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4/129)

<104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우린 이만 가 볼게.”

“오늘 재밌었어요! 나중에 시간 잡아서 오늘처럼 놀아요.”

“루시아, 언제든 마음 바뀌면 말해, 알겠지?”

헤르윈까지 모여 완전체로 4시간 동안 끊임없이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저녁에 다다랐다. 

슬슬 집으로 갈 시간이라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떠나가기 직전, 친구들이 툭툭 말을 내뱉자 헤르윈의 표정이 더욱 심통 맞게 변했다.

결국 헤르윈이 버럭 소리 질렀다.

“다시는 오지 마! 너희들은 앞으로 절교야. 알겠어?”

“네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요.”

“어유, 무서워라. 얼른 도망가야겠네요!”

“우리 말고는 친구도 없으면서 괜히 큰소리치기는.”

물론, 겁먹을 친구들이 아니었다. 

끝내 웃으며 도망치는 친구들을 보며 헤르윈이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마지막까지 근처에 남아있던 아리스타가 배를 부여잡으며 웃었다.

“진짜 쟤네들 때문에 미치겠다. 헤르윈 너 어떡하냐? 당분간 저렇게 놀려댈 텐데.”

“지금까지 저것들을 친구라고 둔 내 잘못이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계속 놀림을 당했던지라 헤르윈은 단단히 골이 나 있었다.

그가 쿵쿵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응접실에 들어가자 루시아와 아리스타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루시아, 네가 헤르윈 잘 달래야겠다. 삐져도 단단히 삐졌네.”

“헤르윈 놀릴 일이 흔치 않으니까 괜히 더 그런 것 같아. 잘 어르고 달래야지.”

눈이 마주치자 누구랄 것 없이 두 여자는 웃음을 참으며 어깨를 떨었다. 

일 년치 웃음을 오늘 하루 다 쏟아낸 것 같아 배가 당길 지경이었다. 아리스타는 어느새 맺힌 눈물을 훔쳐내며 루시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무 늦었지만, 축하해. 너희 둘이 너무 잘 어울려.”

“고마워, 아리스타.”

함박웃음을 지으며 행복해 보이는 루시아를 보고 아리스타가 약간 쓴웃음을 지었다.

괜히 헤르윈이 과거에 자신을 좋아했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 이리 두 사람이 이어졌다고 해도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루시아 입장에선 자신이 미울 법한데도 아무 내색 없이 친구로 있어 준 것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아리스타는 루시아를 꼭 끌어안았다.

“난 언제나 네 편이야. 알지?”

놀라던 루시아가 픽 웃으며 덩달아 아리스타를 끌어안았다.

“갑자기 뭐야, 쑥스럽게. 당연히 알지.”

“나중에 헤르윈 저 자식이 서운하게 하거나 누군가 괴롭히면 말해. 그럼 내가 쏜살같이 달려가서 아주 혼내줄 테니까.”

“하하하! 정말?”

“그럼, 정말이고 말고. 난 네 기사인걸?”

뒤로 한 발짝 물러선 아리스타가 루시아의 손을 잡고 짧게 입을 맞췄다. 아리스타는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보랏빛 눈동자로 지그시 루시아를 응시했다.

루시아가 저도 모르게 볼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기사라니. 너도 참…….”

“거짓말 아닌데. 나 아카데미 1학년 때 네게 평생 잘하겠다고 다짐했잖아. 그것도 내 나름의 기사의 맹세였어.”

농담이라고 생각한 루시아가 웃음을 흘렸다.

“듣기만 해도 좋네. 아리스타, 네가 남자였다면 당장이라도 넘어갔을 것 같아.”

“이거 영광이군요. 아가씨.”

눈을 동그랗게 뜨던 아리스타가 이내 브라이언처럼 능글맞게 말하자 루시아가 간지럽다며 웃었다. 그때, 두 사람 사이에 손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응접실에 들어갔던 헤르윈이 어느새 다시 나온 것이었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가 없네. 뭐라고? 아리스타한테 넘어가?”

어느새 루시아를 품으로 끌어당긴 헤르윈이 뾰로통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루시아. 나야, 아리스타야? 정답은 두 개밖에 없어. ‘하나밖에 없는 소꿉친구’, ‘헤르윈 페네우스’ 자, 골라.”

결국 하나밖에 없는 선택지였다. 질투심에 휩싸인 헤르윈을 보고 아리스타의 눈이 차게 식었다.

“헤르윈, 추하다.”

시선을 루시아에게 고정한 헤르윈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적휘적 내저었다. 

“아리스타도 있는데 자꾸 그런 말 할 거야?”

“응, 그러니 빨리 대답해. 내 인내심은 길지 않아.”

루시아가 못 말린다며 헤르윈의 품에서 바르작거렸다. 그리고는 어느새 걸음을 옮기는 아리스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리스타, 미안해! 나중에 또 보자!”

아리스타는 뒤로 돌며 손을 흔들었다. 그새 헤르윈이 루시아에게 뽀뽀하는 것이 보였다.

친구들의 애정행각은 보고 싶지 않았기에 서둘러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복도를 벗어난 아리스타는 숨을 몰아쉬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어쩌려고 저러는 건지.”

한 번 마음이 풀리니 제어가 안 되는 모양이다. 루시아에게 애교부리는 헤르윈의 모습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오랜 마음고생 끝에 두 사람이 이어진 것은 다행이지만, 그런 점은 별로 부럽지 않았다.

그래도 보기 좋다고 생각하며 아리스타는 피식 웃었다.

“얘들아, 늦어서 미안…….”

아리스타는 정문에 다다르자마자 사과를 건넸다.

친구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올 때 다 같이 크리스틴의 마차를 타고 왔기 때문에 갈 때도 그녀의 마차를 얻어 타야 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아리스타는 멈칫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설마-

“지금 나 두고 간 거야?”

아리스타는 황망한 얼굴로 문밖에 나섰다. 마차는커녕 친구들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리디아 공녀님, 출발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마침 주변을 지나가던 아론이 아리스타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랐다.

그는 조금 전, 크리스틴 일행이 떠난 것을 떠올렸다.

아리스타가 허탈한 눈빛으로 아론을 쳐다봤다.

“애들 벌써 갔어요?”

“그… 네, 10분 전에 떠나셨습니다.”

버림받았단 사실이 확인 사살되자 아리스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것들이 진짜……!”

리디아의 오른팔에서 오러가 피어오르자 아론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후우, 절대 가만 안 둬.”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란 걸 알고 있지만, 열 받는 건 여전했다. 아리스타의 눈치를 보던 아론이 조심스레 말했다.

“자택까지 가실 수 있도록 마차를 준비해드릴까요?”

아리스타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떨궜다.

“하는 수 없지. 그럼, 조금 부탁을…….”

아리스타는 말을 하다 말고 작게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포착했다. 얼마 있지 않아, 마차 하나가 나타났다.

혹시 친구들이 다시 되돌아온 건가 싶었지만, 크리스틴의 마차가 아니었다.

이윽고 마차 문이 열리고 루카스가 나타났다.

피곤한 기색으로 목을 문지르던 루카스는 앞에 있는 아리스타를 보고 멈칫했다. 

벽안이 휘둥그레 커져 있었다. 숨 막히는 침묵이 흐르자 아리스타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

어제 오크 사건도 사건이지만, 그 전에 베키의 바람 현장을 같이 목격했던지라 괜히 어색했다.

하지만, 어색한 건 아리스타뿐인지 루카스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네가 왜 여깄어? 혹시 루시아 보러 온 거야?”

루카스가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조금 거리가 가까운 것 같아 아리스타는 주춤 물러섰다.

“응, 친구들이랑 같이 보러 왔어. 아무래도 어제 있었던 일이 걱정돼서…….”

“그렇구나… 그런데 여기서 뭐 해?”

“아, 그게…….”

아리스타는 처음엔 머뭇거리다가 이내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한참 듣던 루카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그래서 너를 두고 갔다고?”

“……응.”

“진짜 미치겠다. 걔네들은 왜 널 두고 간 거야? 네가 그렇게 존재감이 없는 애도 아닌데.”

“내 말이. 두고 봐. 나중에 어떻게든 복수할거니까.”

아리스타가 뚱한 얼굴로 연신 투덜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카스는 쿡쿡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까?”

“어?”

“집에 가야 하잖아. 타. 집까지 데려다줄게.”

어느새 마차 앞까지 간 루카스가 아리스타에게 손을 뻗었다. 누가 봐도 에스코트를 할 것 같은 모양새에 잠시 넋을 놓던 아리스타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돼, 됐어! 그냥 마차만 빌려줘. 내가 알아서 갈게.”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던 루카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아리스타의 손을 잡고 마차에 태웠다.

“됐으니까. 잠자코 타. 안전하게 모실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루카스도 덩달아 마차에 올라타며 마부에게 리디아 공작저로 가자고 명령했다.

루카스와 단둘이 마차를 타는 건 처음이라 아리스타는 몸을 빳빳이 굳혔다.

손끝이 간질거려 괜히 치맛자락을 붙잡던 아리스타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오라버니.”

“고맙긴 뭘. 우리 사이에.”

별다른 의미로 말한 게 아니겠지만, 괜히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졌다.

아리스타는 자신을 두고 간 친구들에게 감사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상황은 없었을 테니까.

덜컹-!

그런데 갑자기 마차가 급정거를 했다. 몸이 앞으로 쏠린 아리스타를 루카스가 단단히 붙들었다. 얼떨결에 루카스 품에 안기게 된 아리스타가 눈을 깜빡였다.

“아리스타, 괜찮아?”

“으응…….”

“마차를 대체 어떻게 모는 거야. 무슨 일이야?”

아리스타가 무사한 걸 확인한 루카스가 마부에게 사정을 물었다. 다시 자리에 앉은 아리스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루카스에게서 시트러스 향이 났다.

맡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향이 꼭 그와 닮았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마차 앞으로 갑자기 사람이 달려드는 바람에…….”

마부가 쩔쩔매며 상황을 전했다. 사람이라는 말에 루카스와 아리스타 모두 창밖을 살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누구 할 것 없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라버니.”

“잠깐, 여기 있어.”

루카스는 아리스타를 두고 혼자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앞을 서성이던 인물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베키.’

베키였다. 어제 그런 짓을 해 놓고서는 후회라도 하는 건지 루카스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혹시 루카스의 마음이 약해지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했지만, 괜한 기우였는지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떠한 빛도 서리지 않았다.

“내가 정말 잘못했어.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그러니 제발 날 떠나가지 마…….”

어느덧 베키가 눈물까지 흘리며 애걸복걸했다. 루카스가 단호하게 끊어내도 그녀는 끈질겼다.

“아직도 화가 다 안 풀렸어? 그러면 풀릴 때까지 기다릴게, 응? 네가 날 용서해줄 때까지 여기 있을 테니까…….”

베키의 집착이 계속되자 루카스가 피곤한 듯 이마를 짚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아리트는 마차에서 나왔다.

“정말, 딱 한 번만 날 용서해주면…….”

“그쯤 하시죠.”

하루 새에 초췌해진 베키의 얼굴이 아리스타를 보자마자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아리스타, 안에 있으라니까.”

루카스가 아리스타에게 다가가자 베키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얼어붙었다. 그녀가 입을 다물지 못하며 두 사람을 가리켰다.

“저, 저 여자가 왜 마차에서 나와? 두 사람 혹시 사귀기라도 하는 거야? 그런 거야?” 

마차에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오해의 물꼬를 튼 베키가 쉴 새 없이 말을 내뱉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나랑 헤어진 지 고작 하루밖에 안 됐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래! 아~ 나 몰래 그동안 둘이 만나왔구나! 그치?”

말도 안 되는 말을 쏟아내며 제멋대로 추측하기 시작하자 루카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사정없이 인상을 구겼다.

“너 입조심해. 지금 누구한테 하는 소리야?”

“누구긴 누구야 바로 너희 둘이지! 그렇게 순진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더니 아주 소름 끼쳐!”

모든 것을 잃어버린 베키의 눈엔 보이는 것이 없었다. 날뛰는 베키의 모습에 루카스는 남아있던 정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루카스가 다시 한번 그녀에게 경고하려던 찰나, 그의 손을 잡은 아리스타가 앞으로 나섰다.

“그래요, 저희 사귀어요.”

“……허!”

기가 찬 베키가 헛웃음을 내뱉었지만, 아리스타는 당당했다.

“오라버니가 제 고백을 받아줬습니다. 이제 당신이 돌아올 곳은 없어요. 그러니, 추하게 여기서 난동 부리지 말고-”

저리 꺼져.

아리스타가 살기를 내뿜으며 낮게 읊조렸다. 소드 익스퍼트에 다다른 검사의 살기를 평범한 여성이 온전히 받아내기에는 버거웠다.

결국 다리에 힘이 풀린 베키가 주저앉았다. 

아리스타가 가소롭다는 듯 콧김을 내뿜으며 루카스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마차에 올라탔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루카스는 아직도 얼떨떨했다.

“출발해주세요.”

잠시 머뭇거리던 마부가 말을 몰기 시작하고, 흘깃 뒤를 살핀 아리스타의 눈에 베키가 허망하게 주저앉은 모습이 보였다.

더 이상 저 여자가 루카스를 찾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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