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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2화 (22/235)

22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8)>

백화점의 최상층.

입김마저 하얗게 얼어붙어 부서져 버리는 공간.

매섭게 휘몰아치는 한기와 한파의 중심에, 하얀 여자가 서있었다.

‘…현자의 눈.’

나는 여자의 상태창을 띄웠다.

[몬스터 정보]

[명칭: 냉혈의 아스트라에아]

[체력: 24 마력: 91]

[힘: 6 민첩: 11 지능: 58]

[상세: 제31던전, ‘만년설산’의 던전 마스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한파를 일으킨다. 평소에는 얼음 속에서 영면을 취하나, 영역에 침입자가 들어오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말살한다.]

냉혈의 아스트라에아.

이런 이름이었구나. 꽤 오랜만에 나오는 년이라, 보고 나서야 기억났다.

‘마지막에 등장했던 게… 10회차 전쯤이던가.’

그때도 꽤 성가신 구간에서 나왔던 것 같은데. 인상이 약해서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난다.

당장 ‘정확히 10개월 전의 며칠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라고 물어보면. 바로 대답이 나오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일단 난 대답 안 나오는 평범한 두뇌의 소유자다.

“죽을 준비 됐냐. 설녀.”

그리고 저년이 무슨 이름이든, 나는 항상 쟤를 ‘설녀’라고 불렀다.

몬스터에게 툭하면 말 거는 건 나의 못된 습관이다. 좋게 말해서 습관이고 나쁘게 말하면 미친 거지.

사람이 1천 개월쯤 너절하게 살아있으면 저절로 이렇게 된다.

그래. 늙으면 죽어야지.

그리고 몬스터도 전부… 죽어야지.

“죽어.”

가만히 서서 가볍게 오른손을 휘둘렀다.

쉬리릭! 늘어진 사복검이 날카로운 궤도를 그리며 설녀의 목덜미를 탐했다.

―당신. 강한 인간?

채채챙!

기대하던 고기 써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대신 유리가 부서지는 날카로운 소음이 실내를 메운다.

―나보다… 강한, 인간?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서늘한 목소리.

아스트라에아 주변으론 두터운 얼음의 장막이 형성돼 있었고. 내가 휘두른 사복검은 그곳에 박혀있었다.

목소리는 보나 마나 아스트라에아의 것이다.

어조가 지극히 희박하다. 감정조차 얼어붙은 것처럼.

―위험해. 당신은… 너무, 위험한 냄새가 나.

스스스.

실내에 한가득 흐드러지는 얼음의 조각들.

아스트라에아는 그 너머에서, 창백하게 죽은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호.”

나는 짤막한 감탄사를 흘렸다.

세 번째 붕괴에서 내 일격을 막을 수 있는 몬스터가 또 있었다. 무르무르 외에 없을 줄 알았는데. 좀 충격이었다.

‘힘이 아니다. 테크닉으로 막았군.’

단순히 얼음 방벽을 세운 게 아니었다.

물의 장막을 먼저 소환하고, 그것으로 내 사복검 채찍을 부드럽게 감싼다. 그리고 한파를 일으켜 순간 결빙을 시켰다.

1초 이하,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수많은 화학작용들.

그것이 본래라면 막지 못할 내 일격을 막을 수 있게 해줬다.

‘내 눈에는 전부 보였다.’

원리부터 과정, 심지어 에너지의 정확한 흐름까지. 그야말로 전부다.

모두 현자의 눈 덕분이지. 내가 1천 번 넘게 회귀하면서, S급 스킬을 괜히 한 손에 꼽게 파밍한 게 아니다.

S급의 무게는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다.

“다음 건 좀, 막기 어려울 거다.”

설녀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본래 기믹을 간파 당한 기믹 보스는 바람 앞의 촛불 신세.

죽는 일만 남은 존재다.

“죽어.”

쉬리릭!

아까와 똑같은 자세. 똑같은 선고.

그리고 똑같은 힘을 담아 오른손을 휘둘렀다.

―이, 정도는……!

아스트라에아도 마냥 병신은 아니었다.

내 후속 공격을 대비를 하고 있었는지, 아까보다 빠르게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쉬리릭! 순식간에 생성된 물보라가 그녀의 전방으로 모여들었고. 내 사복검을 잡아먹듯이 감싸고 든다.

그래. 옳지.

바로 그 순간을 노렸다.

“블레이드 아크.”

스킬 발동.

나조차도 처음 써보는 스킬이었다.

[스킬 발동: 블레이드 아크]

짤막한 패널이 생성되고, 동시에 피이잉!

귀를 찌르는 이명이 뇌를 헤집는다.

“…크윽.”

압도적인 정보.

감각과 이성이 혼재된 정보 덩어리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파악했다.’

스킬 ‘블레이드 아크’의 모든 원리와 구조, 사용법을 터득했다.

이것이 던전발 스킬을 사용하는 기본적인 메커니즘. 일단 처음 시전을 하면, 사용법은 저절로 뇌리에 입력된다.

그리고 그렇게 파악한 블레이드 아크라는 스킬은…….

‘꽤 쓸만하군. 괜히 A급이 아니야.’

나름 고평가를 줄 만한 스킬이었다.

지금 상황에 사용한 내 판단도 정확한 편이었다.

“개문(開門).”

파지지직!

첫 번째 명령어를 입력하자, 내 칼날의 궤적을 따라 새파란 스파크가 튀었다.

스파크는 허공을 마구 일그러뜨렸고, 이내 찢어발겼다. 거칠게 찢어진 균열 안에서는 새카만 공허가 질질 흘러나왔다.

“진입.”

두 번째 명령어 발동.

꽝꽝 언 얼음 방벽에 속박됐던 사복검이, 그대로 시커먼 균열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뭐, 무슨? 지금, 무슨, 일이……?

아스트라에아가 당황한다.

너는 당황하고 있을 틈이 있으면, 위기감을 느낀 즉시 도망쳤어야 했다.

찰나의 안일함이 너를 죽였다. 설녀.

“절단.”

마지막 시동어를 내뱉으며 주먹을 틀어쥐었다.

콰자자작! 아스트라에아의 등 뒤. 별안간 진청색 스파크와 함께 허공이 길게 찢어졌다.

―아?

아스트라에아의 나직한 탄성.

그것을 마지막으로 서걱! 그녀의 머리통이 하늘을 날았다. 균열에서 순식간에 튀어나온 사복검의 칼날 때문이었다.

―이, 거. 뭐…야.

아스트라에아의 잘린 머리통이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시선은 머리를 잃은 채, 하얀 피를 콸콸 뿜는 자기 몸뚱이로 가있었다.

―공격, 이… 왜. 등 뒤에서……?

직접 보고도 이해가 잘 안 되는 듯하다.

하긴. 전방에서 휘둘린 검을 분명히 막아냈는데, 후방에서 갑자기 똑같은 칼날이 쏟아지다니. 나 같아도 치사하고 억울하겠다.

“감이 좀 잡히는군.”

나도 써보고 나서야 완전히 메커니즘을 파악했다.

스킬 설명을 보고 ‘블루투스 칼질인가?’ 하는 추측을 한 적이 있는데. 의외로 그 비아냥이 꽤 정확한 구석이 있었다.

“포탈 건…….”

이건 쉽게 말하면 모 퍼즐 게임에 등장하는 무기인 포탈 건.

그것과 굉장히 유사한 스킬이었다.

‘아니지. 검이니까 포탈 소드라고 해야 하나.’

사복검은 내 전방에 열린 균열로 빨려 들어갔고. 칼끝이 설녀의 뒤에서 열린 또 다른 균열로 이어져 있었다.

괴물의 아가리에서 튀어나온 긴 혓바닥을 연상시킨다.

“끝.”

어쨌든 잔치는 끝이다.

나는 블레이드 아크 스킬을 해제했다.

쉬리릭! 사복검이 저절로 줄어들어 양쪽 공간 균열에서 빠져나온다. 그리고 꾸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균열도 빠르게 아물어갔다.

―…시, 싫어.

아스트라에아의 잘린 머리가 떨리는 목소리를 흘렸다.

나는 무심하게 그것을 내려다봤다.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직. 죽고, 싶지… 않아. 나는, 나, 나……!

퍼걱!

파육음. 구질구질한 넋두리가 멈췄다.

내가 설녀의 대가리를 밟아 으깨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냐. 나도 마찬가지다.”

설녀의 유언에 삼삼한 공감을 해줬다.

죽는 게 사는 것만큼이나 익숙해진 나로선 뭐, 솔직히 껍데기뿐인 말이긴 한다.

[제31던전 ‘만년설산’의 던전 마스터, ‘냉혈의 아스트라에아’가 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

[게이트가 힘을 잃고 소멸합니다. 던전의 붕괴가 종식됩니다.]

삐빅, 삐빅.

익숙한 던전 시스템 패널이 연속으로 등장했다.

던전 붕괴의 종료. 미션 클리어다.

“음. 그럼…….”

그사이 밖에서 얼마나 죽었을지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이제 한파의 확산은 멈출 것이다. 던전 마스터를 죽였으니까.

하지만 아직 중요한 관건이 하나 남아있다.

‘…얘도 비선형 던전이던가?’

기억이 잘 안 나서 잠깐 고민했다.

일반 던전이라면 백화점 내부에 아직 몬스터가 즐비할 터. 잔당 처리는 귀찮지만, 소홀히 했다간 던전 마스터 이상으로 희생자를 낼 우려가 있다.

실제로 전생에선 오크족장 케샤쿠를 죽인 이후. 백화점 수비를 뚫어낸 잡졸 오크들에게 수천 명이나 천안시민이 학살당했다.

‘일단 현자의 눈으로 스캔했을 땐, 아무것도 안 느껴지긴 하는데.’

여전히 백화점 내부의 생명 반응은 0이다.

이번엔 인간 한정이 아니다. 서칭 범위를 나 외의 모든 생명체로 확장했음에도 걸리는 건 없었다.

“…그러면 없는 거겠지.”

그렇게 대충 결론지었다.

어차피 시간이 꽤 지났으니 곧 상위 헌터 부대도 현장에 출동할 거다.

혹시 내가 예측 못한 위협이 남았더라도, 뒷일은 걔네한테 맡기도록 하자.

‘까놓고 말해서. 이 이상은 좀 귀찮네.’

헌터 협회도 마지막으로 체면치레할 기회는 좀 줘야지.

어차피 며칠 후면 다 죽을 팔자인데.

[던전 마스터 ‘냉혈의 아스트라에아’ 사냥 보상을 획득합니다.]

그리고 내 앞에는 고대하던 사냥 보상 패널이 떠올랐다.

1천 번을 반복해도, 이 순간만큼은 기대감이 차오르는 걸 주체할 수가 없다.

[스킬 ‘절대영도 영역’을 획득하셨습니다.]

웬걸. 이번에도 처음 보는 스킬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곧장 스킬 상세창을 확인해 봤고. 눈을 부릅떴다.

‘광역 한파 스킬. 설녀의 트레이드마크인 그거잖아.’

당연히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스킬이었다.

두 번 연속으로 처음 보는 스킬이 파밍되다니. 초유의 사태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럴 수가… 있나?”

아이템이야 워낙 종류가 무궁무진해서 내가 못 먹은 것도 아직 많지만. 스킬은 베리에이션이 어느 정도 한정적이다.

그래서인지 드롭하는 스킬 종류도 많지 않았고. 지금까지 내가 얻은 게 거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고?

“…단순한 우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가 하트 기어를 얻고, 무르무르가 의미심장한 말들을 지껄인 다음부터다.

그때부터 지금껏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스킬들이 귀신같이 등장했다.

‘타이밍이, 너무 딱 떨어지는데.’

우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건은 나 혼자서 해답이 안 나온다. 이런 패배 순응형 마인드는 싫어하는 편이지만… 어쩔 수 없이, 다음 무르무르와의 만남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겠다.

“뭐라도 알고 있겠지. 그 새끼는.”

어차피 다음 생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아이템이나 스킬은 단 하나뿐이다.

첫 번째 던전에서 얻은 ‘드래곤 스킨’ 물약. 그리고 저번 던전에서 무르무르가 토해낸 ‘블레이드 아크’라는 스킬.

이미 고민할 여지가 두 개다.

그런데 거기에 또 하나. 이번에 얻은 ‘절대영도 영역’까지.

고민해 볼만한 스킬이 하나 추가된 것이다.

“풍족한 회차군.”

이런 유용한 스킬들은 꼭 한 회차에 몰아서 나온단 말이지. 사람 고민되게 말이야.

이게 머피의 법칙인가 하는 그거인가.

‘나중에 행복한 고민을 좀 해봐야겠어.’

물론 선택지가 많아서 생기는 고민은, 선택지가 없어서 생기는 고민보단 무조건 낫다.

나는 쓴웃음을 머금었고. 블러드 스트림을 발동해 집 방향으로 날아갔다.

하얗게 얼어붙은 백화점이 빠르게 멀어진다.

* * *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시커먼 공간.

심해의 한가운데 가라앉은 느낌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 이유로 이런 질문을 하는 거다. 초인.

노이즈가 심하게 낀 드글거리는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불쾌해지고 소름이 돋는다.

특유의 호칭을 볼 때, 그건 분명 무르무르였다.

―자네가 지키고 싶은 건 그 계집이냐? 아니면 이 세상이냐?

재방송 자꾸 하게 만들지 마라.

나는 강수아를 살리고 싶은 거다.

세상이야 두 쪽 나든 불지옥이 되든. 몬스터 천국이 돼도 아무 상관 없다.

수아 외의 모든 사람들이 몰살돼도 신경 안 쓸 자신이 있다.

―그런데. 자네는 왜 영원회귀를 반복하는 겐가?

수아를 지키지 못했으니까 그렇다.

―그런 것치고 자네는, 정작 그 계집을 지키는 것보다… 던전의 붕괴를 막는 쪽에 훨씬 신경을 쓰는 것 같은데?

인류가 멸망해 버리면 수아도 죽어버린다.

혹여 버티더라도 멘탈이 깨져버려서, 미련 없이 자살을 해버린다.

그래서 나는 방법을 찾아나가고 있다.

최후의 던전 붕괴에서도 세상이 망하지 않도록. 수아가 웃을 수 있는 세상이 살아남도록, 강해지는 중이다.

―그렇게 인류의 멸망을 저지해 내면. 그 계집에게도 미래가 생길 것이다?

그렇다. 그게 내 생각이고 방식이다.

왜. 틀리냐?

―자네. 지금 인과관계를 좀 착각하는 게 아닌가?

…뭐야. 내가 착각했다고?

무르무르의 목소리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세상을 구한다. 그 계집을 구한다. 이 두 명제는 완전히 다른 문제가 아닐세.

―서로 긴밀하게, 아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고.

클클클.

나를 비웃는 듯, 끈덕진 웃음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온다.

―하고많은 사람 중 자네가 회귀에 속박된 것.

―그리고 자네가 그 계집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된 것. 이것 역시 서로 관련이 있지.

지금. 저게 대체, 무슨 소리냐?

무르무르. 너는… 나한테 무슨 말을, 전하고 싶은 거냐.

―물론 이렇게 신신당부해도, 공허한 망언 잡설에 불과하니 안타까울 따름.

문득 사위를 가득 메웠던 어둠이 물러간다.

그 대신, 파아앗! 정신이 나갈 정도로 강렬한 섬광이 세상을 메웠다.

―어차피 이 꿈도 금방 잊혀질 게고. 자네는 제 발로 쳇바퀴를 굴리러 돌아가겠지.

정신이 아득해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차피 첫걸음은 이미 떼었다.

평소의 무르무르와는 약간 달랐다.

장난기가 없다. 진심으로 나를 동정하는 듯한, 그런 목소리였다.

―눈치 챘는지는 몰라도, 이미 변화는 시작됐을 터. 일단 시작했으면 돌이킬 수 없다. 이젠 자네가 알기 싫어도… 결국엔 알게 될 것이야.

눈부시다.

눈이… 너무 부시다.

―마지막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나? 초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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