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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3화 (23/235)

23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9)>

번쩍. 눈을 떴다.

만화처럼 벌떡 일어나는 극적인 연출은 없다.

“…….”

그냥 평소처럼 천천히 눈꺼풀이 올라갔고, 그대로 한동안 천장을 주시했다.

나는 방금 꿨던 꿈을 반추해 봤다.

“…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꿈의 내용은 놀랍도록 선명했다. 무르무르와 비슷한 목소리가 감 놔라 배 놔라, 나한테 훈수를 오지게 뒀지.

‘분명히… 내용은 기억이 나는데.’

꿈의 내용은 기억난다.

그런데 무르무르와 나눴던 대화의 내용은, 거짓말처럼 기억이 안 난다.

정말이지 단 하나도. 누군가 내게서 그 기억만 싹 소거한 것처럼.

뇌 내에 부자연스러운 미싱 링크가 생겼다.

“뭐냐. 진짜로.”

이제는 나도 그러려니 넘어갈 수 없는 수준이다.

이상하다. 이번 회차는 뭔가가 확실히 이상하다.

1천 번을 반복하면서 단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일들이, 이번 회차에 우후죽순 일어나고 있었다.

“…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파지직!

허공에 인벤토리를 열어 손을 집어넣는다.

빠져나온 손아귀에는 피처럼 새빨갛고 뾰족한 결정, 하트 기어가 쥐어져 있었다.

“…….”

한동안 그것을 빤히 주시했다.

물론 그런다고 없던 해답이 튀어나오진 않았다.

“…오늘이었지.”

그래. 어차피 회귀 때 봤던 패널이 고지한 시간은 바로 오늘이다.

높은 확률로, 지금 일어나는 이변은 이 하트 기어와 관련이 있다. 그러니 정확히 15일째가 되는 시간… 오후 2시가 되면.

뭔가는 일어나겠지. 이 아이템에서.

‘뭐든 와라.’

이런 막장 세계관을 1천 번이나 반복한 몸이다. 이제 와서 거리낄 게 뭐 있으려고.

뭔가 감당 못할 게 나온다 싶으면. 까짓거 뭐.

한 번 죽어주면 그만이다.

“끄응.”

그런 다짐과 함께 침대에서 어기적거리며 나왔다.

수없이 반복된 하루. 회귀 8일 차 아침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 * *

내 일과는 굉장히 단순한 사이클로 돌아간다.

우선 게이트 붕괴가 있는 날. 출근일.

정해진 수순에 따라 붕괴를 막고, 던전 마스터를 죽여버린다.

작업 끝나면 곧장 집에 돌아온다. 수아가 많이 불안해하면 달래주든지, 같이 밥을 먹든지 하고. 별 탈 없으면 그대로 잔다.

그리고 붕괴가 없는 날. 휴일.

그날은 그냥 집에 말뚝 박고 두문불출한다.

높은 확률로 자고, 그렇지 않으면 TV로 뉴스를 시청한다.

바로 2회차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퍼질러 잤지만. 이번 생은 ‘레드 저거너트’의 여론 동향을 살피기 위해 TV 보는 빈도가 훨씬 많아졌다.

“오빠아―”

아. 휴일 일과가 하나 더 있네.

수아는 우리 집에 뻔질나게, 그야말로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는 편이다. 이건 본격적인 붕괴가 시작되면 더욱 심해진다.

그래서 그녀의 말 상대를 해주는 것도 휴일의 막중한 일과다.

“오빠아. 저… 너무 힘들어요. 죽을 것 같아요오…….”

소파에 누워있던 수아가 말꼬리를 늘였다.

슬쩍 그녀에게 시선을 돌려봤다. 얼굴색 보니 진짜로 죽을 것같이 힘든 기색은 아니다.

그쯤에서 수아의 의중을 파악했다.

‘나한테 뭔가를 원하는구나.’

수아는 진짜 힘들고 죽을 것 같으면, 완전히 입을 다물고 자기 세계에 틀어박혀 버린다.

그러다 스트레스가 한계를 돌파하면. 말보다 행동이 먼저 나가서 훌쩍 자살을 해버린다. 골치 아픈 타입이지.

그래서 멘탈 관리도 참 힘든 편이다.

“그래. 내가 뭘 해주면 될까.”

그래서 저건 진짜 죽겠다고 호소하는 게 아니다. 그냥 칭얼대는 거다.

수아도 그제야 바짝 찡그렸던 인상을 폈다. 그리고 멋쩍은 미소를 배시시 흘렸다.

“이히히. 너무 티 났어요?”

“그런 건 아니고. 눈치 하면 또 한정용이니까.”

“푸하핫! 오빠가 무슨 눈치가 좋아요! 살다 살다 별 이상한 소릴 다 듣겠네.”

…방금 내 발언이 저렇게 박장대소할 수준이었나?

나름 진지하게 한 말이었는데. 이렇게까지 정면으로 부정당하니 좀 쇼킹하군.

“어쨌든 지금은 잘 알아챘잖아.”

“흐흐. 그건 또 그렇네요?”

나는 헤실거리는 수아를 내버려 둔 채, 부엌으로 걸어갔다.

냉장고를 열고 안에 쟁여놨던 빵을 한 아름 들고 왔다. 그것을 곧장 수아에게 들이밀었다.

“자. 봐라. 지금은 이걸 원했지?”

누운 채 말꼬리를 늘이며, 죽겠네 살겠네 징징대기.

내가 저걸 하루 이틀 본 줄 아냐. 저건 수아가 배고플 때 나오는 전형적인 습관이다.

“와아. 진짜 어떻게 아셨어요?!”

수아는 새삼 신기하다는 눈으로 빵 봉지를 빤히 쳐다봤다.

이내 그녀가 그것을 덥석 낚아챘고, 허겁지겁 봉지를 뜯어 빵을 베어 물었다.

“으음! 이건 인정! 강수아 피셜로 인정해 드릴게요, 눈치 백단 오빠!”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빵을 오물오물 씹는 강수아.

연이은 게이트 붕괴로 한없이 침울하던 강수아였건만. 빵 한 쪼가리로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건가.

이럴 땐 단순한 애라 참 다행이지 싶다.

‘아니지. 저건… 일부러 밝은 척을 하는 거겠군.’

이내 내 표정은 천천히 굳어졌다.

지금 우리 집의 풍경만 보면 꽤 목가적인 순간처럼 보인다.

하지만 수아가 우리 집에 틀어박혀 먹을 걸 구걸(?)하는 데에는, 꽤 처절한 뒷사정이 숨어있다.

‘그러고 보니 3번째 붕괴 이후부터구나. 마트 사재기.’

아마 밖에선 전에 없는 마트 사재기 대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성난 들쥐 떼처럼 식료품을 들고 돌진하는 사람들. 혼란을 틈타 절도를 저지르는 무리.

라면 한 봉지 가지고 일어나는 주먹질. 칼부림. 고함과 비명. 절규.

“내놔! X발! 내가 먼저 잡았잖아!!”

“뭐라는 거야 이 십새끼가!!”

“X발! 뒤지고 싶어?!”

그야말로 전쟁 통을 방불케 하는 마트의 아수라장.

나름 충격적인 장면이라 그런가. 거의 초창기 회귀 때 본 건데 아직도 눈에 선하다.

‘수아는… 아마 오늘 마트에 갔던 거겠지.’

그리고 그곳에서 허겁지겁 도망쳐 나왔을 것이다.

여기. 우리 집이 그 도주의 종착지다.

‘오늘 치 식료품을 못 샀을 거고.’

그렇게 추측하는 이유가 몇 개 있다.

오늘 수아가 우리 집에 왔을 때. 숨은 턱까지 차서 격하게 헐떡이고 있었다.

게다가 한 손에는 텅 빈 장바구니를 부서뜨릴 듯이 움켜쥐고 있었다.

“…뭐, 뭐야. 이게, 그게, 대체 뭐야……?”

그리고 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홀린 듯이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그랬던 적이 처음이 아니다. 전생의 언젠가도 그런 적이 있었기에, 나는 단박에 전말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미리 빵 몇 개 꺼내놓길 잘했다. 자연스러웠어, 한정용.’

당연히 이런 사태 정돈 대비해 놓고 있다.

지금 내 아공간 인벤토리엔 4인 가족 100년 치에 달하는 보존식이 저장되어 있다.

아까 수아에게 준 빵도 그중 일부다.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랑 관련한 눈치는 좀 좋은 편이다.”

나는 쓴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사실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그 말이 수아에겐 좀 신경 쓰였나 보다.

그녀는 상체를 퍼뜩 들어 올리더니 그 부분을 물고 늘어졌다.

“저요? 왜 하필 저만?”

“글쎄. 하도 오랫동안 봐서 그런가.”

“…오래 본 걸로 따지면, 언니를 훨씬 오래 봤잖아요. 치.”

“어… 그렇구나.”

“오빠. 언니 눈치 잘 읽어요?”

솔직히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강서윤 눈치를 잘 보겠냐. 그런 능력은 줘도 안 가진다.

나는 결국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네 생각을 제일 많이 해서 그런 것 같다.”

“어, 예?”

“평소에 틈만 나면 네 생각을 하니까. 표정도 잘 읽고 눈치도 잘 보게 된 거겠지.”

“……?!”

수아가 히익, 하고 숨을 삼켰다.

이내 그녀가 어깨를 감싸고 온몸을 바싹 굳혔다.

“오, 오빠. 지, 지금… 지, 진심이세요?”

수아가 경악에 빠진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양 뺨은 불타듯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상태. 귀까지 빨개졌다.

상태가 이상해서 좀 걱정이 들었지만. 일단 고개는 끄덕였다.

“그래. 사실인데.”

“오빠한텐, 어, 언니가 있잖아요! 언니 놔두고 왜 저를……?!”

“언니……? 강서윤이 지금 왜 나오냐.”

“왜 나오다니?! 오, 오빠! 그건 좀 심하죠! 언니한테 너무하잖아요!”

수아는 적잖은 혼란에 빠진 모습이다.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느라 양손으로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

그리고 혼란에 빠진 건 나도 마찬가지다.

아까부터 좁아진 미간이 펴질 생각을 않는다.

‘대체 저 반응은 뭐지.’

전생에서도 몇 번 본 적이 있어서 꽤 궁금했는데. 물어봐도 항상 수아가 얼버무려서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러고 보면… 강서윤에게 월미도 여행을 제안할 때도 비슷한 반응이 나오지.

‘왜 이 상황에, 자매가 서로의 이름을 파는 거냐.’

이거 진짜 자매가 서로 짜고서, 나 놀리기라도 하는 건가?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순간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아우, 진짜… 오빠는 가끔씩, 진짜 뭔 생각을 하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어요!!”

한참 후에 수아가 답답하다는 어조로 꿍얼거렸다.

우리의 마음이 드디어 통했구나. 도저히 모르겠는 여자야.

공감한 나머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도 그 생각 하고 있었다.”

뭐, 그날 오전은 그런 식으로 나름 평화롭게 흘러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와 수아는 꽤 많이 친하다. 신변잡기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빠르게 녹아 흘렀다.

“아하하. 그래서, 제가 그때는 말이죠……!”

솔직하게 즐거웠다.

이런 날만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실소가 절로 나오는 망상을 하게 될 정도였다.

이변이 일어난 건 당연히 오후 2시.

던전 시스템 패널이 예고한, 하트 기어의 부화 시간이었다.

* * *

한창 수아와 쓸데없는 노가리로 시간을 죽이던 와중.

약속의 오후 2시가 임박했다.

“시간이 됐군.”

나는 그것을 깨달았고.

대화를 나누다 말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오빠? 왜요? 뭔 일 있어요?”

수아는 내 돌발 행동에 얼빠진 탄성을 흘렸다.

내 표정이 좀 심각해서 그런가. 걱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아니. 일은 무슨. 그런 거 없다.”

스르륵.

나는 그런 수아의 정수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잠깐 쉬고 있어. 수아야.”

“어, 아…….”

당황한 듯이 어깨를 흠칫 떠는 수아. 다행히 내 손길을 크게 거부하진 않는다.

이내 털썩. 그녀가 소파 위로 맥없이 쓰러져 버렸다.

“…으음. 스으으…….”

곧 규칙적인 숨소리와 잠꼬대를 흘리는 강수아.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내가 슬립 스킬로 재워버린 거다.

하지만 단순히 재운 것만으론 안심 못 하지.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도 모른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어 스킬. 무려 S급 배리어를 둘러쳐 놓은 우리 집.

여긴 현재 미국 대통령 벙커보다도 100배는 안전한 장소다.

‘그러니 내가 나간다.’

수아를 지키겠답시고 여기서 수아를 빼내는 건 어불성설.

한시라도 빨리 수아에게서 떨어져야 한다.

“텔레포트.”

쉬쉭!

싸늘한 마력이 온몸을 한 번 훑어 내려간다.

[스킬 발동: 텔레포트]

누군가 온몸을 잡아끄는 감각이 엄습했고. 잠깐 현기증이 일었다.

이내 감았던 눈을 떴을 때. 주위 풍경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제대로 도착했네.”

후암동. 남산 공원 부근.

으리으리한 헌터 협회 건물 인근이었다.

일부러 여기로 온 거다. 행여나 폭발 같은 거 일어나면, 제일 먼저 헌터 협회부터 휘말리라는 세심한 배려랄까.

‘준비는 끝났고.’

나는 손끝에 모았던 마력을 흩어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하트 기어를 꺼내기 위해, 인벤토리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뭐든 와봐라. 하트 기어.”

보석을 움켜쥔 손을 눈앞으로 가져왔다.

파지직, 파직! 하트 기어의 붉은 표면. 시뻘건 스파크가 연신 튀어 오르고 있었다.

나는 부릅뜬 눈으로 그것을 주시했다.

“…이건.”

전에 없던 격렬한 마력 반응.

그리고 생전 느껴본 적이 없는 막대한 에너지의 흐름.

여기서 무언가 일어난다. 지금 당장. 그것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알림: 부화 임박]

[하트 기어가 곧 부화합니다. 결정의 내부에 깃든 진정한 모습이 현현합니다.]

직후 그런 패널이 떠오르나 싶더니.

파아앗! 하트 기어가 눈부신 섬광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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