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29)

<67화>

“처음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셀린느와 도망갈까도 생각했죠. 하지만… 셀린느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베른. 결국 우리는 여기까지였던 거야.’

‘아니야! 셀린느! 이대로 우리만 떠나면 돼! 그러면 더 이상 우리를 방해할 사람도 없다고.’

베른이 셀린느를 붙잡고 늘어졌지만, 셀린느는 차가운 얼굴로 베른의 손을 뿌리쳤다.

‘지금 나보고 전부 포기하고 너를 따라가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셀린느……?’

‘르마리오 자작이 나이는 많을지 몰라도 돈은 많아서 부족함 없이 풍족하게 지낼 수 있어. 이제 나도 아버지의 그 지긋지긋한 돈 타령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그런데 너랑 도망가면 내게 뭐가 남지?’

매몰찬 태도에 베른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지금까지 내 재산과 배경을 보고 만나왔던 거야?’

‘……그래! 맞아! 네 신분을 보고 접근했어! 그걸 이제 알다니. 참 순진하네.’

서로의 신분을 몰랐을 때부터 순수하게 좋아했던 것이 맞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로 충격적인 말이었다.

셀린느의 말에 결국 베른은 더 이상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그렇게 셀린느는 르마리오 자작과 결혼했다.

“저와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제가… 모든 것을 다 포기할 만큼 사랑했던 사람이거든요.”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헤르윈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자신이 떠올랐다.

그래서 베른에게 공감되며 그가 안타까웠다.

“1년 동안 폐인처럼 지냈습니다. 저택 밖으로는 일절 나가지 않았고, 저를 찾아온 친구들도 모두 만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이리 멀쩡한 얼굴로 돌아다니고, 잘 웃고, 그리고 자신과… 약혼을 기약했다.

루시아의 뒷말을 눈치챈 베른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흐르니 조금은 괜찮아지더군요. 그리고 갑작스레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아.”

“그토록 셀린느를 반대했던 분이라 갑자기 떠난 것이 원망스러우면서도 아버지라 그런지 마냥 미워할 수도 없더라고요. 처음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셀린느를 다시 데려올까 했지만, 그녀는 제가 실연에 허덕이고 있을 때,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셀린느와의 인연이 완전히 끊어진 거죠.”

“하지만, 아직 사랑하시죠?”

“네? 아, 아니요. 그러면 안 돼…….”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내저으려던 것도 잠시, 베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제 손 위에 따스한 감각이 내려앉았다. 작디작은 손을 보고 베른이 고개를 푹 숙였다.

“……네, 맞습니다.”

“혹시 제게 베른과 닮은 것 같다고 했던 것도 그녀 때문일까요?”

“……….”

“베른도, 저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서로 이어지지 못하는 처지니까요.”

“불쾌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제 마음 편하자고… 그런 이유로 루시아를 선택했습니다.”

역시 제 예상이 맞았다. 그는 자신에게서 실연당한 본인을 투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루시아는 제게 과분할 정도로 착하고 좋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당신이 제 미래의 배우자로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베른이 다급하게 일어나 루시아의 앞에 섰다. 루시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베른을 올려다봤다.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쩌면 저도 베른과 같으니까요.”

어째서 그동안 베른과 있으면 편하고 동질감이 느껴진 건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과 같았다.

같은 고통을 가지고 있고, 비슷한 사랑을 했으며,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는 처지였다.

“베른이 용기를 내어 말씀해주셨으니 제 얘기도 해야겠네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말씀하시지 않아도…….”

“아니요. 제가 하고 싶어요.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것보다 제가 한 말을 믿어주셨으면 해요.”

손을 내젓던 것도 잠시 베른은 루시아의 진심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하셨던 대로 저는 헤르윈을 오랜 기간 짝사랑해왔습니다. 베른처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적은 없지만, 제 모든 것을 쏟아부을 정도로 그를 열렬히 연모했죠.”

“……….”

“워낙 어렸을 때부터 봐온 사이라 조금만 기다리면, 언젠간 헤르윈도 나와 같은 마음이 되겠지. 내 마음을 알아줄 날이 오겠지 하고 기다렸지만 전부 제 희망 사항일 뿐. 그런 날은 오지 않더군요.”

“……그러셨습니까.”

“베른과 맞선을 보게 된 것도 헤르윈에게 마지막 고백을 했다가 제 마음이 그에게 닿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사실, 헤르윈을 사랑한 것처럼 더 이상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더군요. 그래서 저도 그저 배우자로 괜찮은 사람, 굳이 사랑이 아니어도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으로 베른을 선택한 겁니다.”

저와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된 베른이 루시아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진심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저도 베른과 별반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세요. 오히려… 베른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기에 더 마음이 놓입니다.”

이로써 사랑이라는 부담감에서 해방된 느낌이었다.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 상대방에게 사랑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

나중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숨통이 트였다.

“베른이 제게 사랑을 원했다면 저는 부담스러워했을 겁니다. 그건 베른도 마찬가지죠?”

베른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모르니 한번 확인해 볼까요?”

“확인 말입니까?”

“네.”

루시아는 말끔한 베른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전체적으로 굵직굵직한 이목구비였지만, 눈매는 유순하기 짝이 없었다. 지적인 인상의 미남이었다.

자신이 헤르윈을 마음에 품지 않았다면 베른을 좋아했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베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제게 입 맞춰 주세요.”

안경 너머 베른의 금안이 흔들렸다. 그는 당황한 듯 잠시 입을 달싹였다.

“…입을 맞춰달라고 하셨습니까?”

“네. 제가 베른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기운다면 언젠가 베른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나중에는 더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혹시 첫 입맞춤이 아니신가요?”

“네, 맞습니다.”

그 누구와도 사귀어 본 적 없으니 이번이 첫 키스였다.

첫 키스만큼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가 첫 번째 상대여도 정말 괜찮으신가요?”

베른은 루시아를 배려해주고 있었다. 그녀가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알기에. 그녀의 처음을 자신이 가져가도 되는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루시아는 이미 다짐했다.

“네. 베른이 아니면 싫어요.”

베른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차갑고 큰 손이 루시아의 왼 볼을 감쌌다. 베른이 느릿하게, 그리고 루시아가 마음이 바뀌면 충분히 거절할 수 있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제게 다가오는 베른을 보며 루시아는 눈을 감았다.

이윽고 입술에 말캉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흠칫 루시아는 흠칫 떨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입 맞추고 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고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루시아의 떨림을 느낀 베른이 바로 입을 뗐다.

“괜찮으십니까?”

흔들리던 루시아의 벽안이 베른을 향했다. 그리고 입을 꾹 다물며 베른의 목에 제 팔을 감았다.

그리고 이번엔 그녀가 먼저 입을 맞췄다. 놀라던 베른은 이내 눈을 감으며 루시아가 놀라지 않게 천천히 리드했다.

서로의 입술이 조심스레 열리며 혀가 얽혔다. 서툴고 낯선 감각에 루시아의 기분은 이상했다.

어쩐지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 것만 같았다. 기분이 좋은 것 같으면서도 이상했다.

눈을 감고 느껴지는 감각에만 집중하자 저절로 헤르윈이 떠올랐다. 꼭 베른이 아니라 헤르윈과 키스하는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의 짧으면서도 깊은 입맞춤이 끝나고 그들은 서서히 멀어졌다.

저도 모르게 달아오르던 루시아는 조금 아쉬워하며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루시아.”

그때, 자신이 생각한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가 들렸고, 눈을 뜨니 앞에 보이는 것은 헤르윈이 아니라 베른이었다.

분명 헤르윈과 키스를 한 것 같았는데 현실은 달랐다. 지독하게 잔인한 현실에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흐윽…….”

속절없이 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루시아가 흐느꼈다.

“죄, 죄송해요. 제가… 제가…….”

“말하지 않아도 돼요.”

베른도 루시아와 입을 맞추며 그녀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꼈다. 베른은 조심스레 루시아를 껴안았다.

“괜찮아요, 루시아… 괜찮아.”

“으흑, 흐으으…….”

저를 토닥이는 따스한 감각에 결국 눈물샘이 고장 나 버렸다. 루시아는 베른의 품에 안겨 제 감정을 털어버렸다.

베른과의 입맞춤으로 확신했다. 자신은 영영 헤르윈을 잊지 못할 것이라는 걸.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지지 못하는 제 처지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루시아. 꼭 약속할게요. 제가 루시아를 울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건 베른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루시아와 키스하면서 셀린느를 떠올렸다.

베른은 굳게 다짐했다.

“루시아를 사랑하게 될지 아직은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꼭 행복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도…저도 마찬가지예요. 베른을 사랑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할게요.”

처음으로 베른과 루시아의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생각했다. 언젠가 결혼을 하고 대를 이어야 한다면 서로를 잘 이해해주는 이가 그 상대방이었으면 좋겠다고.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일지라도 행복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결심이었다.

그렇게 서로의 상처를 공감하고, 보듬어주는 영원한 동반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루시아는 눈물을 흘리며 베른을 꼭 껴안았다.

제 감정에 허덕이던 루시아는 헤르윈이 자신을 봤으리라곤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다.

* * *

아리스타는 친구들과 함께 헤르윈을 찾아 나섰다.

“대체 어딜 간 거지?”

애들이랑 같이 있을 때부터 그는 평소보다 이상했다.

루시아만을 애타게 찾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그제야 자신의 마음을 자각한 건가 싶어 마음이 쓰였다.

“그러게 있을 때 잘해줄 것이지.”

헤르윈의 멍청함에 혀를 내두른 아리스타는 주변을 둘러봤다.

“여긴 없나…….”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거대한 덩치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저기만 한 번 확인해 볼까.”

저 기둥 뒤로 공간이 있었던 것이 떠올라 아리스타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아무 생각 없이 기둥을 돌던 그녀는 외설스러운 광경을 목격했다.

“죄, 죄송합…….”

한 쌍의 남녀가 서로 얽혀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낯이 뜨거워지는 광경에 아리스타는 서둘러 떠나려 했으나 그녀는 제 시야에 잡힌 익숙한 얼굴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뭐야?”

한참 여성과 입맞춤을 나누던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눈을 부릅뜨고 서 있는 아리스타를 보고 몸을 움찔 떨었다.

이내 그는 아리스타가 리디아 공녀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남자는 최근에 리디아 공작에게 투자금을 받기 위해 온갖 발버둥 쳤다는 것을 떠올렸다.

어렵게 리디아 공작과의 약속을 잡았는데 그 일가인 아리스타에게 자신의 민낯을 들켰다고 생각하자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순식간에 낯이 창백해진 그는 여자를 내버려 둔 채 서둘러 도망쳤다.

하지만, 아리스타에게 그 남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박힌 사람은 바로 남자와 뜨거운 입맞춤을 나눴던 여자였다.

“하, 나 참. 설마 여기서 또 마주칠 줄이야.”

여자도 어이가 없는지 허탈한 웃음과 함께 아리스타를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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