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52화 (52/235)

52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38)>

그래서 이세라는 특유의 넉살과 부드러운 말솜씨로, 이브에게서 멋지게 정보를 캐냈을까?

유감. 그런 형편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기. 이브야. 안녕?”

“흥.”

“어… 저, 이브?”

“흥, 흥.”

“자꾸 고개 돌리지 말고. 언니 좀 봐줄래? 응?”

“흥, 흥. 흥!”

나와 수아에겐 한없이 살갑고 함박웃음을 지어주던 이브였으나. 어째선지 이세라에겐 제대로 눈도 마주쳐 주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고, 콧방귀만 연신 뀌며 고개를 팩 돌려댄다.

“이브. 저, 제발. 언니랑 잠깐만 대화해 보자. 응?”

나중에는 이세라가 거의 간청하다시피 했다. 하다 보니 비참해졌는지 얼굴이 약간 달아오른 채, 입술을 꽉 깨물기도 했다.

그리고 그제야 이브가 귀찮다는 듯이 반응해 줬다.

“싫어. 아줌마랑은 할 말 없다구.”

뿌드득.

그런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세라가 이를 가는 소리가 아니었나 싶다. 못 본 새에 표정이 악귀 나찰처럼 굳어있었으니까.

“저기. 이브……? 아줌마라니. 누구 말하는 거야?”

“말 걸지 마. 아줌마.”

“아니. 이브. 아줌마가 아니지. 언니. 따라 해보자? 언. 니.”

“뭐라는 거야, 자꾸. 아줌마. 씨끄러, 아줌마.”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도 사라졌다.

이세라는 진심으로 억울한 듯 소리쳤다.

“아니. 얘 웃기네?! 나 정용 씨보다 한 살밖에 안 많아!”

쟤는 왜 하라는 추궁은 안 하고, 애한테 감정 지배를 당하고 있냐.

나는 이마를 부여잡고 진득한 한숨을 흘렸다.

“그만. 더 추해지기 전에… 거기까지 하지.”

“아니, 하지만! 정용 씨! 얘 버르장머리가 아주……!”

“에헤이.”

그로기 상태가 돼버린 이세라를 뒤로한 채. 나와 수아가 번갈아 가며 좀 더 질문을 해봤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이브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으으응, 몰라! 나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걸!”

일관된 모르쇠.

결백하다 못해 억울한 듯한, 자기도 답답하다는 표정의 연속.

결국 나와 수아도 한숨과 함께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얻어낸 소득은,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저… 이브.”

“으응, 엄마아!”

아니지. 그러고 보니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구나.

딱 하나. 이브가 수아에게 막힘없이 대답해 준 게 하나 있긴 했다.

“왜, 왜 내가 엄마고, 정용 오빠는… 아빠야?”

그 질문만큼은 흔쾌히 대답해 줬다.

이브는 특유의 고혹적인 눈매로 히죽 웃으며.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그냥.”

“어, 어? 그냥?”

“응. 그냥! 원래 그렇게 정해져 있어!”

…라고 말했다.

수아는 지금까지처럼 헛소리라고 생각했는지 황당해하고 끝났다. 그러나 잠자코 듣던 내 쪽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그 대답을 물고 늘어졌다.

“원래 그렇다고?”

“응! 원래부터 아빠는 아빠고, 엄마는 엄마야!”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냐. 이브. 그 호칭은, 네가 임의적으로 붙였던 게 아닌 거냐?”

“어… 구체적? 이, 이미저그가 뭐지이…….”

모르는 단어가 나오니 이브가 혼란스러워 한다.

가만 보면 쟤는 정신 연령이 오락가락 하는 거 같은데. 외관보다 높은 거냐 낮은 거냐. 사용할 단어 수준을 가늠을 못 하겠네.

아무튼 나는 어려운 단어 빼고 재방송을 했다.

“나는 아빠. 수아는 엄마. 이건, 네가 정한 게 아니라는 소리냐?”

“응! 아니야. 내가 정한 거 아냐. 원래 그랬어!”

“원래라는 건, 그렇게 정해준 누군가가 있다는 소리인가?”

“으… 으응? 그건 잘 모르겠는데에. 그냥 원래가 그래. 나도 그것밖에 몰라아~!”

하지만 거기서 이야기는 원점.

모르는 얘기가 나오자 이브는 다시금 시무룩해지며, 말꼬리를 흐렸다.

웬만한 질문은 다 해봤다. 그리고 대답하는 이브도 슬슬 굉장히 지쳐 보였다.

“일단… 여기까지만 하지. 고생했다 이브.”

그렇게 제1차 이브 청문회는 흐지부지 폐막됐다.

* * *

이세라의 주점 근처. 좁고 낮은 처마 아래.

일대의 전기가 모두 끊겨, 가로등 하나 비추지 않는 완연한 어둠이 깔렸다.

그 속에서 나는 우두커니 서있었다.

“후.”

한숨과 함께 희뿌연 연기를 내뱉었다.

청문회가 끝난 뒤 이브는 그대로 다시 잠들었고. 수아와 이세라도 심적으로 지쳤는지 쉬는 중이다.

나는 인벤토리에 몇 갑 꿍쳐놓은 담배나 피우고 있다.

“깝깝하구만. 진짜로.”

간만에 담배가 오지게 말리는 경험이었다.

긴 회귀 생활 속에서도 이 악물고 끊었던 담배였다. 수아가 언젠가 ‘담배, 끊었으면 좋겠다’라고 유언을 남기고 죽어버렸으니까.

근데 이걸 기어코 다시 잡게 만드네.

이브, 무서운 아이.

“스으으.”

담배를 앞니로 잘근거리며, 이빨 사이로 연기를 흘렸다.

머릿속엔 온통 이브와 나눴던 대화가 둥둥 떠다녔다.

“원래 그렇다, 라…….”

원래.

이브가 말하는 원래란 언제를 뜻하지?

본인이 그렇게 말해놓고 기억도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직 태어나기 전인 하트 기어 시절?

아니면, 그것보다 더 전이었던… 내게 파밍되기도 전의 시절?

“노스페라드.”

그 이름을 가만히 중얼거렸다.

제12던전, ‘고성 바르칼라이드’의 던전 마스터. 이브의 전신이었던 하트 기어를 드롭한 자.

하트 기어를 보유했던 당사자라면, 뭔가 해답을 좀 가지고 있을까?

‘모르겠다.’

이건 다시 만나서 본인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시 만나려면. 놈이 기거하는 던전이 재수 좋게 붕괴해 줘야 한다.

‘벌써 8차 붕괴까지 끝났으니까…….’

14차 붕괴까지. 앞으로 남은 기회는 여섯 번.

그 안에 제12던전이 나와줄지 모르겠다. 약 90개 던전 중 하나를 여섯 번 안에 뽑아야 하니, 확률은 많이 낮은 편.

믿지도 않는 신한테 빌어보는 수밖에.

“내가 아빠. 수아가 엄마…인가.”

중얼거리다 보니 문득, 옛날의 어느 전생이 떠올랐다.

X발. 인상을 한가득 구겼다. 내가 가진 기억이 대부분 그렇지만. 이것도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으니까.

지치고 찌든 수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린다.

“어, 오빠? 이건……?”

꽤나 초창기 회차의 기억이다.

그 회차에서, 나는 수아와 결혼을 전제로 사귀게 되었다.

당연히 프러포즈는 내가 했다.

10차 붕괴를 가까스로 종식시킨 후. 피 칠갑에 걸레짝처럼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주인 없이 나뒹굴던 금은방을 털어 반지를 건넸지.

“…네. 좋아요. 당연히, 좋아요. 오빠……!”

수아는 내 호러틱한 프러포즈를 울먹이며 받아들였다.

로맨틱과는 거리가 멀긴 했다만… 무서워서 운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길 빈다.

“오빠랑 이런 얘기 하게 될 줄, 정말 몰랐는데. 후후.”

그날. 우리는 수많은 미래를 입에 담았다.

나는 행복에 겨운, 그래서 한없이 공허한 청사진을 수아의 앞에 그려나갔다.

“아하하. 오빠, 주책이에요! 벌써 애 이름까지 정해놓는 거예요……?”

수아도 씁쓸하게 웃으며 내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줬다.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을 거다.

내가 장담하는 행복한 미래 따위. 이 X같은 세상에 절대 없다는 걸.

나도 당연히 알고 있다.

어차피 열흘 안에 세상은 여지없이 멸망하고. 애초에 그 때의 내겐, 모레 일어날 11차 붕괴조차 막아낼 자신도 없었으니까.

이번 생의 내 최후가 임박했다. 그러니까 허겁지겁,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프러포즈를 한 거다.

수아도 그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기쁘게 받았던 것이리라.

“오빠……!”

그날. 수아와 나는 격렬한 입맞춤을 나눴다.

서로의 뇌간에 체향과 체온을 각인시키듯이. 한없이, 처절하게 키스를 했다.

“저, 오늘 이 순간을… 절대로. 죽어서도 잊지 않을 게요. 오빠……!”

수아는 그렇게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다음 11차 붕괴 때. 예상대로 나는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그렇게 그 회차는 끝났다.

“아, 오빠……?”

몇십, 몇백 번이나 반복한 11월 27일.

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방을 뛰쳐나가, 수아를 만나러 갔다.

일말의 기대와, 허망한 희망을 안고서.

“대낮부터 웬일이세요? 오빠가 찾아오다니, 별일이네요!”

그리고.

평소처럼 수아를 맞이했다.

평소처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수아를.

“아으, 오빠! 왜 그렇게 끈적하게 쳐다봐요? 좀 징그럽다! 푸흐흐!”

그때 나는 다짐했다.

절대로. 다시는 수아에게. 아무런 감정도 갖지 않겠다고.

그래서 나는 결국 이렇게 말했다.

“꿈을 좀 꿨다. 아주 소름 끼치는 꿈을.”

다시 시작한 세계에서 나는 망령이었다.

있지도 않았던 일을 기억하고. 거기에 연연하는 망집 덩어리.

내가 사랑했던 수아는 나와 함께 죽었다.

눈앞에 있는 수아는 내가 알던 수아가 아니다. 저건 전회차와는 다른 사람이다.

그걸 인정하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었지. 나는 쓰게 웃었다.

“사람 마음이 어디, 내 마음대로 되나.”

그 순간이었다.

펑, 타탁, 두두두두! 멀찍이 건물 숲 너머. 간헐적으로 섬광이 번쩍거리며, 둔중한 폭음과 총성이 들려온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곳을 주시했다.

‘이 주변도 슬슬 시작됐나.’

정확히 무슨 소음인지는 모른다.

곧 서울 전역에서 활개치기 시작할 던전교의 횡포. 단순히 식량을 두고 일어난 일반인 무리들의 소규모 분쟁. 아니면 무수히 발생하는 세기말 폭도 조직들의 자잘한 군벌 싸움.

모르긴 몰라도. 대충 이 셋 중 하나겠지.

“이세라한테… 조심하라고 말해놔야지.”

내가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순간.

“뭘 조심해요?”

불쑥. 등 뒤에서 별안간 나타난 이세라가 물어왔다.

깜짝이야. 내 감각을 피해 뒤에서 접근하다니. 역시 전 S급, 썩어도 준치인가 싶다.

그사이 다 피운 담배를 바닥에 짓이겼다.

“슬슬 이 주변에… 무장 조직들이 본격적으로 날뛸 거다. 지금 너처럼 함부로 뺀질거리지 말라고 경고할 참이었다.”

“어머. 지금 저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웬일이야!”

“그래. 걱정하는 거다.”

내가 쾌히 긍정할 줄은 몰랐던 것인가.

이세라는 오히려 흠칫 놀라며, 당황한 듯이 어색하게 웃었다.

“거, 걱정할 사람도 없으시네. 저 나름 전 S급 헌터인데…….”

“앞으로 등장할 폭도들 중엔, 살아남은 고위 헌터들로만 구성된 놈들도 있다. 레드 스컬이라는 조직인데. 이놈들한테 걸리면 너라도 위험해.”

“에이. 자꾸 무시하면 화내요? 잔챙이들 한 트럭 몰려와도 소용없다니까요?”

“소용없을 것 같냐.”

나는 이세라를 지그시 쳐다보며 물었다.

이세라는 달라진 내 분위기를 금방 읽어냈다. 그녀가 행동을 멈추고 나를 빤히 마주 봤다.

“소용 있었군요? 전에.”

“그래.”

“제가 나대다가, 그놈들한테 죽기라도 했나요?”

“그냥 죽었으면 다행이지.”

나도 이세라도 동시에 입을 닫았다.

분위기를 보니, 내 말의 의미를 곧바로 알아챈 듯하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검열당할라.”

“…네. 자체 검열 고맙네요.”

주제가 주제여서 그런가. 대화가 끝나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 이세라의 차림새를 슬쩍 훑어봤다.

적절한 화제 회피거리를 찾아냈다.

“내가 목적이 아니었군. 외출하던 중이었나?”

정장 마이는 벗어던졌고. 하얀 와이셔츠 아래 가벼운 면바지를 입고 있다.

전체적으로 활동이 편해 보이는 복장. 전생부터 이세라가 전투복처럼 사용하던 차림새다.

“네. 먹을 입이 예상치 못하게 많아져서요. 슬슬 식수랑 식량이 간당간당해요.”

“그렇군. 슬슬 그럴 때긴 하지.”

“네. 매일 칵테일만 부어라 마셔라 할 순 없으니까요. 특히 식수 조달이 좀 급하게 필요할 것 같네요.”

그러고 보니 단수도 됐던가.

식량은 그렇다 치고. 식수도 공수해 와야 하는 시대라.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인 줄 안다지.’

수도꼭지에서 물이 안 나오는 시대가 돼서야, 상하수도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는다.

어쨌든 나는 그쯤에서 이세라의 걱정을 덜어주기로 했다.

“식수나 식량 쪽은 걱정 마라. 내가 웬만큼은 가지고 있다.”

“어머, 정말요? 얼마나요?”

“4명이서 삼시 세끼 100년 먹어도 모자랄 정도. 숙박비치고 마음껏 가져가라.”

“아아, 진짜 다행이다. 한시름 놨네요!”

이세라는 진심으로 안도하며 밝게 웃었다. 식량 사정으로 걱정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이내 그녀가 아, 하는 탄성을 내더니. 기대 어린 표정을 내게 향했다.

“혹시 정용 씨. 과일도 좀 가진 거 있나요? 칵테일이랑 같이 먹을 화채도 좀 만들어놓으면 좋을 것 같은데.”

“있지. 웬만한 건 다 있으니 말만 해라.”

“와우. 자신만만하시네. 정말 다 있어요?”

“네 머리로 상상하는 수준이라면. 아마 다 있을 거다.”

“…흐응? 제 상상력을 얕보시네?”

그 말이 괜한 승부욕을 자극한 모양이다.

이세라는 도전적으로 웃더니, 이내 과일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수박.”

“있다.”

“크랜베리.”

“있군.”

“두리안?”

“있어.”

“…코코넛?”

“있네.”

“체리. 망고스틴! 드래곤후르츠!! 스타후르츠!!!”

“있고, 있고, 있고, 있다.”

콰당.

이세라가 가게 벽을 가볍게 후려쳤다.

그리고 기가 막히다는 양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니, 뭐 과일 장사 하세요? 없는 게 없으시네요?!”

“있는 걸 어쩌라고. 있어서 불만이냐.”

“아, 아뇨. 그냥 놀라서 그랬죠. 있어서 불만이려구요.”

“너도 이 짓 천 번 반복해 봐라. 별의별 상황을 다 대비하게 되니까.”

“아하하. 사양할게요…….”

그 대화를 끝으로 다시 칵테일 바에 돌아갔다.

문을 열자마자 카운터 너머의 소파에 시선이 갔다. 수아와 이브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잠깐 정신을 빼앗겼다.

‘저 모습만 보면…….’

그래.

그림으로 그린 듯한 엄마와 딸이군.

쓴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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