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129)

<66화>

헤르윈이 루시아를 보기 약 20분 전.

베른과 함께 파티장에 들어선 루시아는 크리스틴과 인사를 나누던 참이었다.

“크리스틴, 첫 사업 축하해. 소소하지만 선물이야.”

크리스틴이 파티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준비한 데이지 꽃다발이었다. 당연히 크리스틴은 루시아의 꽃다발을 받으며 무척이나 기뻐했다.

“앞으로 사업이 번창하도록 기원할게.”

“정말, 고맙습니다, 루시아! 감동이에요.”

“새로운 사업 축하드립니다, 디오레스 영애. 다음엔 저희와도 얘기를 나누는 건 어떠신가요?”

“후작님이라면 언제든지 괜찮습니다. 편한 시간에 연락 주세요.”

짧은 인사를 마친 크리스틴은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옮겼다.

“좋은 친구분을 두셨군요. 저 나이에 벌써 이런 규모의 사업이라니. 대단합니다.”

“크리스틴이 대단하긴 하죠. 아카데미 시절부터 자신의 사업을 운영하는 것이 꿈이었거든요.”

저 멀리 여러 사람들을 상대하는 크리스틴의 모습에서 후광이 비치는 느낌이었다.

“이거 루시아에게 더 잘해야겠군요. 그래야 친구분께서 저를 더 잘 봐주시겠죠?”

“하하, 그러시지 않아도 베른이 이미 일궈놓은 것이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크리스틴처럼 사업을 진행 중인 베른이 좋은 거래처를 얻은 것 같다며 기뻐했다.

어쩐지 조금 들떠 보이는 베른을 보며 루시아는 저택을 떠나기 전, 루카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녀석에게는 결혼 직전까지 갔던 애인이 있다고!’

애인이라. 과연 자신이 생각한 대로 셀린느 르마리오 자작부인과 과거에 연인이었던 건가.

묻고 싶었다.

루시아가 뚫어져라 쳐다보자 베른이 싱긋 웃었다.

“제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루시아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지금은 적절한 타이밍이 아니었다. 게다가 베른 역시 자신과 헤르윈 사이에 있는 소문을 뻔히 알면서도 단 한 번도 그에 대해 물어본 적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도 기다리자.’

그도 자신처럼 나름의 준비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니면 정말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기에 말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자신을 묵묵히 기다려준 그에게 이 정도의 배려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저쪽으로 갈까요? 저기에 제 친구들이…….”

친구들을 발견했는지 베른이 웃는 얼굴로 걸음을 옮기다가 돌연 멈춰 섰다.

그의 팔에 손을 올리고 있던 루시아도 덩달아 멈췄다.

“왜 그러시는…….”

베른을 올려다보던 루시아는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발견했다. 늘 웃는 얼굴이었던 그의 얼굴에 금이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시선에 따라 고개를 돌리니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셀린느 르마리오.’

타피티에서 몇 번 본, 르마리오 자작부인이 바로 근처에 있었다.

그녀 역시 베른을 발견하곤 얼어붙었다. 그녀의 녹안이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베른.”

셀린느가 한 발짝 다가오자 루시아가 느낄 정도로 베른이 몸을 흠칫 떨었다.

베른의 낯이 창백해짐과 동시에 그의 얼굴에서 절망, 불안, 초조와 같은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늘 건조하기만 했던 그의 눈동자에 아주 옅은 빛이 새겨들었다.

지금의 그의 모습은 마치 베른과 함께 처음 헤르윈을 마주했을 때의 자신과 비슷했다.

그가 가만히 멈춰서서 아무것도 못하자 루시아가 은근슬쩍 베른의 앞쪽으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르마리오 자작부인. 여기서 뵙네요.”

“아…….”

셀린느는 그제야 루시아를 발견했는지 탄식을 흘렸다. 이내 그녀의 시선에 베른과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루시아의 손이 시선에 들어왔다.

“혹시 자작부인께서도 초대를 받고 오신 걸까요?”

“아, 네, 네. 맞습니다. 남편이 해외로 출장을 가서 대신 참석했습니다.”

남편이라는 말에 베른의 팔이 잘게 떨렸다. 루시아는 그것을 알아채고 베른을 붙잡은 제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군요. 저도 친구가 주최한 파티라 약혼자와 함께 참석했답니다.”

“약혼자 말입니까……?”

“예. 저번에 몇 번 뵀으니 아시죠? 후작님과 약혼을 기약한 사이라는 거.”

“하지만, 아직 약혼은 안 하셨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조만간 할 것 같습니다. 그렇죠, 베른?”

베른을 부르며 그의 팔을 잡아당기자 그제야 정신 차린 베른이 루시아를 내려다봤다.

“네. 그렇죠.”

애써 웃으려고 하는 것이 보였지만, 상당히 버거운 모양이었다. 베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디 불편해요, 베른? 얼굴색이 별로 안 좋네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식은땀을 흘리고 계시잖아요. 아무래도 잠시 쉬어야겠어요.”

루시아는 손수건으로 베른의 식은땀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셀린느가 듣지 못할 정도의 크기로 그에게 속삭였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으시면 저를 따라오세요.”

베른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루시아를 쳐다봤다.

다정한 말투와 손짓과 다르게 푸른 벽안은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베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는 손수건을 거두며 셀린느를 돌아봤다.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아무래도 약혼자 상태가 별로 좋지 않네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셀린느가 미처 붙잡기 전에 루시아는 서둘러 베른의 팔을 붙잡고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저, 루시아…….”

“대화는 조금 있다가 해요. 아직 뒤에서 저희를 지켜보고 있어요.”

눈앞에 보이는 갈색 정수리를 보며 베른은 입을 꾹 다물었다. 황녀 약혼식 때와는 상황이 정반대였다.

침착한 루시아의 태도와 자신을 구해주는 행동을 보고 있자면-

“이곳까지 따라오지는 않겠죠.”

루시아가 분수대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베른을 붙잡으며 뒤를 기웃거렸다.

역시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됐어요. 안심해도 될 것 같아요.”

“루시아.”

“네?”

밝은 얼굴로 베른을 올려다보던 루시아는 멈칫했다. 그리고 베른처럼 서서히 얼굴을 진지하게 굳혔다.

“혹시 다 알고 계신 겁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베른이 입을 달싹이며 마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모습을 보고 루시아는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저 흘러가는 상황과 저번에 베른이 제게 했던 말을 통해 지레짐작할 뿐이에요.”

베른의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그는 미안함과 죄책감이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저 베른이 준비가 됐을 때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돼버렸네요.”

루시아가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말간 눈동자로 베른을 쳐다봤다. 벽안에 베른의 얼굴이 고스란히 비쳤다.

“괜찮다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베른은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 분수대에 걸터앉았다. 루시아도 그의 옆에 앉아 그가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기다렸다.

“어디까지 알고 계신 겁니까?”

“음. 일단 르마리오 자작부인이 베른을 열렬히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어요. 티파티에서 몇 번 자작부인을 마주하다 보니 눈에 보이더라고요. 아, 그리고 베른에게 결혼을 기약했던 애인이 있었다는 것도요.”

“티파티에서 자주 만났다고요?”

“네. 처음 만났을 때 저보고 베른과 약혼한 것이 맞냐고 물어봤거든요.”

베른이 입을 달싹이다가 옅은 한숨과 함께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결혼을 기약했다던 애인이 르마리오 자작부인이었던 거죠?”

“……네, 맞습니다.”

베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는 과거를 회상하며 씁쓸한 얼굴을 보였다. 늘 웃는 낯만 보여주던 그가 드디어 가면을 벗었다.

“셀린느와는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아… 그게 아니라 자작부인과…….”

저도 모르게 셀린느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자 베른이 당황했다. 어쩔 줄 모르는 그를 보고 루시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괜찮으니 편히 말씀하세요.”

베른은 루시아의 눈치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아카데미 1학년 2학기 때였습니다. 저는 책 읽는 것을 좋아했기에 도서관에 자주 가곤 했죠.”

전에 그가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안 나온 적도 있다고 말한 적 있었다.

“거기서 셀린느를 처음 봤습니다. 우연히도 마주친 것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고, 다섯 번이 되자 누구 할 것 없이 자연스레 말을 트게 되었죠.”

셀린느가 한 살 더 나이가 많았지만 취향도, 취미도 모두 같았기에 순식간에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제2 도서관에서 비밀의 방을 발견했다.

‘어머, 이런 곳에 방이 다 있다니 너무 신기해!’

‘여기에는 고서도 몇 개 있는데?’

비록 크기는 작지만, 모든 것을 갖추었기에 비밀의 방을 두 사람만의 아지트로 정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곳을 자주 들락거렸다.

“셀린느와 사랑에 빠진 것은 필연적이었죠.”

두 사람은 자연스레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베른이 2학년, 셀린느가 졸업반이 되었을 때 두 사람은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했다.

“제 친구들은 축하한다며 응원해주었지만, 아니꼽게 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셀린느는 남작가 여식이었거든요.”

후작 영식과 남작 영애의 사랑. 같은 귀족이긴 하지만 그 간극은 너무나도 컸다.

그들의 사랑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사람들은 물론, 머지않아 헤어질 것이라고 떠드는 이들도 존재했다.

주변의 숱한 음해와 수군거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더더욱 사랑을 키워내며 연인관계를 이어갔다.

“그런데 어쩌다가 자작부인께서 지금의 르마리오 자작과 결혼을 하신 거죠?”

미칠 듯이 서로를 사랑한 두 사람은 지금 다른 사람 곁에 서 있었다.

루시아 눈엔 그들이 아직도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부모님의 반대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제아무리 사랑한다고 한들 신분의 격차는 좁힐 수 없었다.

오랜 역사와 명성을 자랑하는 캐스퍼 후작가에선 당연히 셀린느의 가문인 제인슨 남작가를 좋게 보지 않았다.

자작 가문도 아니고 남작 가문. 게다가 제인슨 남작은 사교계에서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다.

여색을 밝히는 건 물론, 재산을 도박으로 탕진했으며, 귀족의 품격이라고는 조금도 갖추지 않은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남작 부부와 만남을 가졌던 선대 후작은 그들을 보자마자 진저리를 내며 불같이 화를 냈다.

‘저런 귀족 같지도 않은 것들과 결혼을 한다니! 나는 절대 인정 못 한다!’

이미 베른과 셀린느는 결혼을 기약한 상태였다. 그러나 주변에선 그들을 도와주질 않았다.

캐스퍼 후작은 천박한 제인슨 가문을 인정하지 않았고, 딸이 후작가를 물어왔다는 소식에 기뻐하던 제인슨 남작은 결혼이 진행되질 않자 셀린느를 몰아붙였다.

‘왜 결혼을 하지 않는 게야! 후작가를 물어 와서 드디어 딸 노릇을 하나 했더니 영 엉터리구나!’

‘무조건 바짓자락을 물고 늘어지란 말이야! 아니면 그놈 아이라도 배! 그러면 그쪽도 어쩔 수 없이 너를 받아주겠지!’

‘캐스퍼 후작과 사돈이 되는 줄 알고 사채를 끌어다 썼다. 그런데 기어코 결혼을 파토 내다니! 우리보고 어떻게 다 갚으라는 게야! 이건 전부 네 탓이니 네가 갚거라!’

살면서 단 한 번도 셀린느에게 좋은 아비였던 적 없는 제인슨 남작은 셀린느가 결혼할 것이라 철석같이 믿곤 온갖 사채를 끌어다 썼다.

하지만, 결혼이 무효로 돌아가 사채를 갚을 길이 없어지자 그 화살을 전부 셀린느에게 돌렸다.

도저히 셀린느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돈이었다.

결국 빚 독촉을 받고, 저택까지 경매로 넘어가게 된 제인슨 자작은 셀린느의 의사도 없이 르마리오 자작과의 결혼을 추진했다.

제 딸을 40이 훌쩍 넘은 자작에게 팔아넘긴 것이다.

누가 들어도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루시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제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베른이 결국 눈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이 얼룩져 있었다.

아무리 설득해도 부모님은 제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혼자서 어떻게든 그녀를 도우려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사랑하는 여인은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영영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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