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
루시아는 언제나 그리했듯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치장했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낀 하녀들은 눈을 감은 루시아의 눈치를 연신 봤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곱게 치장하는 이유가 바로 맞선을 보기 위해서였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헤르윈과 잘될 거라고 응원했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전에 루시아가 울면서 나타났을 때 그녀와 헤르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추 예상할 수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맞선을 볼 줄은 몰랐다.
“……다 됐습니다, 아가씨.”
하녀의 말에 루시아는 감았던 눈을 떴다. 역시나 거울에 비친 루시아는 아름다웠다.
저번에는 루시아의 귀여움을 돋보이게 하는 상큼한 화장이었다면 지금은 차분한 스타일의 단아한 화장이었다.
루시아도 나름 만족하는지 내려가 있던 입꼬리를 올렸다.
“고마워, 이번에도 화장이 잘됐네.”
“……….”
주인의 칭찬에 기뻐할 법도 한데 그 누구도 기뻐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미소가 슬픈 듯 울먹였다.
“표정이 왜 그래? 누가 보면 내가 어디 끌려가는 줄 알겠어.”
“하지만, 아가씨. 이렇게 갑자기 맞선이라뇨. 너무 빨라요.”
“맞아요, 헤어지신 지 얼마나 됐다고……헙!”
한 하녀가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루시아를 봤지만, 그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헤어진 게 아니라 차인 거야. 애초에 사귄 적도 없는걸.”
“아가씨…….”
“그리고 아버지를 원망할 필요 없어. 내가 먼저 맞선을 보고 싶다고 한 거니까.”
루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마쳤다.
“아가씨, 슬슬 가셔야 합니다.”
때마침 아론이 찾아왔다. 루시아는 탄식을 흘리는 하녀들을 뒤로하고 세인과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어? 아버지.”
마차에 타려던 루시아는 그 앞에 있는 요한을 발견했다.
루시아를 기다리기라도 했던 건지 그는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맞선을 보는 날이지?”
“네, 오늘은 첫 번째 후보를 만나볼 거예요.”
“……….”
요한은 잠시 루시아의 얼굴을 살폈다. 실연을 당하고 심연에 빠져있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참으로 평온했다.
요한의 눈엔 도리어 더 불안해 보였다.
그녀가 실연당한 지 고작 일주일 언저리밖에 되지 않았다. 짝사랑한 기간이 무려 10년이 훌쩍 넘으니 분명 회복도 오래 걸릴 거라 예상했다.
‘무리하는 건 아니겠지.’
몸을 혹사시켜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게 하려는 건 아닌지 걱정이었다. 하고픈 말은 많지만, 요한은 입을 달싹이며 최대한 말을 줄였다.
“잘 보고 오거라. 만약 4명 중 마음에 드는 이가 없다면 말하고. 그럼 내가 또 다른 후보자를 골라보마.”
“네, 그렇게 할게요. 곧 약속 시간이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루시아는 요한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가 움직이고도 한참 동안 서 있는 요한이 보였다. 루시아는 집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후우…….”
긴장감인지 피곤함인지 모를 한숨이 새어 나왔다.
“긴장되시나요?”
맞은편에 앉은 세인이 물었다. 루시아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나도 이제 결혼하는구나 싶어서.”
“아직 약혼도 하지 않으셨으면서.”
“약혼하면 결혼은 금방이지. 상대가 이상한 사람만 아니면 좋을 텐데.”
“……….”
세인은 잠시 창밖을 보며 턱을 괴는 루시아를 쳐다봤다. 요한이 그러했듯 그녀 또한 루시아가 걱정이었다.
“……이제는 괜찮으신 거예요?”
루시아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쎄.”
“빨리 극복하셔서 기쁘지만, 그만큼 무리하시는 건 아닌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루시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지난 3일간, 실연으로 정신도 못 차렸던 때를 회상하면 그녀의 걱정이 이해됐다.
그때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에 제 몸을 온전히 맡겼으니까.
그래도 제 감정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기에 생각보다 빠르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물론 헤르윈의 대한 감정이 모조리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저 미련을 놓아버린 것뿐.
‘헤르윈은 나와 인연이 아니었던 거야.’
그가 말한 대로 딱 친구까지만. 그와 자신 사이에 이어질 수 있는 인연은 친구까지가 한계다.
은연중에 부정했던 것을 인정하니 신기하리만큼 머릿속이 맑아졌다.
만약 그가 아리스타나 다른 이성과 교제를 한다고 해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어쩌면 네가 한 말 덕분일지도 몰라.”
“네?”
작게 중얼거린 루시아의 말을 듣고 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늘 헤르윈에게 최선을 다했거든. 그래서 더 이상의 미련도 아쉬움도 없어. 그저 내가 최선을 다해도 이룰 수 없던 것뿐이야.”
“……그런가요.”
“그래,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에게 잘 좀 말해줘. 아무리 나라고 해도 동정 어린 시선은 힘드니까.”
하녀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눈치챈 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도록 제가 단단히 일러두겠습니다.”
가끔은 백번의 말보다도 침묵 한 번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이번에도 세인이 옆을 묵묵히 지켜주어 큰 도움이 됐다.
“고마워, 세인.”
“뭘요.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는걸요.”
때마침 마차가 멈춰 섰다. 창 너머로 맞선 장소가 보이자 세인이 흐트러진 루시아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아가씨, 꼭 마음에 드는 남자길 바랄게요.”
“그랬으면 좋겠다. 갔다 올게.”
루시아는 마차에서 내려, 맞선 장소로 약속한 찻집에 들어섰다.
시계를 확인하니 약속 시간보다 5분 정도 일렀다.
혹시 상대방이 먼저 도착했나 싶어 주위를 둘러봤다. 상대방의 얼굴은 자료에 동봉되어 있던 그림으로 먼저 익혀둔 상태였다.
‘혹시 저 사람인가?’
저 멀리, 붉은 기 도는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남성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봐뒀던 그림과 비슷한 것 같아 루시아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혹시, 시몬 데이하드 영식이신가요?”
옆을 돌아본 훈훈하게 생긴 남성이 루시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접니다.”
“아, 역시 맞군요. 반갑습니다, 루시아 아그네스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어색하게 서로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일찍 오셨군요.”
“마침 근처에 일이 있어서 일찍 오게 되었습니다.”
루시아의 인사를 시작으로 대화가 시작됐다. 별 영양가 없는 의례 주고받는 말들뿐이었다.
그래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 긴장감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나쁘진 않네.’
시몬 데이하드.
데이하드 백작가의 차남으로, 현재 데이하드 백작에서 운영하는 상단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고 들었다.
나이는 5살 연상. 맞선 후보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아무래도 나이 차가 좀 있다 보니 그에게선 또래에게서 느껴볼 수 없는 진중함과 여유로움이 보였다.
말투나 행동거지, 그리고 몸에 밴 예법들이 합격점이다.
어느 정도 어색함이 많이 사라지자, 시몬이 등받이에서 몸을 땠다.
“솔직히 아그네스에서 먼저 맞선 제의를 하여 좀 놀랐습니다. 영애께서 오랫동안 마음에 품은 사람이 있는 걸로 알고 있었거든요.”
설마 했던 질문이 나왔다.
“페네우스 공자를 오랫동안 사모해왔다고 알고 있는데, 맞나요?”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칼이 숨겨져 있었다.
루시아가 그러했듯 시몬 또한 루시아가 자신의 미래 배우자로 적합한지 재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입 안이 씁쓸했다.
루시아가 헤르윈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사교계에 파다했다.
게다가 아카데미에 있었던 일이 왜곡되어 퍼진 것도 있어서, 세간에는 루시아가 헤르윈에게 목매는 경향이 있다고 떠들기도 했다.
다른 남자를 오랫동안 좋아한 것은 상관없지만, 그런 소문이 꼬리처럼 붙어있는 여자를 반길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상대방이 평범한 영식도 아니고 무려 페네우스 공작가 아닌가.
시몬으로서는 그 소문을 전부 감내하고서라도 루시아를 받아들여도 괜찮은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거짓말을 해봤자 통하는 것은 아니기에 루시아는 반쯤 체념하며 말했다. 그러자 시몬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호오, 그렇군요. 아무래도 저는 영애와 나이 차가 있어서 자세한 건 몰랐습니다만…….”
루시아는 아차 싶었다. 설마 떠보는 것이었을 줄이야. 동요하던 것도 잠시 그녀는 곧바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떠보는 거라고 해도 파해친다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는 정보. 뒤늦게 알아챌 바에는 첫 만남에서 밝히는 것이 좋다.
시선을 올려 시몬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뭔가 고민하는 듯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하지만, 곧 시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잘 됐군요. 그럼 저도 꺼릴 것이 없겠어요.”
“……네?”
잘됐다니. 대체 어느 점이 잘됐다는 걸까?
의아하던 것도 잠시 루시아는 시몬의 분위기가 변한 것을 감지했다. 단정하고 깔끔하던 그가 조금 불량스럽게 변했다.
분명 복장도, 머리 스타일도, 얼굴도 똑같은데 왜 그런 느낌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제게 연인이 있거든요.”
예고 없이 들어오는 폭탄 발언에 루시아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시몬이 피식 웃었다.
“어차피 영애께서도 제 사랑을 바라고 맞선을 본 게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갑자기 다짜고짜 연인이 있다고 하시면…….”
“에이, 순진하게 왜 이러실까?”
비아냥거리는 말에 루시아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어차피 저도 당신도 서로에게 감정이 없으니 서로를 자유롭게 풀어주자고 말하는 겁니다. 영애도 페네우스 공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닙니까?”
너무 기가 막히고, 낯 뜨거운 이야기에 루시아는 입을 뻐끔거렸다.
“제 연인이 평민이라 결혼은 불가능한 상황이거든요. 하지만, 저는 그 사람에게 제 모든 마음을 주기로 약속했기에 명목상의 적당히 괜찮은 신부가 필요합니다. 영애에게도 나쁜 제안이 아닐 텐데요? 현실적으로 페네우스 공자와는 결혼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결혼만 하고 서로 애인을 가지든 말든 자유롭게 지내자는 말씀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당연히 서로의 연애에 대해서는 일절 터치하지 않고 결혼이라는 타이틀만 가지는 거죠. 물론 배우자의 대우는 착실히 해드릴 예정입니다. 지원도 아끼지 않을 거고요.”
시몬이 서로에게 좋은 제안 아니냐며 의기양양했다. 한참 동안 벙쪄있던 루시아는 얼굴을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아무래도 이번 맞선은 없는 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루시아가 황급히 자리를 떠나자 시몬이 벌떡 일어나 그녀를 붙잡았다.
“갑자기 왜 그럽니까? 제 제안이 마음에 드시지 않나요?”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겨우 내뱉으며 루시아가 뒤를 돌아봤다.
“네, 무례하기 짝이 없어서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 없더군요.”
“……뭐?”
시몬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루시아는 얼굴을 굳히며 그를 쏘아봤다.
“저는 착실하고 가정에 충실한 신랑감을 원하지, 방탕한 사람은 사양입니다.”
“하, 지금 내가 방탕하다고?”
심기가 거슬렸는지 시몬이 삐뚜름하게 웃었다.
“지금 누가 누구보고 그런 소리를……!”
“그리고 듣자 하니 뭔가 오해하시는 모양인데. 저는 페네우스 공자를 짝사랑했을 뿐. 그의 연인도 뭣도 아닙니다. 그러니 불쾌한 오해는 삼가 주시죠.”
루시아는 제 팔을 붙잡은 시몬을 뿌리치며 카페 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