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흐음, 파티라.”
“이번엔 규모가 꽤 크답니다. 루시아, 꼭 올 거죠?”
루시아는 크리스틴이 준 초대장을 요리조리 살피다가 씩 웃었다.
“물론이지. 네 사업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자리잖아. 베른이랑 같이 갈게. 괜찮지?”
“그럼요! 당연하죠! 캐스퍼 후작저로 초대장을 하나 더 보내야겠네요!”
“호오, 가면 아름다운 여인들을 많이 볼 수 있겠군?”
브라이언의 말을 듣고 크리스틴이 입을 삐쭉이며 그를 쳐다봤다.
“아직도 머릿속에 여자밖에 없어요? 언제쯤 철들려고 그러세요?”
“아리따운 여인들이 나를 가만두지 못하는데 어쩌겠어. 이래서 잘생긴 사람은 죄인이라니까.”
“에휴, 당신이랑 결혼할 사람이 불쌍하군요.”
여전히 티격태격 사이 나쁜 크리스틴과 브라이언을 보고 루시아가 말간 웃음을 터트렸다.
루시아는 오랜만에 크리스틴의 초대를 받아 그녀의 집에 방문했다. 친한 사람만 초대했는지 방문객은 자신과 브라이언뿐이었다.
“브라이언, 너도 이제 슬슬 정착해야 하지 않겠어?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잖아.”
“루시아, 너까지 그런 소리 하기야?”
“잘 새겨들으세요. 루시아도 오죽하면 말했겠어요.”
크리스틴이 한술 더 뜨자 브라이언이 탐탁잖은 얼굴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차피 아버지가 정해준 여자랑 살게 될 텐데 이 정도 일탈은 괜찮잖아.”
브라이언이 잘생긴 얼굴을 잔뜩 굳힌 채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부담감이 느껴졌다.
“설마 아직도 아버지께서 강압적으로 구시나요?”
크리스틴도 심상찮음을 느끼고 인상을 찌푸리자 브라이언이 그녀를 흘긋 쳐다봤다.
“그 인간이야 늘 그렇지. 그나마 둘째라 다행이야. 형에 비하면 조금 자유롭지. 뭐, 형은 그 인간 판박이라 별로 상관없어 보이지만.”
브라이언은 대대로 기사였던 체르시스 백작가의 차남이었다.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그는 엄한 아버지 밑에서 억압받으며 자라와 제 아버지와 가문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그는 늘 아버지가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려고 했다.
‘여성 편력도 거기서 나온 건가?’
여자를 좋아하고, 자주 애인이 바뀌긴 하지만, 추문을 일으키거나 방탕하게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 나름대로의 철칙과 일정한 선을 지키고 사는 편이다.
오히려 자유로워 보이는 모습에 접근했던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들었다.
“그래도 너희 말대로 슬슬 이런 생활은 청산해야 하나…….”
“그래요. 그러는 편이 좋을 거예요. 나중에 맞이할 약혼녀께서 당신을 오해하면 어떡합니까?”
“당연히 약혼자와는 잘 지내야지. 그 인간이 잘못한 거지, 약혼녀에겐 잘못이 없으니까.”
역시 그 나름의 반듯한 모습이 보여 루시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지 말고 우리 둘이 약혼할까? 부모님도 서로 아는 사이이니 한번 얘기해보면…….”
반듯하다 생각하기 무섭게 브라이언이 크리스틴에게 능글맞게 속삭였다.
그러자 크리스틴은 경멸 어린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노려봤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요.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시죠.”
“농담이라니. 나는 진심인데. 내 마음을 몰라줘서 너무 슬픈걸?”
브라이언이 일부러 우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크리스틴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면서도 흘긋 브라이언을 쳐다봤다.
평소와 같은 두 사람의 대화를 멀거니 지켜보던 루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브라이언이 크리스틴을 좋아하나?’
생각해보면 브라이언은 가끔씩 크리스틴에게 저런 말을 내뱉곤 했던 것 같다.
사귀자는 것도 아니고, 왜 하필 약혼을 하자고 말하는 걸까?
‘브라이언은 나를 안 좋아해. 나는 브라이언이랑 결혼하고 싶은데 브라이언은 약혼 얘기만 나와도 피한다고.’
언제 한 번 우연히 브라이언의 전 애인을 마주쳤을 때, 그 사람이 울면서 했던 말이었다.
정작 제 애인들에게는 절대 약혼이나 결혼이라는 말은 꺼내지 않는 것 같은데.
루시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브라이언을 지그시 쳐다보자 크리스틴과 장난치던 브라이언이 고개를 돌렸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퍼뜩 상념에서 빠져나온 루시아는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아, 맞다. 브라이언, 내일 페네우스 저택에 볼일이 있다고 하셨죠?”
크리스틴이 페네우스 공작가를 입에 올리자 루시아의 손이 움찔 떨렸다.
“직접 만나서 초대장을 주고 싶었는데 연락이 닿질 않더군요. 내일 이 초대장을 전해주시겠어요?”
“그래. 알겠어. 헤르윈한테 내가 전해줄게.”
브라이언은 초대장 하나를 더 받으며 품에 넣었다.
“안 그래도 나도 연락이 영 안 돼서 직접 가려고 한 거였거든. 네 연락도 안 받다니 무슨 일 있나?”
“글쎄요. 평소에도 잘 되는 편은 아니었지만… 바쁜 일이라도 있는 거 아닐까요?”
“이 시기에 바쁜 일은 없을 텐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루시아는 헤르윈을 떠올렸다.
헤르윈에 대한 마음을 접기로 다짐한 날로부터 그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따로 연락한 적은 없었다.
‘……저번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자신을 집으로 데려다줄 때까지만 해도 그의 상태는 양호해 보였다.
‘물론, 헤어질 때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지만.’
설마, 자신과 나눴던 대화 때문에 그런 건가 잠깐 생각했지만, 그도 잠시 루시아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 없지.’
너무 자의식 과잉 아닌가. 루시아는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 * *
“뭐? 지금 어딜 간다고?”
“내가 말했잖아. 오늘 크리스틴이 파티를 연다고.”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치장 중이던 루시아는 갑자기 들이닥친 루카스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며칠 내내 집에 들어오지 않았으면서 왜 이제 와서 난리인지.
‘아니, 내가 파티를 참석하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오빠도 가고 싶으면 가던가.”
“그게 아니라. 너 지금 후작이랑 같이 간다며!”
화내는 포인트가 그거였나.
루시아는 눈에 훤히 보이는 루카스의 감정에 질색했다.
“그럼, 베른이랑 가지 누구랑 가겠어.”
“그 녀석은 안 돼! 당장 그만둬! 차라리 나랑 같이 가!”
“싫어. 좀 있으면 베른 올 거야. 거추장스럽게 있지 말고 저리 비켜.”
얼추 치장이 끝난 루시아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착용할 액세서리를 살폈다.
태연한 루시아를 보고 루카스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됐으니까 내 말 들어. 후작은 절대 안 된다니까?”
루카스가 또 같은 말을 하자 루시아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그제야 루카스를 돌아봤다.
“왜 안 된다는 건데. 혹시 베른이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을 할 거면…….”
“그 녀석에게는 결혼 직전까지 갔던 애인이 있다고!”
루카스의 말을 듣고 루시아가 멈칫했다. 남매 사이의 묘한 기류를 보고 하녀들이 눈치를 봤다.
“잠깐, 모두 나가 있어.”
하녀들을 밖으로 내보낸 루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루카스를 쳐다봤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네게 바로 알려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미처 말하지 못했어.”
베키에게 베른의 일을 전해 들은 날에 곧바로 루시아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려 했다. 하지만 산더미처럼 쌓인 일이 저를 붙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저택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캐스퍼 후작은 학창 시절부터 쭉 사귀어온 여자가 한 명 있어. 가문은 한미하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을 만큼 서로 사랑하고 결혼까지 약속했던 사이였다는 군.”
루카스의 말을 듣고 문득 셀린느 르마리오가 떠올랐다.
“그 여자랑 헤어진 직후, 캐스퍼 후작은 1년 동안 집에서 일절 나오지 않았어! 실연 때문에 그랬던 게 분명해!”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인데?”
“무슨 상관이긴! 만약 그 여자가 돌아오면 흔들릴 게 뻔하잖아!”
루시아의 손이 움찔 떨렸다.
“만약 너랑 이대로 약혼하고 결혼까지 한 상태에서 그 여자가 돌아온다면 캐스퍼 후작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법 있어? 결혼까지 약속했던 사이인데?”
일리 있었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베른은 흔들릴 것이 분명했다.
미친 듯이 사랑했던 전 애인에 비하면 자신은 감정이라곤 없는 정략혼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그게 다야?”
“루시아. 그게 다라니. 이게 얼마나 큰일인데!”
“오빠. 살면서 첫사랑 없는 사람 없고, 누구나 여러 사람과 사랑하다 헤어지기를 반복해. 그건 오빠도 마찬가지잖아. 지금 오빠가 사귀고 있는 사람은 몇 번째 애인이야?”
“나랑은 다르지! 나도 애인들을 사랑하긴 했지만, 캐스퍼 후작 정도는 아니었다고.”
“뭐, 확실히 오빠 말을 들어보면 베른이 전에 사귀었던 사람이랑 각별한 사이인 것 같네. 하지만, 그런 거라면 나도 똑같아.”
“네가 왜 똑같…….”
루카스가 말을 마저 잇지 못하고 눈을 서서히 키웠다.
“비록 사귀지는 않았어도 헤르윈을 오랫동안 사랑해왔고, 아직도 그 마음을 접지 못했어. 헤르윈이 지금이라도 내게 결혼하자고 제안한다면 흔들릴 게 뻔해. 나도 베른과 다를 바 없잖아.”
루카스가 입을 뻐끔거렸다. 너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말하고 싶어도 슬픔에 젖어 든 벽안을 보면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오빠가 생각하는 일은 안 생길 거야. 베른의 전 애인이라는 사람, 이미 결혼했거든.”
“뭐?!”
“그건 미처 몰랐던 모양이네.”
루시아는 주섬주섬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넌 이 사실을 알고 있었어?”
“정확한 건 아니지만, 대충. 티파티에서 그 여자를 몇 번 봤거든.”
“넌 그걸 알면서도…….”
“정략혼이라는 게 원래 다 그렇잖아?”
루시아가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베른이라면 나를 두고 바람피우는 짓은 안 할 거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베른과 약혼할 것이라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다짐한 것이었다. 베른에게 물어보진 못했지만, 아마 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가씨, 후작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하녀의 목소리를 듣고 루시아는 문을 열었다.
“베른이 왔으니 나는 이만 가볼게. 초대장은 더 있으니까 오빠도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
제게서 멀어지는 동생을 루카스는 미처 붙잡을 수 없었다.
루시아의 말대로 베른이 과거에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다. 그저 1년간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할 정도로 사랑하는 전 애인이 있었다는 것 뿐.
하지만, 루카스에겐 그 사실이 탐탁잖았다.
정략혼이라 하여도 루시아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났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다.
“……제기랄!”
방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욕지거리를 들으면서도 루시아는 꿋꿋이 정문으로 향했다.
베른이 있었다.
“오늘도 아름답습니다. 루시아.”
언제나 그렇듯 단정한 차림새와 예의를 갖춘 인사였다. 루시아는 말없이 그의 손에 제 손을 올렸다.
아름답다는 말이 빈말처럼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랑에 빠진 것 같지는 않았다.
베른의 눈매는 부드럽게 휘어져 있을 뿐, 그 안에 자리 잡은 금안은 건조하기만 했다.
“당신도 멋있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겠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니 당연하다.
루시아는 베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맞은편에 앉은 베른이 저를 향해 싱긋 웃어주자 루시아도 그에 따라 미소를 지었다.
문득 과거에 베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나랑 비슷하다고 했던 이유도 이런 것 때문일까?’
헤르윈을 오랫동안 사랑해온 자신과, 죽도록 사랑한 애인이 있었음에도 그녀와 이어지지 못한 베른.
어쩌면 그와 자신. 사랑을 이루지 못한 점에선 닮았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