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29)

<7화>

“백작, 그동안 부인과 아이들을 잘 보살펴주어 고맙소. 큰 은혜를 입었으니 이 하일 페네우스, 아그네스 백작의 부름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리라.”

하일이 오고 얼마 있지 않아서 페네우스 가문은 번갯불에 콩 볶듯 북부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일 년 반 동안 제도에서 지내느라 짐이 많이 늘어난 상태인데도 고작 일주일 만에 모든 짐을 꾸렸다.

너무 다급한 감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그렇게 고대하던 북부로 가는 길이다. 마냥 빨리 가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헤르윈, 그러면 이제 북부로 가는 거야?”

“……응.”

“가서 잘 지내. 편지도 꼬박꼬박 보내고.”

“……응.”

루시아와 루카스가 헤르윈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네도 헤르윈은 미적지근하게 반응했다.

“누나, 누나! 누나도 가티 가지?”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홀로 놀던 헨리가 걸어와 루시아의 품에 안겼다.

말도 제대로 못하던 때에도 루시아에게 뽀뽀했던 것처럼 헨리는 여전히 그녀를 좋아했다.

“아니, 나는 안 가.”

옆에서 덤덤하게 들려오는 말을 듣고 헤르윈이 얼굴을 굳혔다.

“왜? 헤니랑 가티 가자.”

“으음, 그건 곤란한데.”

자신이 원하는 답이 들려오지 않자 헨리가 입을 삐쭉 내밀며 불만을 표했다.

“헤니는 누나랑 가티 갈 거야!”

“아니, 요 꼬맹이가 또 시작이네.”

루카스가 피식 웃으며 루시아에게서 헨리를 떼어냈다.

헨리가 루시아에게 달라붙으면 그것을 떼어내는 것은 루카스와 헤르윈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헤르윈은 제 동생을 방관할 뿐이었다.

“얘들아! 이제 가자!”

“아, 준비 다 됐나 보다.”

헤르윈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자, 꼬맹아. 너도 북부에 가서 잘 지내야 한다?”

“으아아앙! 시러, 시러! 누나랑 갈 고야!”

루카스가 헨리를 안아 들고 먼저 떠났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멀거니 보던 루시아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안 가?”

헤르윈은 루시아의 말에 답해주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이 걸을 수 있는 아주 느린 보폭으로 나아갔다.

“헤르윈, 얼른 안 오고 뭐 하니!”

스칼렛의 재촉이 걸음을 더 느리게 했다. 바닥만 보던 헤르윈은 결국 걸음을 멈췄다. 루시아도 그를 따라서 덩달아 멈췄다.

“헤르윈, 어디 아파?”

“……루시아.”

“응?”

고개를 들어, 푸른 벽안과 마주했다. 가슴에 꽉 막혀 있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데, 이 감정이 무엇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여 내뱉을 수가 없었다.

헤르윈은 결국 입을 달싹이는 것에 그쳤다.

“헤르윈!”

“우리 얼른 가자. 부인께서 화내시겠어.”

헤르윈의 심정을 모르는 루시아는 그의 손을 잡고 바깥으로 뛰어갔다.

갑작스럽게 마주한 환한 빛 때문일까? 헤르윈은 앞에 있는 루시아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출발 시간이 늦었어. 서둘러야 해.”

스칼렛이 재촉하며 헤르윈을 마차에 태웠다. 마차 안에는 울다가 지친 헨리가 훌쩍이고 있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줄리안. 덕분에 좋은 추억 쌓고 가.”

“이정도야 뭘. 가서도 잘 지내. 또 놀러 오고!”

이제는 정말로 작별할 시간이었다. 스칼렛과 요한은 마저 아그네스 부부에게 인사를 나누고 마차에 올랐다.

이랴!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며 마차를 몰았다.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자 가만히 무릎 위에 올려진 손을 내려다보던 헤르윈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어머, 헤르윈!”

헤르윈은 자신이 무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칼렛 무릎 위로 올라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루시아! 루카스 형! 나 잊으면 안 돼! 알겠지?”

“응! 잘 가! 헤르윈!”

“우리가 편지 보낼게!”

다행히 헤르윈의 목소리가 아그네스 남매에게 닿았다. 헤르윈은 그것에 안도하면서도 점점 멀어져 이제 잘 보이지 않는 루시아를 보고 서운함을 느꼈다.

그녀는 헤르윈이 떠난다는 말을 듣고도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우는 것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처럼 서운해할 줄 알았는데…….’

북부로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는 건 오직 자신뿐인 것만 같아 섭섭했다.

6살의 초여름.

유독 시원한 바람이 불었던 그날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 * *

헤르윈이 북부로 떠나고 나서 시간이 느린 듯, 빠르게 흘렀다.

그가 떠나고 며칠간 루시아는 넋을 놓는 일이 많았다.

늘 누군가로 가득 채워졌던 옆자리가 허전하여 뭘 해도 흥미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어린아이의 기억력은 짧았다.

그래도 그녀와 루카스는 헤르윈과의 추억을 잊지 않았다.

그와 같이 놀았던 나날을 그리워하며 추억을 떠올릴 때면 북부에서 편지가 날아왔고, 아그네스 남매는 그것에 기뻐하면서 답장을 보내곤 했다.

그렇게 서로 편지를 주고 받기를 한 달, 두 달, 세 달이 지나고 계절이 한차례 바뀌어 갈 때쯤 그들의 연락 빈도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선명했던 기억 역시 점차 희석되어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았고, 그때의 일만 생각하고 지내기에는 현재를 즐기기 바빴다.

각자의 생활을 만족스럽게 지낸 어느 날 조금이나마 오갔던 편지가 뚝 끊겨 버렸다.

헤르윈이 떠나고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렇고 또 시간이 흘러 루시아는 어엿한 8살이 되었다.

“북부로 간다고요?”

부모님과 함께 티타임을 즐기던 루카스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그래. 예전에 우리 집에서 머물렀던 페네우스 가문을 기억하니?”

“어…아! 헤르윈이랑 헨리 말이죠?”

“그래, 이번 여름은 북부에서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연락이 왔단다.”

“북부는 이곳과 달리 한여름에도 봄, 가을처럼 선선하다고들 하지. 그리고 눈이 녹지 않은 곳도 있다고 하였고.”

“북부로 가면 헤르윈과 헨리를 오랜만에 만나겠구나.”

“헤르윈이라… 되게 오랜만이다. 그치, 루시아.”

“응? 으응…….”

가만히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던 루시아가 말끝을 흐렸다.

어렸을 적에 둘도 없는 절친처럼 지냈으니 당연히 좋아하리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반응은 어딘가 이상했다.

눈살을 찌푸리던 루카스가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너, 혹시 헤르윈 기억 안 나?”

“음, 누군지 기억은 나는데…….”

“네가 너무 어렸을 때라 그런가? 그래도 1년 넘게 같이 지냈는데.”

“아니, 기억은 나. 그런데 정확하게 다 기억하는 건 아니라서.”

“그래? 그래도 기억하니 다행이네. 하긴, 나도 7살 이전에는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으니까.”

루카스가 제 동생을 이해하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루시아는 루카스가 건네주는 쿠키를 받아먹으며 곰곰이 헤르윈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천사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상세한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단편적으로 장면들이 떠오를 뿐.

검은 머리에 붉은 눈, 천사라고 생각할 만큼 수려한 외모, 그리고 약간 까칠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애들이 뭐라고 말하면 버럭 화내던 것이 떠올랐다.

‘여자 같다는 말이랑 예쁘다는 말도 싫어했었지? 아마.’

이렇게 정리를 해보니 그렇게 좋은 성격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도 그를 떠올리면 기분 좋았던 기억밖엔 생각나지 않았다.

부모님이나 루카스 말에 의하면 헤르윈이 자신을 많이 챙겨줬다고 하니 사이가 많이 좋았던 모양이다.

루시아는 이제 흐릿해진 헤르윈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다.

“히, 궁금하다.”

루시아는 설렘을 가득 안고 발장구를 쳤다. 북부로 가면 어떤 나날이 펼쳐질지 기대됐다.

* * *

“형아, 뭐해?”

“숙제하고 있어. 헨리, 왜? 나한테 볼 일 있어?”

“으응, 그냥 형아 보고 싶어서 왔어.”

헨리가 동그란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헤르윈이 피식 웃으며 움직이던 깃펜을 멈췄다.

끼익-

의자에서 내려온 헤르윈은 뻐근한 어깨를 문질렀다.

8살이 된 헤르윈은 이제 어느 누구도 여자로 오해하지 않을 정도로 아주 멋있게 성장했다.

검술을 본격적으로 배운지도 어느덧 2년이 넘어 어린 나이임에도 또래에 비해 기골이 탄탄했고, 평균보다 큰 부모님의 유전자 덕분에 또래에 비해서 키도 큰 편이었다.

키 크고, 잘생기고, 운동과 공부도 잘하는 헤르윈이 헨리는 너무나도 좋았다.

5살인 헨리에게 있어 헤르윈은 크나큰 자랑거리였다.

“아! 맞아! 오늘 엄마가 그랬는데 제도에서 손님이 온댔어!”

“그래? 그러면 좀 있으면 오겠네?”

“응! 누나, 형도 있다고 했는데 과연 누굴까? 형아 혹시 기억나?”

“……기억이야 나지.”

“어때? 둘 다 착해?”

“그랬던 것 같아. 나도 자세하게 기억하는 건 아니라서 직접 만나봐야 알 것 같네.”

“그런 거야?”

헤르윈은 끊임없이 조잘거리는 헨리의 말을 화 한 번 내지 않고 가만히 들어주었다.

다정하게 손잡고 복도를 거닐던 찰나,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쪽이 소란스러웠다.

“뭔가 시끄러워.”

“그러게 무슨 일이지?”

두 형제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정말 많이들 컸네. 시간이 너무 빠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페네우스 부인.”

“루카스는 다 컸구나. 올해 몇 살이라고 했지?”

제도에서 올라온다던 손님이 벌써 도착한 모양이다. 헨리가 손님이 왔다고 방방 뛰는 한편 헤르윈은 멍하니 홀에 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흐려서 잘 기억나지 않았던 인물들의 얼굴이 점차 선명하게 그려졌다.

제게 다정하게 대해줬던 아그네스 백작 부부와 자신이 잘 따라다녔던 루카스, 그리고…….

“어? 마침, 저기 왔네. 얘들아, 내려와서 인사하렴.”

2층에 있는 헤르윈과 헨리를 발견한 스칼렛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옆으로 비켜서면서 그동안 가려져 있던 한 여자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처럼 화창해 보이는 벽안과 눈이 마주쳤다.

“헤르윈?”

기억 속의 목소리와 그녀가 내뱉는 목소리가 겹쳐졌다.

“……루시아?”

“와! 진짜 헤르윈이네?”

처음 만났을 때 요정이 아닐까 착각했던 여자아이, 루시아가 구김 없이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헤르윈은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던 기억이 점차 떠오르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꼈다.

“우와아…예쁘다.”

저도 모르게 넋을 놓던 헤르윈이 퍼뜩 정신 차렸다.

밑을 내려다보니 헨리가 눈을 반짝이며 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기도 전에, 헨리는 헤르윈과 잡았던 손을 풀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와, 얘가 헨리야? 진짜 많이 컸다.”

루시아 옆에서 헨리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던 루카스가 감탄했다.

헨리는 통통한 볼살을 흔들며 헐레벌떡 뛰어왔다.

“으앗!”

“예쁜 누나!”

그리고 돌연 루시아에게 달려들었다. 헤르윈은 한발 늦게 루시아에게 안긴 헨리를 바라봤다.

“헨리……!”

“하하하하, 헨리는 여전히 루시아가 좋은 모양이구나?”

헤르윈이 헨리 이름을 불렀지만 스칼렛의 목소리에 묻혀버렸다.

“얘도 여전하다. 루시아, 기억나? 얘가 너 엄청 좋아했잖아.”

“그랬었나?”

루카스가 옆에서 루시아를 툭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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