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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54화 (54/235)

54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40)>

그 많은 장난감 병정이 공격에 차출됐건만. 아직 성내에는 수많은 장난감 병정들이 도처에 즐비했다.

방비는 분명히 삼엄했다. 그러나 동시에 허술했다.

‘투명화 대처가 전혀 안 됐지. 전부터.’

성 내부의 수비 병력은 열 감지 센서나, 자외선 시야 같은 특수 기능이 없다.

덕분에 놈들은 속수무책으로 수비망을 뚫려야 했고. 나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비행을 계속했다.

결국 장난감 성의 심부까지 쉽사리 침투에 성공했다.

“히야아! 아빠아! 블록집이야, 블록집! 이뻐어!”

“그래. 그렇구나.”

“아빠! 나 이거 사조! 으응? 사주면 안대애?”

“안 돼.”

“어, 왜애?!”

“비매품이다.”

무식하게 일일이 병정들 다 때려 부수던 회차를 지나왔고. 민간인 희생을 좀 감수해서 빈집털이 하는 회차를 지나왔다.

그렇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의 정석 공략법을 터득한 내가 있었다.

“우와아! 여긴……?”

이브는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다.

나는 장난감 성의 주인, 여왕이 머무는 방에 도착해 있었다.

“헤에. 대따 넓다!”

치지직. 나는 둘러쳤던 은폐장을 풀었다.

이브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사방을 바쁘게 둘러봤다.

“우와, 아빠! 하늘이 반짝반짝해……!”

전체적으로 어두웠고. 축구장 몇 개를 합친 것처럼 거대하다.

벽은 순백색. 바닥은 풀색의 장방형 공간. 새카만 천장에선 야광 달과 별이 다닥다닥 붙어, 은은한 조명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광장의 중앙.

“…어라? 얼라리??”

작은 테이블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고.

그 앞에는 한 소녀가 앉아있었다.

“뭐야?? 내가 눈이 잘못됐나? 아닌데??”

소녀는 은폐장을 풀고 등장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리고 기가 막히다는 듯이, 연신 의문의 탄성을 흘렸다.

퍼뜩. 그녀의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다.

“어떻게 갑자기 뿅 하고 생겨났어?”

소녀는 티 없이 맑은 눈으로 의문을 표출했다.

“침입자 소식은 못 들었는데? 이 쓸모없는 장난감 놈들, 농땡이를 피웠나?!”

커다란 빵모자 아래. 풀빛의 덥수룩한 머리와 샛노란 눈동자.

순수와 광기가 동시에 느껴지는 시선. 그야말로 호기심 많은 어린이의 눈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현자의 눈을 발동했다.

[몬스터 정보]

[명칭: 심심한 에티]

[체력: ??? 마력: ???]

[힘: ??? 민첩: ??? 지능: ???]

[상세: 제41던전 ‘장난감 왕국’의 던전 마스터. 그녀의 무료함을 달래지 못하는 한, 장난감 왕국의 모든 백성은 끊임없이 여왕을 위해 춤춘다.]

온통 물음표투성이다.

현자의 눈이 오작동한 게 아니다. 저것이 눈앞의 장난감 성 여왕의 특징.

그녀는 무슨 수를 써도, 물리적인 전투로 쓰러뜨릴 수가 없다.

‘기믹 보스지. 말하자면.’

기믹 보스.

전투가 아닌 특정한 조건을 충족해야만 클리어할 수 있는 보스.

던전 마스터 에티의 경우, 그녀가 벌이는 각종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이 클리어의 조건.

지금부터 서로의 목숨을 걸고. 우리는 데스 게임을 하게 된다.

“저기. 내가 물어보잖아? 대답 안 해줄 거야? 왜 그렇게 쳐다보기만 해?”

내가 대답이 없자, 소녀는 볼을 빠방하게 부풀리며 투덜거렸다.

굳이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 소녀… 에티에게 가볍게 놀아나 주기로 했다.

“정문으로 당당하게 들어왔다.”

“응? 거짓말! 순 뻥치시네! 정문 쪽에 내 부하 장난감들이 얼마나 많은데!”

“투명화 한 다음. 날아서 들어왔다.”

“엇. 투, 투명화……? 그거 사기 아냐? 반칙이잖아?!”

스르륵.

나는 대화를 나누면서 미끄러지듯 날았고. 천천히 에티에게 다가갔다.

테이블 코앞까지 와서, 그녀의 맞은편 테이블에 착석할 때까지. 그녀는 내 행동에 아무런 경계도 가지지 않았다.

“투, 투명이라니. 으음. 그걸 전혀 생각을 안 하고 있었네……? 이 경우는 어떻게 해야지……?”

다만 혼자 중얼거리며 뭔가를 심각하게 고민할 뿐이다.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른다. 밖에서 사람들이 초당 수십 단위로 죽어나가겠지.

그녀의 결정에 좀 도움을 주기로 했다.

“나는 네 무료를 달래기 위해 왔다. 던전 마스터.”

에티의 행동이 순간 정지한다.

스르륵. 샛노란 눈동자가 미끄러져 나를 빤히 응시한다.

옅은 흥미가 어린 시선이다.

“흐흥. 아저씨, 신기하다. 아직 나는 뭘 할지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어?”

“글쎄. 어쨌든 웬만한 건 이미 다 알고 있다.”

“웬만한 거라니. 어디까지?”

“네가 밖에 풀어놓은 병사들이 이곳에 사람들을 모아올 거라는 것. 그중에 관객과 플레이어를 정한다는 것. 선택된 플레이어와 내기 게임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네가 죽거나… 관객과 플레이어를 죽여대는 것. 이 정도.”

“우와! 진짜 내 계획을 다 아는구나? 대단해!!”

벌떡!

에티가 상체를 일으키더니, 퍼뜩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순식간에 내 코앞까지 날아와 얼굴을 맞대었다.

흥미로 가득 찬 노란색 눈동자가, 코앞에서 번들거린다.

“아저씨. 아저씨는 독심술사?”

“비슷하다.”

“흐응~? 그럼!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게??”

“관객이 좀 차는 대로, 당장 나와 게임을 하고 싶어졌겠지.”

“아하하핫! 정답! 정답이야!!”

에티가 박수를 짤깍짤깍 쳐대며 박장대소한다.

그 모습에 이브가 슬쩍 위축된다.

“아빠아… 이 언니, 좀 이상해.”

내 바지를 꼭 붙잡고 한껏 내게 의지해 온다.

그러나 에티에겐 이브 따윈 안중에도 없다. 아예 본 체도 않고, 존재조차 무시당하고 있었다.

샛노란 시선은 오직 나한테 붙박여 있었다.

“아저씨 진짜 재밌네! 나랑 좀 있다 같이 놀아줄 거지? 응? 응응??”

“당연하다. 게임을 빨리 하려고 꼼수까지 써가며 온 거다.”

“하하핫! 그렇구나! 그러면 꼼수 써도 인정이지!”

“인정해 준다니 고맙네.”

“하아, 진짜 기대된다! 독심술사랑 게임하는 건 처음인데?!”

에티가 방정맞게 촐싹거리고. 나는 그 앞에서 묵묵히 그녀를 노려보던 찰나.

―여, 여왕님!

타타탓! 문득 광장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초록색 플라스틱 장난감 병정이다.

―헥, 헤엑……! 여, 여왕님. 전갈을……!

병정이 헐레벌떡 달려와, 에티의 귓가에 뭔가 속삭인다.

히죽. 가만히 듣던 에티의 만면에 미소가 어렸다.

“후후. 좋았어. 최소한의 관객이 준비됐대! 아저씨!”

“그러냐.”

“응! 바로 시작해도 돼?”

“빨리 시작하기나 해라.”

“좋아! 그렇게 나와야지!!”

짝짝!

에티가 박수를 쳤다.

그러자 쿠르르르! 광장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고. 곧 우리 주변으로 투명한 유리막이 둘러쳐졌다.

나는 그 유리막을 가만히 손으로 쓸어봤다.

[주의: 파괴 불가 오브젝트]

삐빅.

기다렸다는 듯이 패널이 솟아났다.

[당신은 던전 마스터, <심심한 에티>의 게임에 응했다.]

[그녀와의 승부가 완전히 판가름 될 때까지, 방벽은 절대 부서지지 않는다.]

파괴 불가 오브젝트.

나를 감싼 이 투명한 벽도 물리적으로 부술 수 없다. 방벽의 주인인 에티와 마찬가지.

이 장난감 성 안에선 그녀가 곧 신이요.

그녀의 말이 곧 진리다.

“그럼, 관객들을 채워보자고!!”

쉬쉬쉬쉭!

광장의 곳곳에서 수백, 수천 개의 마법진이 동시에 생성된다.

새파란 빛을 눈부시게 뿜어내던 마법진은, 일제히 사람을 하나씩 토해낸 뒤에야 사라졌다.

“으, 어……?”

“뭐, 뭐야. 여긴?”

“나는, 분명. 이, 이상한 초록색 군인한테 잡혀서……!”

어리둥절하게 사방을 둘러보는 수많은 사람들.

각양각색의 남녀노소가 어느새 광장을 가득 채웠고. 개성 넘치는 리액션을 보여주며 혼란에 빠져있었다.

“전광판! 세팅!!”

에티가 두 팔을 활짝 펴며 외친다.

그러자 파지지직! 거센 스파크와 함께 광장의 상공이 일그러진다. 공간이 흐물거리고, 새파란 빛무리가 그곳으로 모여드나 싶더니.

어느새 광장의 모두가 볼 수 있을법한, 거대한 전광판이 생겼다.

[게임 스코어 현황판]

[플레이어 VS 나]

[0 : 0]

전광판엔 나와 에티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혀있었다.

좀 알아보기 힘든데 ‘플레이어’ 패널이 나. 그리고 ‘나’라고 적힌 쪽이 에티다.

그리고 그 아래. 글자들이 어지럽게 적혀있다.

[1세트: 게임 선정 중]

[2세트: 대기중]

[3세트: 대기중]

[4세트: 대기중]

[5세트: 대기중]

5판 3선용 세트 표지판.

내가 그것을 가만히 눈으로 읽고 있자니. 에티가 테이블 위로 상체를 한껏 기울였다.

불쑥! 그녀의 얼굴이 바짝 가까워졌다.

“아저씨 독심술사니까, 어떻게 진행할지 다 알지?”

“그래. 안다.”

“으흥, 그렇구나! 하지만 이런 건 절차가 중요한 거니까, 일단 설명은 할게?”

“그러든가.”

“게임은 총 5세트. 5판 3선을 할 거야. 게임 종목은 서로가 원하는 걸 아무거나! 첫 게임은 코인토스로 맞춘 사람이 정하고, 그 뒤론 진 사람이 게임 종목을 정하는 거지. 어때?”

거기까지 말한 에티는 문득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그녀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첨언했다.

“아! 혹시 아저씨가 모르는, 나만 아는 게임을 제안한다거나! 그런 치사한 짓은 안 할 거야!”

“그러냐.”

“응! 나는 아저씨가 살던 이 땅의 모든 게임들을 이미 전부 마스터했거든. 혹시나 아저씨가 모르는 거면 다른 걸로 해줄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러면 뭐, 문제 있을까?”

“문제없다.”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티도 그에 화답하듯,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시원시원한 대답이 아주 마음에 들어!!”

고개를 끄덕인 에티가 방정맞게 손을 휘적였다.

파지직! 그녀의 손가락 끝에 섬광이 스쳤고. 깔때기 모양의 확성기가 생겨났다.

“후우. 역시 관객이 있으니 흥이 나는걸?”

확성기를 꼬나쥔 에티는 곧장 광장의 인파들을 휘 둘러봤다.

그녀가 확성기에 입을 갖다 댔다.

[관객들! 너희도 그냥 구경만 하면 재미없지?! 그렇잖아!!]

분명 코딱지만 한 확성기인데. 에티의 목소리가 광장 전체를 쩌렁쩌렁 울린다.

공포로 떨리는 수천 쌍의 눈동자가, 광장 중앙으로 일시에 주목된다.

[그러니까, 너희들도 목숨을 걸어! 나와 아저씨의 게임에 베팅하는 거야!]

히죽.

에티가 해맑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승패를 끝까지 맞추는 사람은 풀어줄게. 그리고 못 맞추면, 그대로 죽어버려!]

흥미와 기대로 번들거리는 에티의 시선.

그 맹목적인 노란색 눈동자가 관중들에게 쏟아진다.

[재미있겠지? 응? 그렇지?]

개미집에 물을 들이붓는 악동.

잔인한 광기가 도사린 순수였다.

가만히 듣던 인파들은 아연실색했다.

“뭐, 뭐야……!”

“지, 지금 뭐라는 거야! 저 X만 한 년이!!”

사람들이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한다.

비명과 고함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꺄아아악! 꺼내줘! 여기서 꺼내달란 말이야!!!”

“X발! 엄마… 엄마아아!!”

일부는 광장의 가장자리를 향해, 에티에게서 최대한 멀리 도망갔고.

일부는… 오히려 에티가 있는 중앙으로 달려들었다.

“나와! 이 X발! 나오라고 이 X만 한 년아!!”

“주, 죽여버릴 거야! 몬스터고 뭐고, 이제 이판사판이야!!”

콰앙! 콰쾅!

투명한 방벽 주변으로 인파가 가득 메워졌다. 그들이 일제히 주먹과 발로 배리어를 두들기기 시작한다.

그거 백날 뚜드려 패도 안 부서질 텐데. 속으로 생각하자니.

“으음~. 아무리 부수려 해도 안 될 텐데?”

에티가 히죽거리며 내 심경을 대변해 줬다.

이렇게 흘러갔으면 다음은 ‘그거’겠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심심한 애도를 표했다.

“근데 너희들. 관객 주제에 너무 그렇게 대들면…….”

아니나 다를까. 에티의 웃는 얼굴에 슬쩍 음영이 졌다.

스윽. 그녀가 들어 올린 손날을 가볍게 내리쳤고.

“…죽여버릴 거야?”

푸화악! 퍼퍼퍼펑!

배리어 주변에 몰려들었던 모든 인간의 머리통이, 일제히 폭발해 버렸다.

후두둑. 머리 잃은 시신 수십 구가 바닥에 널브러진다.

[알았지? 얘들아.]

확성기를 타고 흘러나오는 에티의 한마디.

키이잉―!! 찢어지는 마이크 노이즈가 광장 전체를 때렸다.

그 소리에 압도당하기라도 한 듯. 아무도 입 한 번을 뻥긋하지 못했다.

“…아, 아. 아아……!”

“흐, 으윽. 그흡……!”

그저 입을 최대한 틀어막는다.

행여 소리가 새어 나올까 숨죽여 운다. 공포에 떨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줄줄줄. 다수의 사람들이 일제히 오줌을 지렸다.

“응. 됐다!”

살짝 굳었던 에티의 표정이 다시 풀어졌다.

그녀의 직선적인 시선은, 당연히 다시 나한테로 돌아왔다.

“그러면.”

핏방울이 뚝뚝 흐르는 배리어 표면.

살점과 피가 줄줄 흐르는 그 주변.

“게임할 준비됐어? 아저씨.”

그리고 손가락을 쪽쪽 빨며, 홀린 듯이 그것을 쳐다보는 이브를 한 번씩 훑어봤다.

나는 괜히 이브의 머리칼을 한 번 쓰다듬어줬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해라.”

수만… 아니.

수십만의 목숨을 건, 던전 마스터와의 미니 게임 천국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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