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129)

<47화>

“길이 막히기라도 하는 걸까?”

“초대된 사람이 많으니 그럴 수도 있겠네.”

상념에 잡힌 헤르윈을 뒤로하고 친구들은 루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가 언제쯤 도착할까 두리번거리던 에단은 저 멀리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어? 저기 루카스 형님 아니야?”

그의 말에 친구들이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저 멀리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루카스가 보였다.

그의 옆엔 어떤 아리따운 여성이 함께였다.

“형님이 있다면 루시아도 왔을 텐데?”

“루시아는 안 보여.”

“같이 안 왔을 거야. 루카스 형은 계속 리디아 공자랑 있었거든. 아마 오늘 제도로 올라온 것 같아. 그치? 아리스타.”

헤르윈의 물음에 넋을 놓던 아리스타가 퍼뜩 정신 차렸다. 그리고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아. 오빠랑 같이 공작령에 있었어.”

“아, 공자님 보좌관을 하고 계시다고 했지?”

친구들이 루카스가 아레스의 보좌관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도 저기 있는 분들. 아그네스 백작 부부 아니신가?”

이번엔 브라이언이 반대편에 있는 요한과 줄리안을 발견했다. 루시아를 제외한 모든 아그네스 일가가 파티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게. 그럼 루시아도 도착했겠다.”

“홀이 워낙 넓으니 우리를 못 찾는 걸 수도 있어.”

수군거리던 친구들은 더욱 눈을 부릅뜨고는 루시아를 찾는 데 열을 올렸다.

헤르윈 역시 루시아를 찾아 연회장을 살폈다.

주위에 루시아와 같은 갈색 머리카락과 벽안을 지닌 여자들이 많았지만, 자세히 눈여겨볼 것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어?”

순간 얼떨떨한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

“……저기. 루시아 맞지?”

아리스타의 손가락을 따라가자, 많은 인파 사이로 루시아의 얼굴이 보였다.

“맞네, 루시아.”

“……그런데 옆엔 누구죠?”

루시아를 발견하여 기뻐하던 것도 잠시, 친구들은 그녀 곁에 있는 남자의 존재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 * *

친구들이 루시아를 발견하기 불과 3분 전, 루시아는 베른과 함께 파티장에 들어섰다.

“오늘 제 친구들에게 루시아를 소개해도 괜찮겠습니까?”

베른의 질문에 루시아는 잠시 그를 쳐다봤다.

“부담스러우시다면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베른은 편히 답해달라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루시아는 잠시 고민했다. 베른은 루시아를 약혼녀로 소개하고 싶은 것 같았다.

약혼을 할지 말지 아직 정확하게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를 보아선 언젠가 그와 약혼을 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도 이런 말을 꺼낸 거겠지. 어차피 그와의 약혼을 알리기 위해 참석한 것이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상관없습니다. 제 친구도 소개해드릴게요.”

“정말요? 루시아의 친구들이라. 기대되는군요.”

다정한 미소를 짓는 그를 따라 웃던 루시아는 마침 저 멀리 있는 친구들을 발견했다. 그 사이에 있는 헤르윈까지도.

그를 보자마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기 있네요.”

순간 목소리가 떨린 것 같았지만, 루시아는 애써 태연하게 베른을 돌아보며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베른이 루시아의 걸음에 맞춰 걸었다. 친구들과 서서히 가까워지자 그들의 경악 어린 표정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긴장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루시아는 베른이 선물한 귀걸이의 무게를 느끼며 떨지 않도록 스스로 세뇌했다.

“얘들아, 오랜만이야.”

“어? 어어. 오랜만이야, 루시아.”

여유로운 루시아와 달리 친구들은 얼떨떨한 기색이었다. 미소를 띠던 아리스타가 다소 경직된 얼굴로 조심스레 물었다.

“루시아, 옆엔 누구셔?”

처음 보는 남자와 파트너로 들어온 루시아를 보고 친구들은 당황했다.

헤르윈도 크게 놀랐는지 그의 붉은 눈이 커져 있었다.

무언가 말하라는 듯한 압박이 느껴졌지만, 루시아는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내 약혼자가 되실 분이야.”

에단과 브라이언이 입을 쩍 벌리며 얼어붙었고, 크리스틴은 실눈을 크게 떠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를 보였으며, 아리스타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곤 눈을 휘둥그레 키웠다.

루시아가 웬 남자랑 다정하게 있어서 설마 했는데 저들이 예상했던 것과 같은 답이 나오자 친구들이 경악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친구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헤르윈에게로 돌아갔다.

헤르윈은 부릅뜬 눈으로 루시아 옆에 있는 베른을 노려봤다.

일부러 헤르윈의 시선을 피하던 루시아는 미처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저 영문도 모른 채 열렬한 시선을 받게 된 베른만이 머쓱해할 뿐이었다.

“너희들 너무 놀라는 거 아니야? 상대방에게 실례야.”

“아, 미, 미안…좀 의외여서.”

“저희 때문에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베른 캐스퍼입니다. 루시아에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자주 볼지도 모르겠군요.”

어딘가 낯이 익나 했더니… 캐스퍼 후작임을 뒤늦게 알게 되자 친구들의 얼굴엔 다시 놀라움이 피어났다.

베른이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헤르윈은 인상을 찌푸려 딱딱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멀거니 볼 뿐이었다.

그제야 헤르윈의 얼굴을 본 루시아는 당황했다. 아무리 낯선 사람에게 차갑다고 해도 무례하게 대할 사람은 아닌데.

베른의 손이 무안해질 때쯤 에단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안녕하세요. 에단 벨루나 라고 합니다. 루시아의 아카데미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입니다.”

에단을 시작으로 돌아가면서 하나둘 인사를 나누었다.

“아리스타 리디아라고 합니다.”

아리스타의 인사까지 끝나고 마지막, 헤르윈의 차례가 왔다.

그가 여전히 경계 어린 눈빛으로 베른을 쏘아보자 보다 못한 아리스타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결국 헤르윈이 입을 열었다.

“……헤르윈 페네우스입니다.”

“모두 반갑습니다.”

불쾌할 법도 한데 베른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루시아는 그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두 사람이 같이 들어와서 깜짝 놀랐어요. 루시아, 미리 말하지 그랬어.”

“맞아. 그랬으면 우리가 이렇게 당황하진 않았을 텐데.”

“지금 알려줘서 미안해. 베른과 만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루시아가 베른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자 헤르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서로 접점이 없었을 텐데 어쩌다가 만나시게 된 거예요?”

궁금증을 참지 못한 크리스틴이 물었다.

“맞선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제가 사정이 생겨서 약속 시간에 늦었는데도 루시아가 절 기다려 주었지요. 정말 천만다행이에요, 하마터면 이런 멋있는 여성을 놓쳤을지도 모르니까요.”

낯부끄러울 정도의 찬사였다. 루시아가 너무 띄워주지 말라며 그를 살짝 밀쳤다. 그러자 베른이 작게 웃었다.

누가 보더라도 두 사람은 연인처럼 보였다. 그것이 낯설고도 잘 어울려 친구들은 그들을 훔쳐봤다.

“맞선이라고? 대체 언제…….”

“우리는 이만 가볼게. 다른 사람들이랑 인사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아. 좀 있다가 다시 보자.”

헤르윈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루시아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졸지에 할 말을 잃은 헤르윈이 루시아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베른과 함께 떠난 뒤였다.

헤르윈이 벙찐 얼굴로 베른의 팔을 잡고 멀어지는 루시아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설마, 루시아가 맞선을 봤을 줄이야.”

“나는 헤르윈이랑 루시아가 결혼할 줄 알았는데.”

“그러면 두 사람은 끝난 건가요?”

브라이언과 에단, 크리스틴이 헤르윈이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만약 둘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헤르윈에게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루시아가 먼저 선수를 칠 줄은 몰랐다.

평소 그녀가 헤르윈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잘 알기에 그 충격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건 헤르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영혼이 나간 사람처럼 이미 루시아가 사라지고 없는 자리만 멀거니 볼 뿐이었다.

헤르윈이 걱정된 아리스타가 슬쩍 물었다.

“헤르윈, 너도 들은 거 없어?”

“……없어.”

“정말로? 너한테는 언질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했는데…….”

말끝을 흐리는 아리스타의 말을 듣고 헤르윈은 문득 북부로 가기 전, 루시아와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렸다.

‘나중에, 우리 웃는 얼굴로 만나자.’

우는 듯 웃는 듯 이상한 표정으로 말하던 루시아.

‘웃는 얼굴로 만나자고 한 게 이런 뜻이었어?’

분명 루시아는 베른과 무척이나 행복하다는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 대한 짝사랑을 완전히 접은 것이다.

이런 날이 오기만을 바랐는데 어째서 웃을 수 없는 거지?

루시아가 다른 남자와 행복해진다면 이제 그녀와 진정한 친구로 지낼 수 있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 행복을 빌어줄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 옆에 있는 남자가 거슬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가슴에 큰 구멍이 난 듯,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공허하던 붉은 눈동자에 점점 빛이 돌며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내 헤르윈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주먹을 그러쥐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물어봐야겠어.”

낮게 가라앉아, 섬뜩하기까지 한 목소리를 듣고 친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이번 일로 헤르윈과 루시아가 싸우는 것이 아닌가 친구들은 걱정이 됐다.

* * *

루시아는 동아줄에 매달리듯 베른의 팔을 붙잡고 다급히 친구들에게서 멀어졌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헤르윈의 일그러진 얼굴과 목소리에 겨우 진정시켰던 심장이 미칠 것처럼 쿵쾅거렸다.

설렘에서 오는 두근거림이 아닌, 긴장과 공포로 인해 발생한 고동이었다.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무서운 걸까?

쿵쿵 울리는 심장박동 소리를 들을수록 시야가 점점 좁아지고, 저 혼자 덜렁 남겨진 기분이었다.

루시아의 낯이 창백해지고, 손이 떨리자 베른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루시아. 괜찮아요?”

베른의 물음에도 루시아가 정신을 되찾지 못하자 그는 서둘러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눈을 맞췄다.

“루시아!”

“-허억.”

호흡을 멈췄던 건지 루시아가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그녀의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자 베른이 인상을 찌푸렸다.

“죄, 죄송해요. 뭐라고 하셨죠?”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그보다 안색이 좋지 않은데 잠깐 쉴까요?”

자신을 걱정 어린 시선으로 보는 베른을 응시하던 루시아는 이윽고 주위를 살폈다.

근처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곳에 쏠려 있었다.

“저는 괜찮아요. 아직 파티는 시작도 안 했잖아요.”

“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잠깐, 긴장해서 그런가 봐요.”

아무리 루시아가 웃는 얼굴로 괜찮다고 말해도 도통 베른은 인상을 펴지 못했다.

그는 잠시 고개를 들어 루시아의 친구들이 있는 곳을 봤다.

그곳엔 베른을 경계하는 헤르윈이 이쪽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루시아의 상태가 안 좋아진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묻고 싶은 건 많지만, 베른은 그것을 애써 속으로 삼켰다.

“루시아. 저만 보세요.”

“……네?”

루시아가 당황하기 전에 베른이 그녀의 두 손을 꼭 잡고 눈을 지그시 마주했다.

“제 눈을 보고 심호흡하세요. 자, 스읍- 후우-”

루시아는 얼떨떨하게 베른의 심호흡을 따라 했다. 두어 번 따라 하다 보니 쿵쾅거리던 가슴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루시아의 얼굴에 혈색이 돌자 베른이 설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쓸었다.

“좀 괜찮은가요?”

“네, 이제 정말로 괜찮아졌어요.”

잘게 떨리던 목소리가 이젠 평온했다. 베른은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루시아의 옆에 서서 그녀의 손을 제 팔에 올렸다.

“또 긴장되고 상태가 안 좋아진다 싶으면 제가 알려드린 심호흡을 해보세요. 아니면 제 손을 잡으세요. 그러면 다시 도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창피하네요. 못난 모습만 보여주는 것 같아서… 방금 전에 제 친구들 때문에 당황하셨죠? 아무한테도 맞선을 봤다고 말하질 않았더니 애들이 많이 놀랐나 봐요.”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루시아는 방금 전, 친구들과 있었던 일을 말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리고 그건 제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루시아처럼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거든요.”

베른이 귓가에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긴장감을 풀어주기 위한 행동이란 것을 알기에 루시아가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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