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42)>
“흐, 흥. 너무 뻔하지 않아? 아저씨.”
에티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양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눈동자는 연신 뒤룩뒤룩. 불안한 궤적을 그리며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그런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미리해서, 나를 괜히 신경 쓰게 만들려는 거잖아? 나도 그 정도 심리전은 알아, 아저씨!”
“마음대로 생각해라.”
“흐흥~! 허세 부리긴! 속내는 다 간파했다 이거야! 절대 속지 않는다구!”
“지금 네 반응만 봐도, 이미 내 작전은 충분히 먹힌 것 같다만.”
“으윽……!”
에티가 입을 꽉 다물었다.
나한테 반응해 줘봐야 손해라는 걸 눈치챈 것인가. 아예 말도 섞지 않기로 결심한 듯하다.
스르륵. 그녀가 조용히 주먹을 들어 올렸다.
“됐고. 바로 가자고! 손이나 내밀어!”
“나야 좋지.”
“가위, 바위… 보!”
그렇게 펼쳐진 우리의 네 번째 가위바위보.
과연 그녀는 내 말을 믿고 주먹을 뻗었을까? 아니면 의심한 나머지 가위나 보를 냈을까?
정답은.
후자다.
“…어.”
드러난 결과에 에티가 얼빠진 탄성을 흘렸다.
그녀가 내민 것은 보. 그리고 나는… 내가 선언했던 대로. 진짜 가위를 냈다.
나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가위를 까딱거렸다.
“이겼네.”
4차전은 나의 승리.
이로써 2 대 1. 매치포인트.
시종일관 가위만 냈는데, 내가 앞서나가는 결과가 되었다.
“말했잖아. 가위만 낸다니까.”
나는 에티를 쳐다봤다.
그녀는 주먹을 쥔 자기 손을 지금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다음 판 하자 아저씨. 빨리.”
이내 에티는 홀린 듯이 나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피식. 옅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몬티홀 딜레마라는 게 있다.”
나는 별안간 그런 말을 했다.
퍼뜩, 에티가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끊었던 말을 계속했다.
“네 앞에 세 가지의 선택지가 있다. 그중에 숨어있는 당첨을 맞추기 위해, 하나를 네가 골랐다.”
“응? 어… 응.”
“그런데 네가 고르지 않은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가, 꽝이라는 걸 내 쪽에서 밝혀버렸다.”
에티는 별안간 이상한 소리를 하는 나를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하지만 특유의 애새끼 같은 호기심 때문인가. 금세 내 얘기에 몰입해서 경청했다.
“그렇게 두 가지 선택지가 남은 상황에, 네게 선택을 바꿀 기회를 줬다. 너는 선택을 바꿀 거냐?”
“음… 아니? 안 바꿀 거 같은데.”
에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답을 들은 나는 눈썹을 틀어 올렸다.
“왜 안 바꾸냐,”
“그야… 어차피 셋 중 하나가 당첨이었던 거고. 내가 처음에 골랐던 게 당첨될 확률은 그대로인 거 아니야?”
“틀렸다. 바꾸는 게 이득이다.”
“엥? 뭔 소리야! 이러나저러나 똑같은 거잖아?”
“네 생각엔 그럴지 몰라도, 확률적으론 바꾸는 게 맞다.”
“흐응……?”
시큰둥했던 에티도 그쯤 되니 흥미가 동한 듯하다.
호기심 어린 시선이 내게 쏟아졌지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깊게 설명해 줄 생각은 없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가위, 바위, 보라는 세 선택지 중에서… 내가 선택지 하나를 지워버렸다는 거지.”
다시 가위바위보 얘기로 돌아가자 흠칫. 에티가 몸을 굳혔다.
나는 위축된 그녀를 빤히 주시했다.
“나는. 이번에도 가위를 낼 거다.”
이번에는 아예 가위 모양을 만든 채 대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재차, 같은 질문을 했다.
“던전 마스터. 네가 지금 하려는 선택을 바꿀 거냐?”
에티는 내가 내민 가위를 말없이 쳐다봤다.
이내 스르륵. 그녀가 내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아저씨. 가위바위보나 하자고. 이상한 말로… 헷갈리게 하지 말고.”
에티의 말투는 눈에 띄게 딱딱해졌다.
혼란과 당혹스러움. 그리고 약간의 분노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전생보다 혓바닥이 좀 길었더니 곧장 화를 내는군.
“그래. 난 준비됐다.”
잡설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슬슬 이 지리멸렬한 가위바위보 놀이를 끝낼 때가 됐다.
이번엔 내 쪽에서 선창을 했다.
“가위. 바위…….”
“보!”
그렇게 수천 명의 목숨을 건 마지막 가위바위보가 벌어졌다.
나와 에티의 시선이 교차한다. 서로의 손 모양을 빠르게 훑어 내린다.
이내, 승자와 패자의 희비가 교차한다.
“으아아! 마, 말도 안 돼!!”
에티의 아찔한 탄성이 광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에티는 가위를 냈고. 나는 주먹을 냈다.
“3 대 1. 1세트는 내가 이겼다.”
나는 얌전히 손을 물리며 담담하게 선고했다.
당연히 이길 것을 이긴 것뿐이다. 기뻐할 여지는 전혀 없고, 오히려 몇 번이나 봤던 전개에 지루함을 느끼는 나였다.
“뭐야… 뭔데, 뭐야!!”
쾅쾅쾅!
에티가 연신 테이블을 내려친다.
“진짜 뭐냐고! 진짜!!”
분해서 참을 수 없다는 기색. 그야말로 게임에서 져버린 어린애 같은 행색이다.
이내 그녀의 노기 어린 시선이 내게 향했다.
“뭐야. 아저씨, 진짜 뭐야? 진짜 독심술사였어?”
“그래.”
“내 생각을… 전부 읽었다고? 정말로?”
“그래.”
“그, 근데! 한 판은 왜 져줬어?!”
“거짓말이니까.”
거기서 멈칫. 에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린 채 내 말을 곱씹었다.
“거짓말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독심술사라는 게 거짓말이라는 소리다.”
“에엥?!”
“하지만 마음을 읽었던 건 진짜다.”
“뭐라는 거야! 앞뒤가 안 맞잖아!”
“네 심리를 읽었다는 소리다. 마지막 두 판은, 그냥 네가 심리전에서 진 거다.”
“윽……!”
이번에야말로 에티가 내 말을 믿고 주먹을 내겠지. 그렇게 생각한 내가, 통수를 쳐서 보를 낸다.
그 경우까지 생각한 에티는 한 번 더 꼬아서 가위를 냈다.
“가위는 내가 말을 안 바꿔도 최소한 비길 수 있지. 그래서 넌 가위를 골랐다. 맞지?”
“으윽……!”
못 이겨도 최소한 비기는 결과.
심리적인 안정감이 남다르다. 그러니 무심결에 이 선택을 지지하게 된다.
그리고 난… 아니. 전생의 내가 거기까지 미리 읽고, 바위를 냈다.
“그, 그럴… 수가.”
에티는 한동안 망연자실하게 테이블만 쳐다봤다.
나는 독심술사가 아니었다. 그냥 내 손에 놀아난 에티 본인의 참패다. 그것이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미안하지만 실의에 빠져있을 시간도 없다.
“빨리 정산할 거 정산하고. 다음 게임으로 넘어가지.”
나는 손가락을 튕겨 주목을 모았고, 에티를 향해 재촉했다.
에티는 그제야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응. 정산. 응… 그래야지.”
에티가 잔뜩 풀 죽은 얼굴로 꿍얼거린다.
스슥. 그녀의 손날이 위로 번쩍 올라갔다가, 단숨에 내려친다.
퍼벅! 퍼버버벅! 밀가루 반죽을 찧는 듯. 둔중한 소음이 광장 전역에서 울렸다.
“으아! 으아아아악!!”
“꺄아아아악!!”
“머, 머리가, 사, 사, 사람이, 머리가아아!!”
수천 명의 관중들 머리통이 터져나가는 소리였다.
반절이 넘는 인원이 그대로 머리가 터져 사망했다. 하얀 벽. 풀색의 바닥. 무엇하나 할 것 없이, 피로 새빨갛게 칠해졌다.
“으음. 첫 번째 판은, 내가 졌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에티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삐이익. 아수라장이 된 광장을 울리는 긴 경고음. 동시에 전광판의 문자열이 어지럽게 늘어진다.
[게임 스코어 현황판]
[플레이어 VS 나]
[1 : 0]
우선은 세트 스코어의 변동.
플레이어, 즉 내 쪽에 1점이 추가되었고.
[이번 베팅에서 사망한 관객 수: 5,271명]
[이번 베팅에서 생존한 관객 수: 4,667명]
생존자와 사망자 신고가 그 뒤를 잇는다.
약 5천2백 명이 사망. 4천6백 명 가량이 내게 걸어서 살아남았다.
‘전부터 항상 궁금했는데…….’
나한테 건 놈들은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목숨을 건 걸까.
내가 이 게임에서 이길 거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데.
‘레드 저거너트 행세라도 했으면 모르겠군.’
잠깐. 그러고 보니.
이거 시작부터 내가 혈천갑을 입고 에티를 상대했으면. 나한테 베팅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지 않았을까?
‘이런 걸 지금 와서 생각하면 뭐 하냐. 한정용.’
일단 이번 생에는 확실히 늦었다.
이제 와서 변신한다고 이브랑 실랑이를 벌인다? 그 시간에 밖에서 장난감 병정들이 수천, 수만 명을 더 죽인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수도 있다.
‘시도해 볼 가치는 있을 듯한데.’
이번 생에도 내가 실패하면. 그리고 다음 생의 언젠가, 다시 이 던전이 등장하면. 그때는 시도해 봐야겠다.
당연히 이번 생에 끝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디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던가.
“저기, 아저씨. 1세트 내가 졌으니까, 게임 내가 고른다?”
문득 에티의 심통 난 목소리가 내 상념을 부순다.
나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음대로 골라라.”
“흐음. 자신만만한데? 한 번 이겼다고 기고만장한 거야?”
“딱히. 무슨 게임이든 최선을 다할 뿐이다.”
“후후. 좋아! 그러면… 이거!”
에티가 의기양양하게 테이블 아래를 만지작거리나 싶더니.
번쩍! 이내 무언가를 불쑥 꺼냈다.
“이거 좀 재밌더라? 이런 걸 뭐라 그랬더라……? 보드게임? 맞지?”
털그럭.
테이블에 깔린 것은 황색의 나무판과, 팔각형의 크고 작은 하얀 기물들.
장기(將棋)용 물품들이었다.
‘그래. 그렇겠지.’
지겨운 마음에 속으로 진절머리를 쳤다.
에티가 제안하는 게임 내용은 고정이다. 내가 짠 시나리오대로 3대 떡이 나오려면, 앞으로도 게임은 에티가 계속 제안하겠지.
그러면 나올 게임도 전생과 완벽히 일치하게 된다.
‘얘랑 장기만 몇 번째 두는 거냐.’
정확히는 모르겠다.
적어도 20번은 둬봤지 싶다. 이 던전은 출현율이 높은 편이라 전생마다 자주 나오니까.
붕괴의 순번에 관계없이 난이도가 일정한 게, 에티 같은 기믹 보스형 던전의 특징.
그래서 12차 이후의 붕괴 때 나와주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아저씨. 이거 해봤어?”
“소싯적에 조금.”
“흐응? 잘해?”
“그럭저럭 한다.”
“오올. 내가 오늘 처음 배웠다고 무시하면 큰코다칠걸? 과연 나보다 잘할 수 있을까?”
“이제부터 알게 되겠지.”
“아아, 이 아저씨. 아까부터 반응이 너무 재미없네!”
에티는 내가 제대로 호응해 주지 않자 툴툴거렸다.
그녀가 삐진 듯이 고개를 팩 돌리더니. 이내 손뼉을 짝짝, 가볍게 쳤다.
“좋다 이거야. 게임이나 바로 하자, 그래!”
삐빅.
다시 한번. 나와 관중들 앞에 일제히 패널이 떠올랐다. 베팅 패널이다.
비명을 지르고, 살려달라 울고 불던 모두가 행동을 멈췄다. 일대에 쥐 죽은 듯한 적막이 잠깐 흘렀다.
[남은 시간: 1분]
[남은 시간: 0분, 59초]
[남은 시간: 0분, 58초]
…….
…….
어쨌든 시간은 흘러간다.
모두들 절망에 찬 표정으로 눈알만 뒤룩거린다.
“…으윽!”
“씨, X발!!”
그들이 나와 에티를 빠르게 번갈아 보다, 이내 패널 어딘가를 힘껏 눌렀다.
그리고 삐―익. 1분이 지난다.
[베팅 결과]
결과가 전광판에 등장했다.
나와 에티가 동시에 고개를 위로 꺾었다.
[생존한 관객 수: 4,667명]
[투표한 관객 수: 4,381명]
[플레이어의 득표수: 1,465명]
[나의 득표수: 2,916명]
1세트 때 에티가 지는 걸 보고도 에티에게 거는 놈들이 더 많았다.
…내가 그렇게 장기를 못 하게 생겼나.
‘정신 못 차렸네. 정배충 새끼들.’
전생엔 저 정도로 차이 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이건 또 무슨 원인으로 차이가 난 거지.
옆에서 같이 보던 에티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음, 투표율 좋네! 이번엔 거의 다했잖아?”
그 말대로였다.
다만 무효표는 어김없이 존재했다. 약 2백~3백 명 정도.
이번엔 모르고 안 눌렀거나, 고민하다 깜빡 못 눌렀을 리가 없다. 그런 사람들의 말로를 직접 본 사람들이니까.
그러니까 지금 나온 무효표는… 명백한 자기 의지로 안 누른 자들.
다시 말해, 자살 희망자들이다.
“일단 기권들은 전부 아웃시키고……?”
에티가 생글거리며 손날을 휘적거렸다.
퍼걱, 퍼버벅! 인파의 숲속에서 산발적으로 머리통이 연쇄 폭발 한다.
사방에서 새빨간 불꽃놀이가 벌어졌다.
“……!!”
“으, 우… 흐흑……!”
이젠 비명 지르기도 지친 건가, 아니면 익숙해진 건가.
관중들은 비교적 조용하다. 아까처럼 대혼란은 일어나지 않았고. 대신 숨죽여 울며 절박한 눈초리를 이쪽으로 보내온다.
“자. 그럼…….”
에티가 장기판 위로 손을 휘젓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아귀에 푸른 빛무리가 어른거린다.
그녀가 슬쩍, 나를 흘겨본다.
“아저씨. 배치는 어떻게?”
“마상상마. 안상차림으로.”
“으음. 역시 그게 제일 안정감이 있지? 나도 그걸로 할래!”
쉬리릭!
장기말들이 일제히 푸른 빛무리에 감싸여 허공을 날았고. 속속들이 장기판 위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게임 세팅이 단 3초 만에 끝났다.
“2세트. 준비해 볼까? 아저씨.”
2세트.
한국식 장기.
이세계 몬스터와의 기묘한 장기 대국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