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51화 (51/235)

51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37)>

잠든 이브를 등에 업고 주점 오라클로 돌아간 순간.

“어머……?”

“세, 세상에.”

이브의 변모를 본 두 여인네의 반응이었다.

아니구나. 한쪽은 맹인이던가. 보는 게 아니라 마력 파장으로 느끼는 거였지.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뭐… 그렇게 됐다.”

당장 큰일이 난 건 수아에게 해명하는 부분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이브를 철석같이 혼혈아로 믿고 있었을 터.

신생아가 15일 남짓 만에 5~7세 수준까지 훌쩍 커버린 작금의 사태. 대체 뭐라고 해명하면 좋단 말인가.

“오, 오빠……?”

예상대로 수아는 조심스레 나를 불렀고. 해명을 원하는 지긋한 시선을 던져왔다.

더 이상의 얼버무리기는 통하지 않는다. 얼버무리기엔 이브의 쑥쑥 자란 육체가, 너무 확실한 물증이 되어버렸다.

“후우.”

나는 세상모르게 자고 있던 이브를 소파에 눕히는 한편.

걸치고 있던 후드집업을 벗어던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슬슬 이브의 진실을 말해줄 때가 됐지.”

끼릭. 카운터 앞의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괜히 침중한 표정으로 무게를 한번 잡아줬다.

두 여인의 호기심에 찬 시선이 최고조로 달하는 순간. 나는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

“수아야. 잘 들어라.”

“아, 네에.”

“너무 놀라지 마라. 사실 이브는 마케도니아 혼혈아가 아니다.”

“…네? 그, 그딴 건 진작에 알고 있었는데요.”

“……?”

뭐야. 어떻게 알았대.

마케도니아 뭐시기는 저번에 들켰으니 그렇다 치고. 혼혈아가 아니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소리인가? 거기까진 좀 억측인가?

내가 당황해서 잠깐 머뭇거리는 찰나.

“그 애요. 역시 던전이랑 뭔가… 관련이 있는 거죠?”

수아 쪽에서 조심스럽게 추측한 바를 내뱉었다.

웬걸. 단박에 정답이었다. 이건 좀 내 계산이랑 많이 엇나갔다.

나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상체를 퍼뜩 세웠다.

“어떻게. 아니,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냐.”

“아니… 힌트가 워낙 많았잖아요. 제가 바보인 줄 알아요, 오빠?”

“힌트라고?”

“저렇게 선명한 은발에 빨간 눈은, 영화에서도 본 적이 없어요. 어느 날 갑자기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렇고요.”

“…아아.”

“게다가 제일 수상한 점이 하나.”

“뭐, 아직도 남았냐?”

수아가 검지를 까딱거리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장난기 어린 시선에 약간의 쓴웃음. 힐난과 고마움이 섞여있었다.

“거짓말도 잘 못하는 오빠가, 저한테 기를 쓰고 정체를 숨기는 거. 사실상 이것 때문에 거의 확신했죠.”

“…그래. 그랬군.”

“오빠. 옛날부터 던전 관련된 건 저한테 말 안 하려고 했잖아요. 나 엄마 생각날까 봐.”

아련한 어조로 중얼거리는 수아였다.

저 말대로라면. 수아는 거의 이브와 만난 직후쯤부터, 그녀가 던전발의 무언가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는 소리가 된다.

‘이거… 꼴이 우스워지는군.’

나름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뭐가 되냐.

수아와 나 사이에서 묘한 유대감이 흐르는 찰나.

“흐음. 던전과, 관련이 있다고요?”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산통을 깨부쉈다.

이세라다. 그녀가 전에 없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잠든 이브와 얼굴을 맞추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얼굴이 내 쪽으로 향했다.

“저기요. 정용 씨?”

“뭐냐.”

“저는 일단 전 헌터예요. 그것도 S급 헌터요.”

“알고 있다.”

“현역 시절엔 무수히 많은 던전을 클리어했어요. S급으로 승격되려면 적어도 100개 이상의 던전 클리어 실적이 있어야 하거든요. 이것도 아세요?”

“대충은 안다.”

이야기가 강원도 한계령 군부대 가는 길 마냥, 빙빙 멀리도 돌아가는군.

나는 한계령에 고속도로를 뚫어버리기로 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이세라.”

“정용 씨. 던전을 좋아하시나요?”

“그럴 리가. 출세에 미치지 않고서야.”

“네. 그럼요. 많은 헌터들이 그렇고, 정용 씨도 그렇듯이요. 저도… 던전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해서 이를 가는 헌터 중에 하나예요. 정용 씨.”

쿠우웅.

문득 이세라가 시커먼 안대를 만지작거렸고. 주변에서 위압적인 마력의 흐름이 발생했다.

살기다. 날카로운 살기가 오롯이 이브에게 향하고 있었다.

“이브가 던전과 관련이 있는 애라는 건 금시초문이에요. 정용 씨.”

“그렇겠지. 내가 설명을 건너뛰었으니.”

“이건 사기 계약 아닐까요? 저는 당신이란 사람이 마음에 들어서 받아준 거지, 당신이 시한폭탄을 안고 있어서 받아줬던 게 아니거든요.”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간다. 이세라와 이브의 사이에 서서, 그녀가 쏘아내는 흉흉한 살기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이세라는 눈썹을 잔뜩 찌푸리더니, 연신 안대를 만지작거렸다.

“하아. 좋아요. 지금이라도 말씀해 주세요.”

“뭘.”

“뭐겠어요? 이브의 정확한 정체죠. 몬스터든, 던전 마스터든… 던전 주민이든. 뭔가 있을 거 아니에요?”

“나도 모른다.”

꿈틀.

당당한 내 대답에, 이세라의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네에?”

“미안하지만 나도 정확히 모른다. 수아가 말해줬던 대로… 던전과 관련이 있다. 내가 아는 것도 거의 그 정도밖에 없어. 진짜다.”

“…하. 참나.”

어지간히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이세라는 연신 헛숨을 들이켰다.

저 진심으로 당혹스러워 하는 표정. 무의식중에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이 대화는 안 보였나 보지?”

뜨끔.

이세라가 눈에 띄게 어깨를 흠칫거렸다.

역시 그랬군. 나는 고개를 가만히 주억거렸다.

“그렇겠지. 이건 이브에 관한 대화니까. 미래시는 통하지 않았을 거다.”

“그게… 무슨 의미죠?”

“그런 특징이 있다는 건 처음에 분명히 말해줬다. 이브는… 네 예지는 물론이고. 내가 사용하는 어떤 스킬도 통용되지 않아. 던전에서 발생한 모든 스킬이 면역이다.”

“아니.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되지만 사실이다.”

이세라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아까보다도 한층 진지하고 긴장된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그러면. 그 애가, 지금 일어나는 연속 게이트 붕괴와 관련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나요?”

나는 이세라의 굳은 표정을 빤히 주시했다.

그리고 사실대로 대답했다.

“못한다. 모르니까.”

이세라는 미동도 없다.

표정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는가 싶더니. 이내 결연한 기색이 스쳤다.

‘아서라. 인마.’

나한테 승산 없는 전면전이라도 선포할 셈인가 보군.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이세라.

“그래서. 나도 지금부터 알아보려고 한다.”

그 말에 쏟아지던 살기가 잠깐 멎었다.

복잡한 상황에 눈만 끔벅이는 수아. 그 옆에 바짝 굳어있는 이세라.

“당사자한테 직접.”

그녀들 앞에서, 나는 태평하게 자던 이브의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았다.

꽁! 찰진 꿀밤 소리가 주점에 울렸다.

“꺄우!”

이브는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눈물을 찔끔 머금고 머리를 쥐어 싸맨 이브가, 주위를 마구 두리번거렸다.

이내 이글거리는 세 쌍의 눈동자를 마주한다.

“…으에?”

이브가 멍한 탄성을 흘렸고.

나는 박수를 짝짝, 친 다음. 장중하게 선언했다.

“제1차 이브 청문회. 개최.”

* * *

이브를 내 앞에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마치 죄인을 심문하듯, 수아와 이세라와 내가 세 방향에서 그녀를 막아섰다.

“똑바로 서라. 이브.”

“으, 으응…….”

정면에는 나.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수아와 이세라가 있었다.

“너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다고들 한다.”

드르륵. 카운터 의자를 끌고 와 삐딱하게 걸터앉았다.

이브는 난데없는 추궁 분위기에 바짝 위축돼 있었고. 나는 손발을 꼼지락거리는 그녀를 지그시 노려봤다.

“지금부터 우리가 돌아가며 질문을 할 거다. 이브.”

“어……? 어, 으응.”

“최대한 사실대로 대답해 주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게 원만하게 끝난다. 코로 설렁탕을 먹는 불상사는 없게 될 거다.”

“으, 우우…….”

“무슨 소린지 이해했냐.”

“…으응. 잘 모르겠지만, 아, 알 것 같아.”

이브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잘됐지. 나 역시 이브에 대한 의문이 쌓이고 쌓여 폭발할 지경이었다.

첫 질문의 물꼬는 나부터 트겠다. 우선 좀 포괄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브. 너는 대체 뭐냐.”

그리고 그것은 패착이었다.

이브는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아리송한 표정으로 손가락 끝을 잘근거렸다.

“나……? 나, 나는 나야. 아빠아. 그게 무, 무슨 말이야아……?”

이브는 그런 애매한 대답을 남길 뿐이다.

옆에서 수아와 이세라가 에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 안 그래도 애가 정신이 없을 텐데. 그런 식으로 어영부영 질문하면 알아듣겠어요?”

“어린애한텐 좀 더 구체적이고 직관적으로 물어봐야죠. 영 센스가 없으시네요, 정용 씨.”

그리고 동시에 극딜이 들어왔다.

둘이 짜기라도 했나. 무호흡 딜링의 연계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뭔 말을 못하겠군.’

역시 둘이 뭔가, 나 없던 사이 친해질 만한 해프닝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니까. 숨겨진 에피소드에 대한 궁금증이 살짝 증폭된다.

“그러면 너희들이 해봐라.”

나는 미간을 좁히고 손사래를 쳤다. 항복의 의미였다.

그러자 왼편의 수아가 헛기침을 하며 목을 풀기 시작한다. 다음 타자는 그녀였다.

“저기, 이브?”

“으응. 엄마아.”

엄마. 당연하다는 듯이 튀어나온 그 호칭.

수아는 물론이고, 옆에서 듣던 이세라도 흠칫 놀랐다.

이세라가 입을 쩍 벌리고 수아를 쳐다본다.

“진짜로……?”

“아, 아니에요!!”

수아는 고개를 마구 휘저어 즉각 부정했다.

그렇게 잠깐의 소란이 끝나고. 벌게진 얼굴을 식힌 수아가 다시금 헛기침을 했다.

“이브. 혹시 정용 오빠랑 만나기 전의 일, 뭐 기억나는 거 있니?”

오오. 나는 낮은 탄성을 흘렸다.

그렇군. 나와 만나기 전이면 이브가 던전에 있을 시절. 자연스럽고 이해하기도 쉽게, 이브의 과거를 캐내는 질문이다.

날 비난할 만했군. 이 정도 센스면 인정하는 바다.

“으으응……? 나, 기억 안 나.”

하지만 이브의 반응은 실망스럽다.

“나, 눈 떴을 때 아빠가 안아주고 있었어.”

“아아. 그, 그래?”

“응. 아빠 얼굴밖에, 기억 안 나. 그 전은… 나도 몰라. 기억이 하나도 안 나!”

“그, 그렇구나.”

이브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추측성으로 더듬더듬 말하는데. 일단 여지없이 완전한 부정이었다.

마무리가 어설프구나, 수아야.

혹시 모르니 나는 확인 작업을 실시했다.

“이브.”

“우웅?”

“이 나라에선 구라 치다 걸리면 손모가지가 날아간다.”

“…흐에엑? 소, 손모가지이?”

“내가 지금 손모가지 오함마로 아작 날 짓을 하고 있진 않은가.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 한번 재고를…….”

빠악.

어깨로 솜 주먹이 날아왔다. 수아였다.

그녀가 겁에 질린 이브를 달래주는 한편. 눈에 힘줘서 나를 노려봤다.

“오빠! 애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요!! 못된 말 배우면 어쩌려고!”

“이건 애가 아니야. 이세계 외계인이다.”

“그, 그건 그렇지만……!”

“사실은 너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할망구일 가능성도 높지.”

전에 없이 단호하게 일축해 버렸다.

사실 이세라의 말대로다. 나도 던전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은 이브가 기억을 일시적으로 잃었거나.”

아니. 오히려 누구보다 싫어한다고 자부하지.

던전에서 나오는 모든 것. 심지어 내가 사용하는 막대한 힘조차도, 한없이 증오스러울 뿐이다.

“…지금도 거짓말로 우릴 기만하는 걸 수도 있어.”

그러니 당연한 수순이다.

내가 기본적으로, 이브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을 리가. 절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대화를 들었음인가.

“나는, 나는……!”

문득 이브가 억울한 듯이 울먹거렸다.

그녀가 볼을 빠방하게 부풀리고 툴툴거렸다.

“나는 아빠한테… 거짓말 안 한다, 뭐! 흥! 아빠 미워!!”

갓난애였을 때보다 훨씬 정확한 발음. 그리고 훨씬 풍부해진 표정과 감정 표현.

굉장히 인간적인 면모였다. 어쩌면 감정이 바싹 말라비틀어진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더.

잠깐 넋을 잃고 그녀의 행색을 주시했다.

“음… 그럼. 이번엔 제 차례 같죠?”

그리고 마지막.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이세라가 슬며시 말문을 텄다.

안대를 매만진 이세라가, 한 걸음 이브에게 접근했다.

“…….”

“…….”

대치하는 두 사람.

잠깐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