을 마주한 순간.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부터 들기 시작했다.

‘서윤이가 있었다면… 훨씬 원만한 방향으로 진행됐을 텐데.’

전생의 나와 오원태가 실제로 그랬듯이.

이번에도 강서윤이라는 징검다리가 있었다면. 분명 오원태가 나한테 저렇게까지 적의를 드러낼 일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쓸데없는 생각이지.’

어쩌겠는가.

이번 생에 강서윤의 도움은 바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이미, 이런 방법밖에 모르는 놈이 되어버렸다.

“…일단 당부해 두겠는데. 이 일은 절대로 다른 곳에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의해 주십시오. 오원태 씨. 당신 목숨도 위험해질지 모르니까.”

“말이라고. 나도 그 정돈 압니다, 당연히.”

어쨌든, 일은 이미 벌여놨다. 돌이킬 도리가 없다.

나는 약간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왔고. 오원태에게 우선적으로 절대 함구의 약속을 받아놓았다.

그 뒤로 몇 가지 주의 사항만 전달한 뒤, 연락처를 교환하고 빠르게 퇴장 멘트를 날렸다.

“그럼. 준비가 되는대로 다시 날 불러주십쇼, 오원태 씨.”

꾸벅. 고개를 까딱여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이브를 대동한 채 연구실을 나가려 했다.

“자, 잠깐만!”

하지만 덥석, 누군가 소매를 붙잡아 나를 제지했다.

당연히 이브인가 싶어서 돌아봤더니, 웬걸. 붙잡은 건 오원태였다.

나는 놈을 빤히 쳐다봤다.

“뭡니까. 할 말이라도?”

“아니, 준비가 되면 부르라면서요. 저는 딱히 준비할 거리가 없는데요.”

“……?”

“거, 쇠뿔도 단김에 뺀다는데. 굳이 가지 말고 지금 당장 시작하시죠?”

무슨 말인지 순간 이해를 못 했다.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길 잠시. 일단 내가 이해한 대로 물어봤다.

“준비할 게 없다……? 설마, 지금 당장 이브를 검사해 볼 수 있다는 소립니까?”

“네. 안 될 건 또 뭡니까?”

이건 내 계산을 약간 엇나간 반응.

굳이 따지자면 좋은 방향으로 빗나갔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다.

나는 얼떨떨한 나머지 물었다.

“아니. 그, 장비. 장비나 소모품은 충분합니까?”

“장비야 연구실에 다 있죠. 애초에 던전 생물 조사하라고 있는 연구 시설인데요. 기본적인 검사 약품들도 앞으로 2주일 치는 거뜬합니다.”

“…허.”

“아니. 애초에 왜, 당장은 안 된다고 단정하고 있었습니까?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서.”

“…….”

오히려 오원태가 의문에 차서 물어온다.

그의 어리둥절한 시선과 마주한 순간.

“…아아.”

아차 싶다. 뒤늦게 아찔해져 눈을 질끈 감았다.

그제야 전말을 깨달은 것이다.

‘속았던 거였나.’

전생의 오원태는 나와 강서윤을 속였다.

사실 당장이라도 이브의 신체 조사가 가능하면서. 장비 부족으로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놈은 모종의 이유로 시간을 벌기 위해, 나한테 거짓말을 한 것이다.

‘혹시. 어쩌면…….’

퍼뜩, 전생의 양호성이 떠오른다.

놈이 양동 작전으로 수아네 집을 습격할 때. 수아에게 씌워졌던 누명은… 던전 생물 밀반입.

그래. 분명 그랬었다.

‘…던전 생물.’

내가 가진 던전 생물.

하나 있지. 왜 없겠냐. 지금도 바로 옆에 있는데.

종말의 이브다.

‘이건. 설마.’

이브의 존재를 알았던 오원태의 거짓말.

그리고 수아에게 씌워졌던 던전 생물 밀반입 누명.

이 둘은, 우연의 일치였나?

“…좋습니다. 시작하시죠. 당장.”

나는 오원태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시선을 한껏 날카롭게 벼렸다.

시선 끝에는 오원태의 뒤통수가 있었다.

‘계속 주시한다. 밀고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전생에 오원태에게도 말했지.

나는, 배신자에겐, 죽었다 살아나서라도 복수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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