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129)

<48화>

“저게 무슨……!”

루카스가 와인잔을 든 손을 부들부들 떨며 경악 가득한 표정으로 저 멀리 보이는 루시아를 쳐다봤다.

아무리 두 눈을 비벼 봐도 자신의 사랑스럽고, 귀엽기 짝이 없는 여동생이 웬 남자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자기야, 왜 그래?”

루카스의 상태가 이상하자 그의 연인인 베키가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잠깐 이상한 걸 봐서.”

“그래?”

베키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카스는 웃는 얼굴로 베키와 대화를 나누다가도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루시아에 대해 생각했다.

남자? 루시아에게 남자? 저 녀석은 대체 뭐지? 뭐 하는 녀석이길래 내 동생이랑 사이좋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거야?

온갖 잡생각에 빠져들던 루카스는 결국 참다못해 베키에게 양해를 구했다.

“나 잠깐만 아레스 좀 만나고 올게. 여기서 기다려.”

“응, 알겠어. 빨리 와야 돼.”

베키에게 짧은 볼 키스를 받은 루카스는 아레스를 핑계로 루시아를 찾아 나섰다.

분명 방금 전까지 이곳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덧 루시아가 사라지고 없었다.

“제기랄, 대체 어딜 간 거야?”

“그러는 너야말로 누굴 찾아?”

바로 귓가에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루카스가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뒤를 돌아보니 절친한 친우이자, 직장상사인 아레스가 보였다.

그는 오늘 약혼식의 주인공인 만큼 상당히 멋들어지게 꾸민 상태였다.

“뭐야, 너 왜 여깄어. 황녀 전하는?”

“좀 있다가 나타날 거야. 파티의 주인공은 늦게 나타나는 법이잖아?”

“아, 그러셔.”

짜게 식은 눈으로 아레스를 보던 루카스는 바로 주위를 살폈다.

“전 애인이라도 본 거야?”

“그런 게 아니라…! 하아, 루시아가 어떤 남자랑 같이 있는 것 같더라고. 너 혹시 루시아 본 적 없어?”

“응, 방금 전에 봤는데?”

“그래, 못 봤다… 아니, 봤다고? 어디?”

“저기 있잖아.”

아레스가 가리키는 곳을 보자 그곳엔 루시아가 있었다. 동생을 보고 루카스의 얼굴이 환해지다가 그 옆에 있는 베른을 발견하곤 확 굳어버렸다.

“확실히 누구랑 같이 있네. 저리 가까운 걸 봐서는 친구는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지금 당장 쫓아가서……!”

루카스가 뛰쳐나가기 전에 아레스가 그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자, 진정 좀 해. 무작정 가서 뭘 어쩔 건데?”

“어쩌긴 뭘 어째. 일단 무슨 자격으로 우리 루시아 옆에 있는지 물어야지. 그리고 오빠로서 이상한 놈인지 아닌지 살펴봐야 할 것 아냐!”

“적어도 이상한 놈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흥분 좀 가라앉히고 자세히 봐봐. 너도 잘 알고 있는 얼굴이야.”

아레스가 루카스를 진정시키고 베른을 가리켰다. 흥분을 가라앉힌 루카스는 그제야 베른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캐스퍼 후작?”

“그래. 우리도 몇 번 본 적 있잖아.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오히려 마음에 든다고 네가 저번에 그러지 않았던가?”

예전에 베른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루카스는 그 당시 그를 좋게 보았던 사실을 떠올렸다.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지만, 도대체 그가 왜 루시아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뭐 이리 소란스럽나 했더니.”

혀 차는 소리와 함께 탐탁잖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요한과 줄리안이 있었다.

반년 만에 보는 부모님에게 루카스는 인사 대신 멀리 있는 루시아를 가리켰다.

“어머니, 아버지! 대체 저게 어떻게 된 겁니까? 루시아가 왜 캐스퍼 후작이랑 있는 거예요?”

“몇 주 전에 루시아가 후작이랑 선을 봤단다.”

“네?”

“곧 후작과 약혼할 테니 그리 알거라.”

“네에?!”

줄리안에 이어 요한의 말까지 들은 루카스가 기겁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자신을 보좌하던 그가 한순간에 동생 바보로 전락하자 아레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보는 눈이 많다. 조용히 하거라.”

요한이 다시 혀를 차며 루카스에게 주의를 줬다. 루카스는 그제야 자신의 목소리가 컸다는 것을 깨닫고 목을 가다듬었다.

“큼, 크흠. 갑자기 약혼이라니… 너무 이른 것 아닙니까? 루시아는 고작 21살밖에 안 됐어요. 그리고 약혼을 할 거면 캐스퍼 후작이 아니라 헤르윈이랑…….”

헤르윈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요한이 눈을 날카롭게 뜨곤 루카스를 노려봤다.

“한 번만 더 그 이름을 말했다간, 가만 안 둘 줄 알아.”

영문도 모른 채 꾸짖음을 당한 루카스가 입을 뻐끔거리며 줄리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지금 루카스로선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줄리안에게 따로 물어봐야 할 듯싶었다.

혼란스러운 아들을 뒤로하고 요한은 저 멀리 있는 루시아를 쳐다봤다. 그녀도 때마침 이쪽을 발견했는지 베른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베른의 옆에서 맑게 웃는 그녀의 미소가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요한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 * *

루시아는 본격적으로 베른과 함께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아그네스 가문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가족을 발견한 루시아는 가족에게 베른을 정식으로 소개했다.

줄리안은 예상대로 베른을 반겼고, 요한은 걱정했던 것과 달리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로 루시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루카스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베른을 노려봤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기세와 달리 그는 베른에게 별다른 말 하지 않고 울리기라도 하면 가만 안 둔다는 삼류 소설 같은 대사만 날릴 뿐이었다.

루카스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약과지만, 괜히 낯부끄러워져 루시아는 베른에게 사과했다. 베른은 허허 웃으며 괜찮다고 손사래 쳤다.

가족과의 인사가 끝난 뒤부터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아무래도 백작 여식에 불과한 자신에 비해, 후작인 베른을 찾는 사람이 더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새로운 후작이 된 베른과 어떻게든 연고를 만들려는 사람들이었고, 그들 중 몇몇은 베른에게 제 딸을 소개시켜주려던 요량이었는지 여식을 데려왔다가 루시아를 발견하곤 입맛을 다셨다.

다가오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상대하던 베른이 누군가를 발견하더니 밝아진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루시아는 그가 지인을 발견했음을 직감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세상에, 이게 누구야. 천하의 베른이 이런 곳에도 다 오고.”

“살아는 있었네? 그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어서 네가 죽은 줄만 알았어.”

루시아와 그녀의 친구들만큼 그들도 베른과 허울 없는 사이인지 거리낌 없이 그에게 농담을 던졌다.

베른도 피식 웃으며 그것에 맞받아쳤다.

“내가 여기에 있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작위를 계승하고 이래저래 일이 있어서 바빴어. 연락 못한 건 미안하다.”

“알긴 아는구나? 잘못했으면 나중에 우리한테 한턱내. 그러면 용서해줄게.”

킥킥 웃던 남자가 시선을 옆으로 돌려, 베른의 팔짱을 끼고 있는 루시아를 바라봤다.

“……그런데 옆에 계신 이 미인은 누구시죠?”

“정식으로 소개할게. 나랑 약혼할 루시아 아그네스 영애야. 루시아, 여긴 어렸을 적부터 친하게 지내왔던 친구들입니다. 볼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라 말투가 거친 건 용서해주십시오.”

“괜찮습니다.”

베른의 설명을 듣고 루시아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려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시아 아그네스입니다.”

루시아는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어 베른의 친구들을 살폈다.

한 명은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한 명은 당황한 듯 얼떨떨해했고, 나머지 한 명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납득이 가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혹시 자신의 인사가 어디 잘못됐나 싶어 루시아는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너… 진심으로…….”

“만나서 반갑습니다, 영애. 저는 아돌프 베일리입니다.”

탐탁잖은 기색을 보인 남자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아돌프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가장 먼저 다가왔다.

당황하던 루시아는 이내 평정을 되찾고 옅은 미소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너무 깜짝 놀라서 무례를 저질렀네요. 저는 헥토르 체이스라고 합니다. 앞으로 자주 뵀으면 좋게네요.”

헥토르가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넴과 동시에 옆에 있는 친구의 옆구리를 푹푹 찔렀다.

그는 뭔가 할 말이 많은 듯 입만 뻐끔거리다가 얼굴을 쓸어내리곤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데릭 해리온입니다. 저 역시 너무 놀라서 그만 무례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네요. 부디 용서해주시길.”

생각했던 것과 달리 데릭은 정중하게 나왔다. 루시아는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베른이 아무한테도 말 안 해서 많이들 놀라실 거라고 했답니다. 괜찮으니 고개 들어주세요.”

데릭은 어색하게 웃으며 안심하다가 베른을 쏘아봤다.

이들과의 만남은 초반에 루시아의 친구들이 베른과 만났던 것과 별반 다른 것은 없었다.

그들은 두 사람이 어쩌다가 만나게 됐는지. 베른이 여자를 데려와서 놀랐다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갑자기 약혼녀를 데려올 줄은 몰랐어.”

“그러니까, 역시 시간이 약인가?”

“아직 약혼한 거는 아니야.”

베른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오늘이 네 번째 만남이기는 한데…….”

“뭐? 네 번? 고작 그것밖에 안됐다고?”

놀라워하는 그들의 반응을 보니 베른과의 만남이 얼마나 짧았던 건지 내심 실감 났다.

“응, 아직 진지하게 얘기가 오가진 않았지만…….”

베른이 눈치를 보며 자신을 돌아보자, 루시아는 미소로 답했다. 그에 걱정하던 베른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루시아라면 약혼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루시아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갑자기 질문을 떠넘기자 모든 시선이 루시아에게 쏠렸다.

“영애는 베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이 네 번째 만남이면 사실상 세 번밖에 만나지 않았다는 소리인데. 어느 부분에서 이 녀석이 마음에 들던가요?”

다소 곤란한 상황이지만, 방금 전 헤르윈이 물었던 것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베른이 걱정하지 말라며 팔에 올린 제 손을 토닥였다. 그의 기운을 받아, 루시아는 대답했다.

“확실히 짧은 시간이긴 하죠. 그리고 첫 만남에서 베른이 30분 늦게 도착했었거든요.”

“네에?”

“지각했는데 용케…….”

친구들의 날 선 시선을 받고 베른이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처음에는 30분만 기다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딱 가려던 찰나에 도착하셨더라고요. 대화를 나눠보니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고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다고 느껴져서 계속 만났어요. 그리고-”

루시아가 고개를 들어 곤란해하는 베른을 쳐다봤다.

“이상하게 베른과 대화하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쵸?”

“네, 저도 루시아와 있으면 편합니다.”

베른이 눈웃음을 지었다. 평소에 보여주던 대외적인 웃음보다 훨씬 편안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처럼 보였다.

제삼자가 보기에 두 사람은 이미 연인이었다. 그만큼이나 서로를 신뢰하고, 편안해하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멍하니 두 사람을 보던 데릭이 진지하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 다 정리했구나?”

“……그래.”

의미심장한 말에 베른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이제 정신 차려야지.”

“좋은 사람 만나서 다행이야.”

“그러게. 네가 정착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걱정을 한시름 놓겠어.”

“영애, 부족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데릭과 헥토르 뒤로 아돌프가 대표로 루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눈을 데구루루 굴리던 루시아는 허둥지둥 그의 손을 잡아 악수했다.

사교계에 퍼진 소문 때문에 자신을 탐탁지 여기지 않을까 걱정이었는데, 걱정이 무색하게 그들은 루시아를 환영했다.

그들에게 인정을 받은 것 같아 어쩐지 부끄럽고, 손끝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빰빠라밤-!

그때, 큰 나팔소리와 함께 2층에서 오늘의 주인공인 황녀가 나타났다.

그녀가 황제의 손을 잡고 나타나자 모두 고개를 숙여 그들을 맞이했다.

이윽고 황제의 간단한 연설이 시작되고,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황녀와 아레스는 홀 가운데에서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본격적인 약혼 파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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