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베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깥을 살피던 아리스타는 마차가 아그네스 저택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아, 참 끈질기다. 그치?”
아리스타가 하하 웃으며 고개를 돌렸지만, 넋을 놓으며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루카스를 보고 멈칫했다.
“……우리가 사귄다고?”
루카스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처음엔 이해하지 못하던 아리스타가 순식간에 얼굴을 붉히며 허둥지둥거렸다.
“아,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거짓말을 해야 될 것 같았어! 웬만해선 떨어지지 않을 사람이잖아!”
손을 내저으려던 아리스타는 그제야 자신이 아직까지 루카스의 손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리스타가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루카스의 손을 놨다.
“꺄악! 미, 미안해, 오라버니. 내가 대체 언제 손을…….”
장난기는 좀 있어도 언제나 카리스마 넘치던 아리스타가 한순간에 허당이 되자 루카스는 그만 긴장이 풀려버렸다.
호탕한 웃음소리에 아리스타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하하! 그래, 네 말이 맞네. 덕분에 보기 좋게 떼어낼 수 있었어. 고맙다.”
루카스가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아리스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미 달아올라 있던 아리스타의 볼이 더욱 뜨거워졌다.
“그래도 깜짝 놀랐어. 갑자기 손을 턱 잡고 사귄다고 하니까. 어제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했던 것도 얼마나 놀랐는데.”
루카스가 하마터면 오해할 뻔했다며 웃었다. 하지만 점차 웃음소리가 작아졌다.
창에서 비쳐 들어온 노을이 아리스타 얼굴에 내려앉아 있었다. 마치 아리스타가 볼을 붉힌 것처럼 보였다.
우물쭈물 달싹이는 입술, 저녁노을 때문인지 달아올라 보이는 눈가, 그리고 수줍어 보이는 표정.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광경에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넋을 놓았다.
루카스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영문을 모르는 아리스타는 갑자기 조용해진 그를 쳐다봤다.
“오라버니?”
아리스타가 저를 불렀지만, 루카스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제기랄, 이게 뭐야.’
장난처럼 내뱉었던 말이 어느덧 부메랑처럼 돌아와 뇌리에서 없어지지 않았다.
아리스타가 나를 좋아했으면-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모른다. 그저 갑자기 떠오른 것에 가까웠다.
늘 동생으로만 보였던 아리스타가 오늘 처음으로 여자로 보였다.
갑작스럽게 변해버린 제 마음에 혼란스러운 나머지 루카스는 리디아 공작저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아리스타가 떠나고 얼마 있지 않아, 루시아는 헤르윈에게 붙잡혀 응접실에 들어왔다.
헤르윈은 루시아의 껌딱지마냥 그녀가 옴짝달싹하지도 못할 정도로 껴안고 있었다.
만나자마자 루시아를 안고 싶었지만 친구 놈들이 훼방을 놓는 바람에 손 한 번 잡기 힘들었다.
“데이트 신청하려고 온 거였는데…….”
헤르윈이 아쉬운 투로 툴툴거리자 루시아가 짐짓 놀란 눈으로 돌아봤다.
“정말? 그래서 멋있게 빼입고 온 거야?”
어쩐지 평소보다 더 멋있다 했더니 아예 작정하고 꾸민 것이었다.
갑자기 칭찬을 듣게 된 헤르윈은 루시아가 순수한 얼굴로 자신의 차림새를 뜯어보자 입꼬리가 괜히 씰룩거렸다.
이러다가는 바보처럼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큼, 크흠! 내가 그렇게… 멋있어?”
“응? 응. 늘 멋있지만, 오늘은 더 멋있는걸?”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말투로 루시아가 태연하게 말하자 헤르윈의 입꼬리가 더더욱 위로 올라갔다.
멋있다는 말을 하루 이틀 듣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날아갈 듯 기쁜 걸까.
분명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것일 테지만, 헤르윈 눈엔 루시아가 그 어느 때보다 귀여웠다. 결국 참지 못한 헤르윈이 루시아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장난스럽게 입을 맞추자 루시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갑자기 뭐야…….”
“네가 너무 예뻐서.”
헤르윈의 얼굴을 본 루시아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부끄러워 얼른 손으로 가렸다.
헤르윈의 눈빛이, 아니 그의 얼굴에서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감정이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온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정작 루시아도 헤르윈과 별반 다를 건 없었다. 그녀의 눈에서도 헤르윈의 대한 사랑이 가득했으니까.
그걸 본 헤르윈은 루시아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서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면 사고를 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대신 루시아를 꼭 끌어안는 것으로 스스로와 타협을 본 헤르윈이 들뜬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차라리 지금 이어져서 다행인 것 같아.”
“응?”
“만약 아카데미 시절에… 아니, 그 이전에 너랑 이어졌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했을 거야.”
앞말만 듣고 서운하게 생각했던 루시아는 그 뒤에 이어진 말에 토끼 눈을 떴다. 그의 말을 해석하자면, 지금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자신을 좋아한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아아, 가기 싫다.”
시간을 확인하던 헤르윈이 투정을 부리며 루시아에게 안겼다.
“벌써 가게? 저녁이라도 먹고 가.”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헤르윈은 내적 갈등 끝에 겨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다들 불편해하실 거야.”
“우리가 내외하던 사이도 아니고 불편할 게 뭐 있어. 어머니랑 아버지도 반기실걸?”
“음, 글쎄…….”
헤르윈은 조금 떨떠름해졌다. 그렇게 친하던 루카스마저 자신을 경계하고 싫어했었는데 아그네스 백작 부부라고 해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대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루카스보다 싫어하면 싫어했지 반기진 않으실 것 같은데…….
“부모님께서 놀라시지 않을까? 우리 사귄 지 고작 하루밖에 안 됐어.”
“어, 그렇네.”
헤르윈의 스킨쉽이 너무 익숙해서 순간 몇 달은 사귄 줄로만 알았다.
“나중에 정식으로 다시 방문할게. 그리고 우리 결혼할 거라고 어머니께 말씀드려놨어.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연락하신다니까 조만간 수도로 내려오실 거야.”
“수도로 내려오신다고? 굳이 그러실 필요 없는데…….”
물론 루시아도 부모님께 헤르윈과 결혼하겠다고 말은 해놨지만, 하일이 수도로 내려오는 건 조금 결이 달랐다.
지금 그는 북부에서 온갖 일을 처리하느라 수도로 내려올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고작 자신하나 때문에 바쁜 시간을 쪼갠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당연히 오셔야지. 우리 결혼을 위한 자리인데. 그리고 아버지께서도 은근히 우리가 결혼하길 바라셨거든.”
헤르윈의 말에 심히 놀란 표정을 짓던 루시아는 문득 예전에 스칼렛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방금 전에 내가 했던 말은 진심이야. 헤르윈이 많이 부족할지 몰라도 네가 우리 가문에 들어왔으면 했어. 이건 나뿐만 아니라 그이도 마찬가지란다.’
새삼 페네우스 가문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자 괜히 부끄러워졌다.
“우리 내일은 제대로 된 데이트할까?”
그때, 가기 싫다고 바르작거리던 헤르윈이 데이트 신청을 했다. 당연히 기쁘게 받아들이려던 루시아는 무언가 떠올리고 멈칫했다.
“내일은 약속 있어…….”
“약속? 무슨 약속?”
헤르윈이 화들짝 놀라며 물어오자 루시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 베른이랑 잠깐 만나기로 했거든…….”
오늘 아침, 베른에게 편지가 왔었다. 어제 오크 사건 이후로 루시아가 기절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확실하게 일을 마무리할 겸, 그리고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눌 겸 내일 잠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헤르윈은 납득은 했지만 영 못마땅한 눈치였다.
“……내일 몇 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1시에 ‘테일러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어.”
눈은 잔뜩 굳었지만, 헤르윈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일로 토라지는 쪼잔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랑 같이 가.”
“너도?”
“왜? 나는 가면 안 돼?”
“으음…….”
루시아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헤르윈은 초조해졌다. 둘이 서로에게 감정이 없었다고 해도 루시아의 첫 키스 상대가 베른이란 사실은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질투심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직전, 다행히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뭐, 괜찮겠지. 그래, 내일 같이 가자.”
뚱했던 헤르윈의 표정이 삽시간에 환히 밝아졌다.
“정말? 무르기 없기다?”
어쩐지 헤르윈의 뒤로 붕붕- 세차게 흔들리는 꼬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후작이랑 얘기 다 끝나면 오늘 못했던 데이트 하자. 어때?”
“응, 좋아.”
“내가 내일 완벽한 데이트 코스를 짜올게. 그러니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 맞다.”
조잘조잘 말하던 헤르윈은 문득 무언가 떠올리고 루시아를 품에서 놓았다.
루시아는 어리둥절하던 것도 잠시, 눈앞에 나타난 선물상자에 화들짝 놀랐다.
“깜짝이야. 이게 뭐야?”
헤르윈이 설풋 웃으며 말했다.
“한번 열어봐.”
루시아는 순순히 선물상자를 풀었다. 상자 안에 있던 것은 하늘처럼 푸르른 아쿠아마린 귀걸이였다.
딱 자신의 취향에 맞는 귀걸이가 나타나자 루시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너무 예뻐…….”
넋을 놓을 정도로 좋아하자 헤르윈이 루시아 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응! 응! 완전 마음에 들어! 이건 대체 언제 산 거야?”
자연스레 루시아 귀에 걸린 토파즈 귀걸이를 빼고 아쿠아마린 귀걸이를 끼워주던 헤르윈은 잠깐 멈칫했다.
헤르윈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북부로 가기 직전에 샀던 거야.”
“어? 북부에 가기 전이라면…….”
분명 루시아가 마지막으로 헤르윈에게 고백했던 시기였다. 어리둥절하던 루시아는 다시금 자신이 풀어헤친 포장지를 살폈다.
이건 분명 헤르윈이 자신 몰래 샀던 장신구였다.
“설마… 나 주려고 샀었던 거야?”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실에 루시아의 눈가가 붉어졌다. 헤르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너 주려고 샀었어. 데려다주면서 주고 싶었는데…. 그날 그렇게 헤어져 버려서…….”
“아…….”
루시아는 탄식을 흘렸다. 자신의 고백으로 갑작스럽게 헤어졌었지.
그때는 아리스타에게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 것이었다니…….
‘너무 기뻐.’
가슴이 벅찰 지경이었다. 루시아는 거울로 자신의 귀에 걸린 아쿠아마린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고마워, 헤르윈. 정말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야.”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야.”
헤르윈이 루시아를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사랑해, 루시아.”
그에 답하듯 루시아는 헤르윈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나도 사랑해, 헤르윈.”
들어도 들어도 지겹지 않은, 마치 마법 같은 단어였다. 누구랄 것 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한참이나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루시아가 기쁜 목소리로 조잘거렸다.
“앞으로 매일 이것만 착용해야겠어.”
루시아는 본래 착용하고 있던 귀걸이를 정리했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헤르윈이 키득거렸다.
“얼마든지 사 줄 테니까 아끼지 마. 그러고 보니 이 귀걸이, 못 보던 거네? 언제 산 거야?”
“아, 그건…….”
신나게 말을 잇던 루시아는 무언가 떠올리곤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응?”
“그, 베른이 선물해 준 귀걸이야…….”
헤르윈의 얼굴이 단박에 서늘해졌다.
꽤 취향에 맞았던 귀걸이인지라 무심결에 착용하고 말았다.
루시아가 헤르윈의 눈치를 보자 헤르윈이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응, 그래?”
헤르윈은 루시아 손에서 귀걸이를 가져와 그것을 원수 보듯 노려봤다. 이내 그가 주먹을 꽉 쥐자 빠직- 하는 소리와 함께 가루가 후두둑 떨어졌다.
“이런, 부서졌네.”
부서져? 아무리 힘이 좋다고 해도 보석이 손쉽게 부서질 리가-
놀란 눈으로 헤르윈의 손을 살피자 보석은 정말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루시아가 멍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헤르윈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싱긋 웃을 뿐이었다.
“내가 이것보다 더 예쁜 걸로 사줄게.”
“으응, 그래…….”
헤르윈은 위험하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휴지통에다가 손을 탈탈 털었다.
딱 봐도 삐진 듯한 모습에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나 참, 애도 아니고.’
질투 때문에 일부러 부순 게 분명했다. 그래도 질투하는 모습이 귀여웠기에 루시아는 모른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