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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57화 (57/235)
  • 57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43)>

    장기 둘 준비를 모두 마친 직후.

    문득 에티가 확성기를 붙잡고 입가에 갖다 댔다.

    [흐음, 모두 주목해 봐!]

    끼이익―!

    확성기의 찢어지는 노이즈. 에티는 그것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두려움에 떠는 관중들을 향해 말했다.

    [있잖아, 우리끼리만 장기 두면 재미가 없잖아? 그치? 게임 상황도 잘 안 보이고!]

    당연히 대답은 전혀 없었다.

    또 무슨 개 같은 소리를 하려고 그러냐. 그냥 빨리 죽이든 살리든 X대로 해라. 그런 자포자기의 시선만이 따갑게 느껴진다.

    물론 에티는 곱창 난 분위기 따윈 안중에도 없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인간 기물 지원자를 받겠어!!]

    신난 어조로 지껄이는 에티.

    인간 기물. 모두가 그 의미를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겪어봤던 나만 빼고.

    나는 신나서 어깨를 들썩이는 에티를 쳐다봤고. 이내 툭 내뱉었다.

    “이번에도 하는 건가? 인간 장기.”

    “…응? 아저씨. 이번에도…라니?”

    에티가 의혹에 찬 시선으로 날 보기 시작했다.

    실수다. 나는 재빨리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 아니다. 말이 잘못 나왔다. 하던 거 마저 해라.”

    “흐응. 이상한 아저씨야, 아무튼!”

    에티가 나를 향해 콧방귀를 뀌었고. 직후 쫙 펴든 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촤자작! 우리의 머리 위로 거대하고 투명한 유리판이 드리웠다. 거기에 하얀 실선들이 그어져, 장기판과 똑같은 모양을 그려낸다.

    히죽. 에티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봐! 저 유리판 보이지? 저 위에서, 선발된 사람들이 우리의 장기를 재현할 거야!]

    지금부터 벌어질 것은, 인간 장기.

    문자 그대로의 의미다.

    [자기가 직접 장기 기물이 돼보고 싶은 사람! 손 번쩍번쩍 들어봐!]

    각 기물별로 사람을 뽑아서, 저 거대한 유리 장기판 위에 세우고. 우리가 기물을 움직일 때마다 뽑힌 사람도 똑같이 움직인다.

    그리고 기물이 죽으면. 그 사람도 죽는다.

    “이, 이게 뭐야.”

    “미쳤어?! 그, 그딴 걸 제정신으로 할 리가 없잖아……!”

    관중들이 전에 없이 술렁거린다. 혼란과 분노에 찬 시선이 에티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직후. 에티가 한마디를 추가한다.

    [으응. 물론 나도 알아. 그냥 시키면 지원자가 아무도 없겠지?]

    마치 처음부터 이런 반응을 예상한 듯이. 에티는 어깨를 으쓱이며 실실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이렇게 하자. 본인이 지원한 기물이 게임 끝날 때까지 살아남으면 말이야. 그 사람은 바로 여기서 내보내 줄게!]

    그 한마디로 분위기가 격변했다.

    불만에 차있던 고성이 눈에 띄게 사그라들었고. 하나같이 눈을 부릅뜬 채 에티의 입술을 주목한다.

    에티는 그 반응을 즐기듯이, 히죽. 사특한 미소를 머금었다.

    [먼저 쫄병부터 뽑아볼까? 초나라 졸. 할 사람?]

    번쩍.

    번쩍번쩍.

    사방에서 너도나도 손을 들기 시작한다.

    “저, 저요! 저요!!”

    “나! 나 시켜주세요! 제발!!”

    “저! 저 군필입니다!! 졸병연기 존나 잘할 자신 있습니다!!!”

    그렇게 사상 초유의, 인간 장기 기물 선발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에티는 신나서 사람들을 뽑기 시작했다.

    [아하하! 좋아 좋아! 참여율 끝내주는데?!]

    차(車), 상(象), 마(馬), 포(砲), 사(士)를 한나라와 초나라 각기 두 명씩. 졸(卒)은 각기 5명씩. 그리고 한나라 왕과 초나라 왕을 한 명씩.

    수많은 지원자 중에서, 32명이 무작위로 선발되었다.

    “으아아아자!!”

    “뽑혔다! 뽑혔다고!! X발!”

    쉬쉭!

    에티가 텔레포트 스킬로 순식간에 사람들을 유리판 위로 날랐다.

    “여, 여기서만 살면. 제발, 살기만 하면……!”

    “나, 나갈 수 있어. 이 지옥에서, 나갈 수 있다고……!”

    각기 정해진 기물의 위치에 이동된 그들은, 하나같이 희망에 차있었다. 어쩌면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의 말들을 저마다 중얼거린다.

    이제 저 유리의 전장 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못한 채.

    “으응~. 왕 지원자가 너무 많았네. 뽑기 힘들었어!”

    작업을 마친 에티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대로 왕 지원자는 지나치게 많았다. 다른 기물들의 족히 10배는 되는 듯했다.

    ‘뭐… 그럴 수밖에.’

    단순하게 생각하면 왕의 생존확률은 반반이다.

    내가 이기면 한왕은 산다. 반대로 지면 초왕이 사는 거다.

    오더에 따라 언제 짐짝처럼 버려질지 모르는 일반 기물보단, 확실히 반반이라도 되는 편이 생존율이 높겠지.

    [거기, 장기말들! 우리가 지시하는 대로 안 움직이면, 절대로! 절대로 안 돼?]

    문득 에티가 확성기를 들고 유리판 위를 쳐다봤다.

    32명의 인간 기물들이 일제히 아래를 내려다보자, 에티가 입을 열었다.

    [만약에 그런 사람 있으면. 바로 교체해 버릴 거야! 알겠지!]

    에티는 ‘교체’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줘서 말했다.

    지금까지 행적이 행적이다. 아무도 ‘사람만 바꾼다’라는 뜻으론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제로 전생에서도 돌발 행동을 하는 기물들은, 가차 없이 죽어나갔다.

    “거, 걱정하지 마십쇼!”

    “절대 복종하겠습니다!”

    인간 기물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제야 에티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준비 완전 끝났고!”

    털썩.

    에티가 그제야 확성기를 팽개치고 테이블 앞에 착석했다.

    그녀는 한껏 들뜬 어조로 내게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아저씨. 선공은 누가?”

    “원래 국룰이 초나라가 먼저다. 너 먼저 해라.”

    “와! 고마워라. 그러면 사양 않고!”

    타악!

    에티가 첫수를 움직였다.

    가운데 졸병. 좌측으로 한 칸.

    전광판에 뜬 기물의 움직임에 따라, 거대 유리판에서 인간 기물도 움직였다.

    “여, 옆으로 한 칸……!”

    후다닥!

    유리판 중앙의 초나라 졸병이 열심히 왼쪽으로 달려나간다.

    유리판이 엄청나게 넓어서, 전력 질주임에도 시간이 꽤 걸렸다.

    “…….”

    “…….”

    탁. 타탁.

    한동안 긴장된 침묵 속에서, 빠르게 초반의 포진이 완성되어 간다.

    수천 명의 운명을 건 장기 대국이 서서히 무르익었다.

    “읏차.”

    탁.

    먼저 포진을 완성한 에티의 얄팍한 견제가 들어온다.

    거부하지 않겠다. 나는 진형을 파고들어 온 상대의 졸을, 마(馬)를 움직여 잡아버렸다.

    “자. 와라.”

    타각. 마가 졸과 겹친다.

    졸이 있던 자리에 내 마를 놓고. 죽여버린 졸을 손에 바꿔 들었다.

    휙. 주변에 대충 아무렇게나 버렸다. 어차피 잡힌 말은 다시 쓸 일이 절대 없으니까.

    “헤에. 이걸 들어와 준다고?”

    에티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히죽 웃는 한편.

    휘릭! 그녀의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이내 유리 장기판 위로 향했다.

    “뭐 해? 한나라 마.”

    에티는 재촉하듯이 인간 기물들을 쳐다본다.

    그리고 벙쪄있던 인간 기물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가. 빨리 가서, 죽여버려. 초나라 졸.”

    자신이 장기말이 된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

    “…으, 어……?”

    눈앞의 희망에 가려져 있던 섬뜩한 현실을… 이제야 정확히 직면했다.

    그때까지 멍하게 있던 문제의 한나라 마.

    “으, 아… 으아아……!”

    평범하게 생긴 20대 사내였는데. 그는 별안간 신음을 질질 흘리기 시작했다.

    이내 점점 날카로워지는 에티의 시선을 목격하고. 마침내 결연한 기색이 만면에 스쳤다.

    “으아아아아아!!!”

    장기말은 달린다.

    장기판을 종횡하여, 선과 선의 교차점을 넘고. 마침내, 초나라 졸병의 앞까지 당도한다.

    초나라 졸병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사, 살려줘… 제발……! 제발! 제발요! 지, 집에 애가, 3살짜리 애가 있어요……!!”

    그리고 무릎 꿇은 채 목숨을 구걸한다.

    처절한 간청이었다. 한나라 마의 표정도, 자연스레 처절하게 찌그러졌다.

    [저항하지 마.]

    에티의 서늘한 목소리가 광장을 울린다.

    거기엔, 심장을 죄어오는 듯한 강렬한 압박감이 심어져 있었다.

    나조차도 순간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하물며 일반인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봐. 졸이 죽었잖아. 한나라 기마병. 죽여. 얼른.]

    거부할 수 없다.

    거부하면 내가 죽는다.

    한나라의 기마병.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양손을 불쑥 뻗는다.

    꾸드득. 초나라 졸병의 목이 졸린다.

    “크. 컥, 꺼헉……!”

    초나라 졸개가 팔다리를 버둥거린다. 눈을 부릅뜨고 침을 질질 흘렸다.

    이내 추욱. 경련하던 몸이 움직임을 완전히 멈췄다.

    “…컥.”

    한나라 기마병이 초나라의 졸개를 죽였다.

    테이블 위의 장기판에서 그러했듯이.

    “으… 흑. 흐흐흑……!”

    한나라 마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서럽게 오열했다.

    이 시국에 인간성을 잃지 않았던 희귀한 사람이군. 미안하지만 감상에 젖을 시간은 거기까지다.

    타각! 후방에서 대기하던 에티의 상(象)이, 내 마를 집어삼켰다.

    “교전. 본격적으로 시작하자고. 후후.”

    마로 졸을 잡아먹는 판단.

    이건 에티가 파놓은 함정의 트리거다.

    내 쪽 전장이 유린당한다. 현재로선 딱히 대응할 수단이 없었다.

    “으, 으아! 아아아악! 살려, 살려줘!!!”

    유리판 위에선 비명이 울린다.

    방금까지 살인자였던 한나라 기마병이, 초나라 코끼리병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주, 죽어. 씨발! 죽어어어!!”

    코끼리병은 기마병에 비해 냉정한 사람이었다.

    퍼억, 퍽! 퍼벅!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기마병을 파운딩 한 채. 주먹질을 미친 듯이 가하고 있었다.

    기마병의 움직임이 완전히 멎을 때까지.

    ‘이제 시작이다.’

    인간 기물.

    특히 내 편의 인간 기물들에겐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

    내가 예언 하나 해준다. 너희는 왕을 제외하고, 웬만한 놈들은 다 죽을 예정이다.

    ‘간다.’

    타각!

    장기 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게임의 예정된 종말을 향해서.

    * * *

    탁. 타탁.

    광장의 넓이가 무색하도록 조용한 가운데. 장기말 놓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대국은 시종일관 일방적인 흐름으로 흘러갔다.

    “장군.”

    탁! 에티가 의기양양하게 말하며 기물을 놓는다.

    그러면 나는 장기판을 빤히 쳐다보다가, 가만히 왕을 피신시킨다.

    “멍군.”

    그러면 탁!

    다시 한번 에티의 파상공세가 시작된다.

    “장군!”

    그러면 스륵.

    나는 다시 기물을 움직여 공세를 막는다.

    “멍군.”

    계속 그것의 반복이었다.

    일견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일방적인 게임. 게임 내내 에티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히죽히죽. 에티는 아까부터 웃음꽃이 마르질 않았다.

    “흐흥. 슬슬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나?”

    “뭘 말이냐.”

    “이 게임 말이야. 아저씨 너무 불리해졌는데?”

    “…….”

    나는 장기판 위에 펼쳐진 형국을 읽었다.

    에티의 말대로였다. 전세는 내가 극도로 불리했다.

    “이길 구석이 있긴 해? 응?”

    나는 차(車)와 상(象), 마(馬)를 하나씩 먹힌 데다, 포(砲)는 두 개 다 먹혔다.

    반면 에티는 포와 상을 하나씩 먹히고, 졸(卒)을 두 개 먹힌 상황. 살아남은 기물의 밸류 차이가 심각하게 현격했다.

    내가 침묵에 잠겨있자, 에티는 전통과 근본의 티배깅을 시전했다.

    “으히히. 장기 두는 사람, 어디 갔나아?”

    기 살려주는 것도 이쯤 해야겠군.

    슬슬 내가 짜증이 솟아서 못 참겠다. 저년의 실실거리는 표정을 꼴 보기가 싫어졌다.

    이제 저 활짝 갠 표정을, 우장창 짓뭉개 줄 시간이다.

    “우후후. 아저씨, 뭐 해? 얼른 안 두고?”

    “수를 떠올리는 중이다.”

    “없는 수를 떠올린다고 돌파구가 생기기나 할까?”

    “정말 수가 없다고 생각하냐?”

    “…응?”

    내 표정은 시종일관 평온했다.

    수세에 몰린 사람치곤, 좀 지나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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