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129)

<63화>

“그래. 약혼해.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헤르윈이 말끝을 흐렸지만, 헨리에게 지금 그것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오늘 누나가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누나가 다른 남자와 약혼하는 꼴을 봤을 거야! 대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헤르윈은 어릴 적부터 헨리가 유독 루시아를 좋아했던 것을 떠올렸다.

“너 설마, 아직도 루시아를 좋아해?”

“그래! 좋아해! 나한테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니까!”

헨리가 루시아에게 가진 감정은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그에 헤르윈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형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누나 안 붙잡을 거야?”

하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말에 헤르윈은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러다가 누나가 다른 남자한테 갈지도 모른다고! 결혼도 하겠지!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래?!”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무슨 말이긴! 당장 나가서……!”

소리를 지르던 헨리는 어리둥절한 헤르윈의 표정을 보고 뚝 멈춰 섰다.

이내 그는 루시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헤르윈은 나를 안 좋아해.’

헨리의 얼굴에 서서히 경악이 떠오르다가 이내 경멸 어린 시선으로 헤르윈을 내려다봤다.

“……형. 누나 안 좋아해?”

헤르윈이 짐짓 얼굴을 굳히다가 헨리의 시선을 피했다.

“나는…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어.”

욱신-

본인이 뱉은 말임에도 왠지 모르게 가슴이 무거웠다. 가슴께에 뭉근한 고통이 느껴지자 헤르윈은 의아했다.

헤르윈 입에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말이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헨리는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그러고 보니 누나가 좋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 없었지…….”

헨리가 낮게 읊조렸다. 그래, 헤르윈은 지금까지 루시아가 좋다는 말을 한 적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같이 있을 때의 모습을 보면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그래서-

“내가 왜 누나를 포기했는데…….”

허탈함에 이어 분노가 밀려왔다. 헨리가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설마 그 얘기를 루시아 누나 앞에서도 한 건 아니지?”

헤르윈이 눈을 마주치지 못하자 헨리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헨리는 헛웃음과 함께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헤르윈을 쳐다봤다.

“내가 무슨 심정으로 누나를 포기했는지 형은 모르지?”

헤르윈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난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누나를 좋아해 왔어. 하지만, 형이랑 누나가 서로 좋아하는 줄 알고 누나를 포기했다고! 형이라면 누나가 전혀 아깝지 않으니까… 그런데 괜한 헛짓거리를 했네.”

“너, 분명 루시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래, 포기하려 했지. 그런데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되겠다. 형은 형이 좋아한다는 그 사람이랑 평생 잘해봐. 나는 누나가 다른 남자랑 약혼하는 꼴 절대 못 봐.”

모진 말을 내뱉고 헨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누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했으면서.’

헤르윈 얼굴에 미약한 절망감이 내려앉았다.

저 얼굴이 어떻게 그저 친구를 향한 얼굴이겠는가. 누가 보더라도 좋아하는 사람을 빼앗기는 모양새였다.

그의 심정이 얼굴에 훤히 드러나 있는데도 그는 정작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았다.

‘흥! 혼자 속앓이해보라지.’

마차는 떠났다. 이후의 일은 혼자 알아서 해결해야 할 것이다.

혼란스러워하는 헤르윈을 두고 떠나려던 헨리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누나 약혼하는 거 부모님도 아셔?”

“아니.”

“어쩐지. 아셨다면 이대로 계실 분들이 아니지.”

눈에 훤하다며 헨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두 사람은 헤르윈이 아카데미를 졸업한 시점부터 그와 루시아의 약혼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아시면 뒤집어 지시겠네.”

수도까지 한달음에 내려오실 부모님을 생각하니 쌤통이었다.

헨리가 떠나자 헤르윈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내가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루시아에게 자신과 약혼하자고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날 좋아하지 않잖아.’

그래, 루시아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아리스타다.

‘나랑 결혼해줄 거 아니잖아.’

그녀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섣불리 결혼을 했다간 루시아가 제 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리고 자신에게서 멀어질 것이다.

루시아가 이제 저를 보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무거워졌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궁을 걷는 기분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결국 헤르윈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눈을 감았다. 칠흑처럼 어두운 곳에 덜렁 남겨진 기분이었다.

* * *

“하아… 어머니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요?”

“어머, 얘는. 지금부터 시작인데 그리 약한 소리 하면 어떡하니? 여기 다른 옷들도 좀 들고 와 보게.”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 옷을 고르러 온 것인데 저보다 더 신난 어머니를 보고 아리스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요즘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계속 연무장에 틀어박혀 있었더니 어머니가 자기는 딸이 있어도 딸이 없는 것 같다며 눈물을 보이셨다. 결국 아리스타는 하는 수 없이 그녀에게 이끌려 나왔다.

제 어머니의 눈물에 약해 오늘 하루만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있을 생각이었는데 얼마 있지 않아 후회가 밀려왔다.

벌써 다섯여 벌의 옷을 갈아입은 아리스타는 뚱한 얼굴로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제 어머니를 쳐다봤다.

“세상에! 너무 예쁘구나, 우리 딸! 누구 딸인지 꼭 천사 같네.”

“그 얘기 방금 전에도 하셨어요.”

“호호호, 어머 그랬나? 아! 아리스타, 이것도 한번 입어보렴. 너와 무척이나 잘 어울릴 것 같구나.”

행거에 끝없이 걸려있는 옷들을 보고 아리스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리스타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며 핑곗거리를 댔다.

“저 잠깐 화장실만 다녀오고요.”

“그래. 얼른 와야 한다?”

공작부인은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물론 도망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무시무시한 말과 함께.

도망칠 생각을 했던 아리스타는 어깨를 좁히며 조금은 트인 숨통을 만끽했다.

“하아. 지금 몇 시지?”

이곳에 들어온 지 고작 30분밖에 되지 않았다. 어머니와 쇼핑하면 기본 2시간이었다. 괴로운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것을 깨닫고 아리스타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장실 먼저 갔다 오자.”

아리스타는 힘없는 걸음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최대한 느릿느릿 움직이던 아리스타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귀를 쫑긋 세웠다.

“자기야, 그래서 르마리오 자작부인이 과거에는 그 사람과 사귀던 사이였다고?”

“그렇다니까. 확실해. 알 만한 사람은 알던 일이었거든.”

일부러 간드러지게 꾸민 이 목소리는 분명 루카스의 연인인 베키의 목소리였다.

혹 루카스가 이곳에 있는 건 아닌가 싶어 아리스타는 걸음을 돌려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흐음, 그렇구나. 고마워! 자기야! 역시 자기밖에 없다니까?”

“그렇게 고마우면… 오늘 밤에 어때?”

“아잉, 자기도 참. 여기서 그런 말 하면 안 돼.”

외설적인 대화에 아리스타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문득 그녀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베키와 대화를 나누는 상대의 목소리가 상당히 낯설었다. 아무리 루카스가 목소리를 꾸민다고 해도 전혀 톤이 달랐다.

‘설마…….’

아리스타가 인상을 찌푸리며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에 들어갔다.

루카스 품에서 제게 날 선 시선을 보냈던 베키가 이번엔 웬 모르는 남자 품에 안겨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현재 상황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아리스타가 얼어붙었다.

문가에 사람이 서 있다는 걸 눈치챈 베키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아리스타를 발견한 베키가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한편 베키와 같이 있던 남자는 아리스타를 위아래로 훑어보곤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선객이 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방을 착각했네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혹시 길을 잃으셨다면 안내라도 해드릴…….”

남자가 뱀처럼 기분 나쁜 시선으로 쳐다보자 아리스타는 도도하게 얼굴을 굳히며 오만하게 두 사람을 내려다봤다.

“됐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는 것 같은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아리스타가 떠나자 남자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얼굴은 예쁜데 성격이 별로네. 물론, 우리 자기가 더 예쁜 거 알지?”

아리스타가 떠난 자리만 노려보고 있던 베키가 퍼뜩 정신 차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 어어 그렇지. 내가 더 예쁘지.”

“더 궁금한 건 없어?”

“응. 그거면 충분해. 고마워.”

혼란스러워하던 베키는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남자가 그녀를 허리를 슬슬 만지며 속삭였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그런데 아그네스 영식은 대체 그런 게 왜 궁금하대?”

“여동생이 캐스퍼 후작과 약혼한다니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모양이야.”

“흐음, 그렇군. 그거라면 왜 알아보려고 하는 건지 이해는 되네.”

남자가 이제는 자기랑 놀아달라며 지분거리자 베키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남자의 목에 매달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방금 전, 마주친 아리스타를 떠올렸다.

‘혹시 루카스한테 말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전에 딱 한 번만 마주쳤으니 자기를 기억 못할 수도 있다.

자신을 보고도 동요도 하지 않은 걸 봐선 분명 기억 못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리스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을 거라 안심한 베키는 곧이어 아리스타를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 * *

“……내가 알아 온 정보는 여기까지야.”

아리스타가 마주친 날로부터 며칠 뒤, 베키는 루카스의 집무실에 찾아가 자신이 알아 온 정보를 낱낱이 고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루카스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더니, 베키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노에 찬 표정을 지었다.

오싹함을 느낀 베키가 루카스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자기야, 화났어?”

“응? 아아…아니야. 그냥 조금 놀라서 그랬어. 고마워, 베키. 네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알아내지 못했을 거야.”

“아니야, 이 정도는 뭘.”

루카스가 볼에 짧은 뽀뽀를 남기자 베키가 간드러지게 웃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동생에게 알리기라도 할 거야?”

“당연하지. 동생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텐데 당장 알려줘야지. 이대로 약혼이라도 파기하면 좋을…….”

중얼거리는 루카스를 보고 베키는 씩 웃었다.

‘동생 바보라더니.’

사귀기 전부터 루카스에 대한 소문은 익히 전해 들었다.

워낙 가족애가 강한 사람이라 조금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었다.

왜 그동안 여자들에게 차여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고 사랑해주는 루카스를 찬 여자들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남자를 어디서 구한다고.’

차기 백작부인은 따 놓은 당상인 데다가 모든 것을 퍼줄 것처럼 사랑해주는 남자는 어디 가서도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건 별개의 일이었다.

애초에 자신의 바람기는 스스로도 제어가 안 됐다. 오로지 한 사람만 보고, 사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도 않았다.

‘잘 숨기면 돼.’

모든 사실이 밝혀지는 것보다 그 편이 루카스에게도 좋지 않은가.

“오라버니, 안에 있어?”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아리스타가 나타났다. 승리의 미소를 짓던 베키가 아리스타를 보자 몸을 흠칫 떨었다.

그건 안으로 들어오려던 아리스타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멈칫하던 아리스타는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아리스타, 여긴 어쩐 일이야?”

“잠깐 볼일이 있어서. 이것 좀 봐줄 수 있어?”

“음, 어디 보자…….”

루카스가 아리스타가 건넨 서류를 확인하고 있을 때, 베키는 입술을 짓이기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나를 알아볼까?’

초조해진 베키는 아리스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지만, 아리스타는 베키에게 조금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이건 내가 따로 처리해줄게. 수고했어.”

“응, 알겠어. 난 이만 가 볼게.”

“그래, 잘 가.”

하지만 우려했던 것과 달리 아리스타는 그날 있었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기억 못하는 건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아 베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베키, 괜찮아? 안색이 안 좋아.”

“응, 괜찮아! 자기 일 언제 끝나?”

“음… 조금 걸릴 것 같은데.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그러면 내가 얼른 끝낼게.”

“정말? 그럼 자기만 믿을게!”

꺄르르

집무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아리스타는 닫힌 문을 쳐다봤다.

한참을 서늘한 눈으로 보던 아리스타는 비웃음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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