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어때? 내 친구가…….”
“그럴 생각 없어.”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던 안토니오는 무덤덤한 헤르윈의 거절에 큰 충격을 받았다.
“지, 지금 내 말을 거절하겠다는 거야?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나 트래빈 백작가의 안토니오라고!”
“사과해.”
안토니오가 흥분하여 씩씩거릴 때, 헤르윈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뭐?”
“사과하라고. 너 때문에 개미들이 죽었잖아.”
무력하게 앉아 죽은 개미들을 구경하던 루시아가 고개를 돌려 멍하니 헤르윈을 쳐다봤다.
“지금 그깟 개미 때문에 나보고 사과를 하라고?”
“그래, 개미가 죽어서 루시아가 슬퍼하니까.”
안토니오가 기가 찬 숨을 내뱉으며 루시아를 쳐다봤다. 고작 보잘것없는 여자아이 하나 때문에 사과하라는 게 어이없었다.
“뭐해, 얼른 사과하라니…….”
헤르윈이 사과하라고 재촉할 때 루시아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우리 그냥 가자.”
울적해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루시아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괜찮겠어?”
“응, 조금 슬프지만 헤르윈이 대신 화내줬으니까 괜찮아.”
“……그럼, 알겠어.”
루시아를 일으켜준 헤르윈은 그녀와 함께 자리를 떴다.
“야아아!”
자신을 무시하고 서서히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고 안토니오가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두 사람이 뒤돌아보자 그가 씩씩거리며 헤르윈을 가리켰다.
“아직 내 말 다 안 끝났어! 가긴 어딜 가!”
“뭐야, 지금 사과하려고?”
“누가 사과한다는 거야, 지금!”
“그럼, 왜 불렀는데. 난 너랑 친구 안 한다니까?”
제 마음대로 상황이 굴러가질 않자, 안토니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얼굴을 붉히던 것도 잠시, 갑자기 비웃음을 날렸다.
“4대 공작 가문이라면서 여자 옆만 졸졸 따라다니는 꼴이라니.”
안토니오를 무시하고 가려던 헤르윈이 뚝 멈췄다.
“내 말 틀려? 시종이라도 된 것처럼 저 여자애 말만 따르고 있잖아. 아, 혹시 너 여자야?”
헤르윈이 눈을 서슬 퍼렇게 떴다. 살기 가득한 붉은 눈을 본 안토니오가 뒤로 주춤 물러서자 그 옆에 있던 일행이 그에게 속삭였다.
“안토니오 님, 페네우스 가문엔 아들밖에 없습니다.”
“큼, 그, 그렇지? 얼굴이 여자애처럼 생겨서 잠깐 헷갈렸을 뿐이야.”
잘못된 정보에 부끄러워하던 안토니오는 헛기침하며 다시 무게를 잡았다.
헤르윈의 안광은 여전히 흉흉했다.
“크흠, 그런 게 아니라면 혹시 저 애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가?”
쿵.
헤르윈의 심장이 크게 내려앉았다. 대충 찍어 맞춘 건데 헤르윈이 크게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우연히 그의 약점을 잡아낸 안토니오가 씩 웃었다.
“맞네, 어쩐지 영 이상하더라니. 그런 거였어.”
안토니오가 비웃음 가득한 웃음소리를 냈다.
“페네우스 공자는 저 여자애를 좋아한대요!”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래요!”
안토니오의 장단에 맞춰 그의 일행도 두 사람을 본격적으로 놀리기 시작했다.
쿵쿵쿵.
어릴 적 여자라고 놀림 받을 때처럼 헤르윈의 심장이 불쾌하게 요동쳤다.
헤르윈은 누군가가 자신을 놀리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어렸을 적 북부에서 있었던 일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로 남은 것이다.
헤르윈이 주먹을 꽉 쥐며 소리 질렀다.
“시끄러! 누가 누굴 좋아한다는 거야! 나랑 루시아, 그런 사이 아니거든!”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한목소리로 외치던 아이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그들은 이내 히죽 웃었다.
“왜 화를 내고 그래. 맞으니까 그런 거지?”
“아니야!”
“에이 맞나 본대?”
반응을 보이면 보일수록 소란은 더욱 커지기만 할 뿐,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계속되는 놀림이 헤르윈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르고, 속이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겨우 용기를 낸 헤르윈이 다시 한 번 입을 열려고 할 때, 멀뚱히 서 있기만 하던 루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면 너희도 서로 좋아하는 거야?”
루시아는 안토니오를 포함한 세 사람을 가리켰다.
“너희도 우리처럼 계속 붙어있는데 서로 얼레리 꼴레리 하는 사이야?”
세 아이가 당황하며 어버버 말을 잇지 못하자 그것을 보고 루시아가 씩 웃었다
“역시 맞네.”
주도권이 순식간에 루시아에게 넘어갔다. 헤르윈은 방금 전과 180도 달라진 분위기를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어느덧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관심을 보이던 사람들이 하필, 이 타이밍에 몰려들기 시작하자 안토니오와 그의 일행이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일행 중 한 명이 소리를 빽 질렀다.
“나, 난 그런 거 아니야!”
“나도 아, 아니야!”
한 명에 이어 나머지 한 명도 도망가자 졸지에 이곳엔 안토니오 혼자만이 남았다.
양 날개를 잃고 안절부절못하던 안토니오는, 자신을 향해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울상을 지었다.
루시아가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꼈다.
부끄러워진 그는 곧 울음을 터트리며 도망쳤다.
“아하하하! 헤르윈, 저것 봐.”
헤르윈은 꺄르르 웃는 루시아를 지그시 바라봤다.
진정됐던 심장이 소리를 조금씩 키웠다. 무섭고 두렵기만 했던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편안함과 더불어 설렘으로 가슴이 간질거렸다.
헤르윈의 귓불은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물론 그의 변화를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물며 헤르윈 자신마저도.
* * *
아그네스 백작저로 돌아온 헤르윈과 루시아는 평소처럼 놀이방으로 향했다.
콧노래를 부르는 루시아와 달리 헤르윈이 다소 어두운 얼굴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는 방금 전, 공원에서 있었던 일이 신경 쓰였다. 정확히는 루시아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때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루시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진심이 아니었다.
그 아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루시아를 이성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친구로서 그녀를 ‘좋아하는’ 것은 맞았다.
혹시 자신의 말로 인해 그녀가 상처받지는 않았을까 걱정됐다.
“헤르윈! 오늘은 이거 가지고 놀자!”
루시아가 헤르윈에게 장난감을 내밀었다. 헤르윈은 그것을 받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루시아.”
“응?”
“너, 혹시 방금 전에 나한테 서운하지 않았어?”
“방금 전? 내가 너한테 왜 서운해?”
“내가 너를,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잖아.”
루시아가 입을 헤 벌리며 잠시 멍 때렸다.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 안토인인가 뭐시긴가 얼레리 꼴레리 놀렸을 때?”
“응, 혹시 서운했어?”
“아니?”
단호할 정도로 루시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상처를 받지 않았다면 다행인데 왜 그녀의 반응이 거슬리는 걸까.
“왜 안 서운했어?”
“으음… 그야, 너는 나를 좋아하잖아.”
“뭐, 뭐?”
“나도 헤르윈 좋아하고, 헤르윈도 나를 좋아하잖아. 아니야?”
당황하던 것도 잠시 헤르윈은 루시아의 말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녀의 ‘좋아한다’는 말은 친구로서의 ‘좋아’였다. 자신이 생각하는 ‘좋아’가 아니라.
“그리고, 너는 다른 사람이 놀리는 거 엄청 싫어하던데.”
“그걸 어떻게…….”
“그야 헤르윈은 누가 헤르윈에 대해서 얘기하면 엄청 화내던 걸? 그리고 나를 싫어해도 괜찮아. 나는 헤르윈이 좋으니까!”
루시아가 이까지 드러내며 해맑게 웃었다. 그녀는 어느새 다시 장난감에 정신이 팔렸다.
헤르윈은 우두커니 서서 점차 멀어지는 갈색 머리카락을 바라봤다.
공원에서 느꼈던 간질거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의미 모를 불편함도 느껴졌다.
“이상하네…….”
“헤르윈! 같이 놀자니까?”
“응! 가!”
헤르윈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무시하고 루시아에게 뛰어갔다.
* * *
루시아가 코를 흥얼거리면서 오르골 상자 안에 넣은 것들을 구경했다. 고운 소리가 흘러나오는 오르골은 그녀가 5살 적 신년회 때 받았던 선물이었다.
소파에 앉아, 루시아가 하던 것을 지켜보던 헤르윈이 입을 열었다.
“루시아, 대체 거기엔 뭘 넣어놓은 거야?”
“이건 헤르윈한테도 비밀이야!”
“치, 알려주면 어디가 덧나나.”
루시아가 오르골 상자를 꼭 끌어안으며 절대 보여주지 않으려 하자 헤르윈이 툴툴거렸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 보물 상자라잖아. 자기가 아끼는 것들이 있겠지.”
마침 옆에서 책을 읽던 루카스가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최근 곤충에 빠졌으니 곤충 사체가 있을지도 몰라. 한창 나뭇잎 모았을 땐 저 안에 나뭇잎밖에 없었거든.”
오소소-
오르골 상자에 곤충들이 있을 것을 상상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곤충 아니야. 내 보물이야.”
“저 봐. 저 반응 보니까 곤충 맞네.”
루시아가 불만을 표하며 볼에 바람을 넣었다.
똑똑-
“응, 들어와.”
루카스의 말에 문이 열리고 한 하녀가 고개를 숙였다.
“백작님께서 도련님들과 아가씨를 부르십니다.”
“아빠가? 우리 모두를?”
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모두를 부르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 세 아이는 서로를 쳐다봤다.
그들은 하녀의 안내에 따라 한 방으로 향했고,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안에서 헨리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헨리!”
헨리에게 큰일이라도 난 건가 싶어 헤르윈이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어?”
“어! 저 사람은…….”
곧이어 아이들은 엉엉 우는 헨리를 안은 채 당황하고 있는 누군가를 볼 수 있었다.
“이것 참 곤란하네… 헨리, 정말 내가 기억나지 않는 거니?”
헨리를 안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하일이었다. 일 년 반 만에 보는 그리운 얼굴에 헤르윈이 입을 벌리며 홀린 듯 그에게 다가갔다.
“……아빠?”
쩔쩔매며 헨리를 달래던 하일은 헤르윈을 뒤늦게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세상에, 우리 아들. 정말 많이 자랐구나.”
“……진짜 아빠 맞죠?”
“그럼, 내가 진짜 아빠지 누구겠니. 우리 아들 얼마나 많이 컸는지 한번 볼까?”
예전과 변함없는 하일이 수려한 외모로 부드럽게 웃으며 헤르윈을 번쩍 안아 들었다.
“이런, 많이 무거워졌구나! 보아하니 키도 많이 컸네?”
“아빠다…진짜 아빠다!”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던 헤르윈이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르며 하일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하하하, 헤르윈은 나를 기억해서 다행이구나. 헨리가 나를 못 알아보길래 너도 못 알아보면 어떡하나 걱정했거든.”
“막 2살이 됐을 때 당신이 떠났으니 어쩔 수 없잖아요. 이제부터 서서히 얼굴을 익히면 되죠.”
스칼렛이 그동안의 힘없는 웃음이 아니라 진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온 가족이 모인 것이다.
가물가물했던 기억을 떠올린 루카스가 손바닥을 마주쳤다.
“아, 역시 페네우스 공작님이셨구나.”
“페네우스 공작님이라면…헤르윈 아빠인거야?”
“응, 맞아. 혹시 너 기억 안 나?”
“으음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헤르윈이랑 똑같이 생겼어.”
“그야 그렇지. 헤르윈 아빠인걸.”
루시아는 짧은 시간 동안 같이 생활했던 하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아빠! 이제 우리 같이 있는 거예요? 몬스터는 모두 무찔렀어요?”
“그래, 모든 몬스터를 소탕하고 내려오는 길이다.”
“와아아! 신난다!”
“후후, 이제는 가족 모두 북부로 올라가서 예전처럼 지낼 거란다.”
“네?”
환하게 웃던 헤르윈이 못 들을 것을 들은 것마냥 웃음을 멈췄다. 스칼렛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쁘지 않은 거니? 아빠 보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를 불렀으면서.”
“아빠랑 있는 건 좋은데…….”
헤르윈이 말끝을 흐리며 바닥만 바라봤다. 문가에선 아그네스 남매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럼, 저희 여기를 떠나요?”
“그렇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당연하지 않겠니.”
“……….”
심경이 복잡했다. 진짜 아빠를 만나게 되어서, 이제 모든 가족 다 같이 지낼 수 있어서 날아갈 듯 기쁜데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응? 내 얼굴에 뭐 묻었어?”
헤르윈과 눈이 마주친 루시아가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북부로 가면 더 이상 루시아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 사실이 헤르윈에게 깊은 상실감을 몰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