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도련님, 곧 출발하셔야 합니다.”
북부로 떠날 여정을 모두 마치고 시종인 제롬이 말을 건네자, 헤르윈은 어두운 안색으로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루시아와 만나기로 했다며 들뜬 채로 나갔던 그는, 저택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이상해졌다.
뭔가 고민거리라도 있는지 간간이 넋을 놓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듣는 둥 마는 둥 맥 빠진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대체 아그네스 영애와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결국 참다못한 제롬이 물었다. 그의 눈에 헤르윈의 어깨가 잘게 떨린 것이 똑똑히 보였다.
“아무 일도 없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뻔한 거짓말은 그만두시고요.”
제롬이 무례하게 말을 끊었다. 헤르윈이 날 선 눈빛으로 쳐다봐도 그는 뻔뻔했다.
“하, 내가 요즘 많이 느슨해졌나 보군. 네가 내 말도 끊고 말이야.”
“도련님을 모시려면 한 뻔뻔해야죠. 그리고 요 며칠 도련님이 이상하지 않으셨습니까.”
제롬이 그 정도론 겁먹지 않는다며 콧방귀를 꼈다. 헤르윈은 혀를 짧게 차다가 복잡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진짜 별일 없었어. 그저 평소처럼 루시아가 고백했을 뿐이지.”
“그리고 도련님은 거절하셨겠군요.”
맞는 말이지만, 왠지 모르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 않았다.
제롬은 질색한 눈빛을 한 헤르윈을 잠시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도련님께선 대체 왜 아그네스 영애를 받아주지 않으시는 건가요?”
순간 헤르윈이 서늘하게 눈빛을 가라앉혔다. 이런 유형의 질문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의 분위기가 변한 것을 감지하고 제롬이 서둘러 말을 돌렸다.
“아그네스 영애께 동정이나 연민을 느껴서 한 질문이 아니라 그저 도련님의 의중이 궁금한 것뿐입니다.”
“……….”
“순순한 궁금증이라고나 할까요.”
제롬에게서 악의가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헤르윈은 찌푸렸던 인상을 폈다.
“그걸 네게 말할 의무는 없는데.”
“그거야 그렇죠.”
제롬은 이 이상 파고드는 것을 포기했다. 다만 대답하길 꺼려하는 헤르윈을 보고 있자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은 건 도련님이시면서. 왜 정작 본인이 차인 것 같은 표정이시람.’
헤르윈은 누가 보더라도 실연당한 사람 같았다. 그래서 의아했다. 어째서 루시아를 받아주지 않는 건지. 적어도 자신이 봤을 때 그는 루시아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적당히 거절하시는 것이 좋으실 겁니다. 언젠가는 아그네스 영애께서도 지치실 날이 올 테니까요.”
“시끄럽다. 나 말고 네 연애나 신경 써. 며칠 전에 술 먹고 전 애인 집을 찾아갔다는 소문이 허다하다.”
“대체 어떤 놈이 그런 헛소문을 퍼트린답니까?!”
치부가 건드려진 제롬이 대체 소문을 낸 놈이 누구냐며 씩씩거렸다.
난동을 부리는 제롬을 보며 피식 웃던 헤르윈은 방금 전, 제롬이 했던 말을 상기시켰다.
루시아가… 지친다?
어쩌면 그러는 편이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을 것이다.
욱신-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가슴이 더욱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미미하여 헤르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련님, 이제 진짜 가셔야 합니다.”
어느새 정신 차린 제롬이 마차 문을 열고 대기하고 있었다. 헤르윈은 서둘러 마차에 올라섰다.
“무탈하게 다녀오시길 바라겠습니다, 도련님. 그동안 이곳은 저희가 지키겠습니다.”
제도 저택의 하수인들이 모두 나와 헤르윈을 배웅했다.
헤르윈은 머리가 희끗거리는 집사장을 보고 입을 달싹였다.
“혹시 내 편지가 이곳으로 온다면…….”
“네, 늘 그리했듯 북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다 안다는 듯한 집사장의 인자한 미소를 보니 불편했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이윽고 마차가 움직이고 헤르윈은 창을 닫았다. 서서히 수도가 멀어지는 풍경을 보며 헤르윈은 가슴팍에 있는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그 안에는 루시아가 준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갔다 오면 여느 때와 같겠지.”
이번엔 루시아의 반응이 조금 격렬했지만, 분명 북부에 갔다 오면 언제나 그랬듯 어색함 없는 친구 사이로 돌아올 것이다.
늘 그래왔으니까.
* * *
헤르윈에게 차인 날로부터 3일. 딱 3일 동안 루시아는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실연당한 첫날에는 그녀의 방에서 구슬픈 울음소리가 하루 종일 저택에 울려 퍼져 모두가 침울함 속에 있었고.
이튿날에는 죽은 듯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고, 방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어 혹시 그녀가 위험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했으며.
사흘째 되던 날에는 그녀의 방에서 설렁줄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안심했다.
하지만, 사흘째까지도 루시아는 세인을 제외한 그 누구도 방에 들이지 않았다. 하물며 어머니인 줄리안마저 거절했다.
4일이 흐른 그다음 날 아침. 루시아가 드디어 방을 벗어나 식당으로 내려왔다.
어두운 얼굴로 깨작깨작 식사를 하던 요한과 줄리안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루시아를 쳐다봤다.
며칠 전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다 죽어가던 벽안이 조금 맑아져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루시아, 어서 오렴! 배 많이 고프지?”
겨우 한마디 내뱉은 요한과 달리 줄리안은 서둘러 루시아를 자신의 옆에 앉혔다.
줄리안은 서둘러 하인에게 아침 식사를 내오라고 명하며 연신 그녀의 눈치를 봤다.
괜찮냐고, 어디 아픈 곳은 없냐고, 혹시 아직도 많이 힘드냐고 묻고 싶은 것은 산더미처럼 있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다.
단 3일 동안 보지 못했던 것뿐인데 루시아의 분위기가 너무 많이 변해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활기를 샘솟게 하는 미소는 여전했으나 어째서인지 그녀에게서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졌다.
비단 줄리안뿐만 아니라 요한도 그녀의 변화를 알아챘다.
얼마 있지 않아 루시아의 음식이 도착하고 3명은 멈췄던 식사를 시작했다.
“……딸, 입엔 좀 맞니? 혹시 먹고 싶은 게 있다면 뭐든 말하렴. 내가 주방장에게 일러두마.”
줄리안이 큰 용기를 내 루시아에게 말을 건넸다. 칼질을 하던 루시아가 멈칫하며 줄리안을 돌아봤다.
공허할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녀의 벽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맑았다.
“네, 그럴게요.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어머니.”
긴장하던 줄리안은 루시아가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아 열심히 말을 건넸다.
루시아는 성실히, 그리고 농담을 섞으며 그에 호응했다.
“이젠 괜찮은 게냐.”
요한의 진중한 목소리가 식당에 울려 퍼졌다.
애써 피하고 있던 주제를 꺼내자 줄리안이 황급히 그를 돌아봤다.
빤히 쳐다보는 벽안을 담담히 받아낸 루시아가 싱긋 웃었다.
“네, 이제는 괜찮습니다. 염려 끼쳐드려 죄송해요.”
긍정적인 답변과 달리 요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네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네, 그럼요.”
혹시라도 사이가 나빠질까 조마조마하던 줄리안이 긴장하느라 잔뜩 움츠렸던 어깨의 힘을 풀었다.
“아버지, 맞선은 언제부터 보면 될까요?”
요한이 물을 마시다가 말고 루시아를 쳐다봤다. 설마 그녀가 먼저 맞선에 대한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잠시 말이 없던 그는 뒤늦게 대답했다.
“너만 괜찮다면 언제든 상관없다.”
“그러면 당장 내일부터 맞선자리를 주선해주시겠어요?”
“루, 루시아. 그건 너무 이르지 않니?”
줄리안이 옆에서 말렸지만, 루시아는 오로지 요한만을 쳐다봤다.
“가능하죠?”
“네가 원하는 대로 하마.”
“감사합니다.”
루시아의 벽안이 한층 가라앉았다.
“단, 상대 가문에도 서신을 보내야 하니 시간이 좀 걸릴 거다. 저번에 봤다시피 4명의 후보가 있는데 어떻게 할 거니? 후보 중 마음에 드는 한 명만 만나도 되고, 4명 다 만나본 다음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도 된다.”
“일단 저번에 보여주신 자료를 한 번 보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그래.”
요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을 떠나려던 그는 밖으로 나가기 직전 멈춰 섰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거라.”
어질기만 했던 그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지며 딸에 대한 걱정을 한시름 담았다.
루시아는 문득 감정이 울컥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이 떠나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줄리안은 요한의 마음을 곱절 이해하며 루시아의 손을 따뜻하게 감쌌다.
“루시아, 무리할 필요는 없단다. 천천히 네 속도에 맞게 움직이렴. 우리는 언제든 여기에 있으니 말이다.”
“……네.”
줄리안의 따스한 위로를 받으며 루시아는 묵묵히 식사를 시작했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벽안이 일그러졌다.
물기를 머금던 것도 잠시 루시아는 고개를 들며 울렁이는 감정을 정리했다.
* * *
방으로 돌아온 루시아는 책상에 앉아, 요한이 준비해둔 약혼 후보자 자료들을 훑어봤다.
후보자는 총 4명으로. 자작가부터 시작하여 후작가까지, 다양한 신분과 최대 5살까지의 나이 차를 가진 남자들이었다.
개중에는 1살 연하의 남성도 있었다.
각 자료에는 후보자의 인적 사항과 가족 구성원, 직업, 후보자가 현재 가문에 있는 위치, 재산, 가족력 등등 정말 사소한 것 하나하나 적혀 있었다.
치밀하고 꼼꼼한 정보를 보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만큼 아버지가 열심히 알아봐 주신 거겠지.”
자료를 보면 볼수록 요한의 애정이 여실히 보였다. 어릴 적, 다정하게 놀아주던 요한의 모습이 떠올랐다.
모든 자료를 살핀 루시아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 천장을 바라봤다.
딱히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다.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사람들이지만 애초에 일면식도 없었고, 자신의 눈에는 전부 거기서 거기였다.
더 이상 사랑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기대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애초에 사랑으로 시작하는 약혼이 아니니 당연한 거겠지만.
“전부 비슷비슷하니 그냥 다 한 번씩 만나보는 게 좋겠네.”
활자로 한정된 인적 사항보다는 짧게라도 대면하는 게 상대방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을 터.
결혼을 하면 한평생 같이 살아야 할 텐데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는 직접 겪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많은 것을 바라진 않는다. 그저 적당히 성격이 맞고, 성실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상대방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더 이상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할 테니까.
루시아는 눈을 꾹 감으며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책상에는 헤르윈의 초상화와 소중한 물건들을 넣어둔 오르골, 그리고 며칠 전 와인을 마시면서 꺼내놨던 일기장이 놓여있었다.
그것들을 보고만 있어도 헤르윈이 떠올랐다.
3일 동안 헤르윈의 대한 모든 감정을 쏟아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가슴이 욱신거렸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제게 가장 소중했던 보물들이 한순간에 보기조차 힘든 것들로 변해버렸다.
이 이상 내버려 두면 애써 정리했던 감정이 다시 머릿속을 침범할 것 같았다. 루시아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헤르윈과 관련된 물건들을 정리했다.
중간중간 그대로 두고픈 마음이 솟구쳤지만, 루시아는 강제로 마음을 다잡고 그것들을 모조리 상자에 집어넣었다.
“이제 세인을 불러서 이걸 버리라고 하면…….”
설렁줄을 흔들려던 루시아는 멈칫했다. 버리는 것으로 모든 미련을 놓아버리면 되는데 차마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다.
결국 루시아는 손을 거두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그 상자를 들고 자신이 평소 찾지 않는 곳으로 향했다.
드레스 룸 중에서도 이제는 유행이 지나 입지 않는 옷이나, 작아진 옷들을 모아둔 옷장의 깊숙한 곳으로 집어넣었다.
루시아는 옷들 사이에 파묻혀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자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하지만, 이내 짙은 한숨과 함께 눈을 깜빡였다.
많은 감정을 품은 벽안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윽고 옷장 문이 닫혔다.
13년이란 긴 세월 동안 오직 한 남자만을 바라보던 여인이 마음을 정리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