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루시아 아그네스.
페로스 제국의 나름 명망 있는 아그네스 백작가의 1남 1녀 중 장녀로 대대손손 아들밖에 나오지 않는 아그네스 가문의 귀한 고명딸이다.
조부와 부모, 그리고 2살 많은 오빠로부터 무구한 사랑과 애정을 받고 자라온 그녀는 참으로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헤르윈 페네우스.
제국의 4대 공작 가문 중, 최전방에 위치한 북부 공작가의 2남 중 장남.
그는 훌륭한 가문과 훤칠한 외모는 물론이고, 곧 있으면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를 정도로 출중한 검술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여인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가슴속에 품어봤을 법한 사내가 바로 헤르윈이었다.
루시아도 헤르윈을 마음에 품고 있는 수많은 여인 중 하나였지만 그녀에겐 특이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13년이 넘도록 오로지 헤르윈만을 짝사랑해왔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페네우스와 아그네스는 서로 인연을 이어온 관계로써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교류해왔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루시아와 헤르윈은 소꿉친구로 정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루시아는 8살 적부터 헤르윈에게 반하여 뜨거운 태양만 쫓는 해바라기처럼 오로지 그만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루시아가 헤르윈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어떠한 ‘사건’으로 인하여 그녀가 헤르윈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드러났고, 그를 짝사랑한 기간이 생각보다 길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교계에는 루시아에게 헤르윈의 해바라기라는 별명이 붙었다.
루시아가 헤르윈을 좋아하는 만큼 그도 그녀를 좋아한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헤르윈은 루시아를 친구 그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는 아무 발전 없이 13년이란 세월이 흘러버린 것이다.
결혼 적령기인 19살부터 대다수의 귀족들은 약혼자를 맞이하거나 결혼을 하곤 했다.
하지만 현재 루시아의 나이는 21살. 언제까지 그녀의 사랑을 응원하며 기다릴 수는 없었다.
요한과 줄리안은 오랜 상의 끝에 루시아를 약혼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선이라면…….”
루시아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진정시키며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선 자리 말이다. 이제 더는 너를 기다려 줄 수가 없구나.”
루시아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은 요한을 바라봤다.
그의 푸른 벽안에서 단호함이 엿보였다. 요한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챈 루시아가 치맛자락을 움켜잡았다.
“……언제부터 생각하셨던 거예요?”
“생각이야 몇 년 전부터 해왔지. 네가 페네우스 공자를 포기하기만을 기다리려 했는데 그건 안 될 것 같구나.”
“……….”
할 말을 찾지 못한 루시아는 침묵을 택했다.
그녀도 자신의 처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귀족으로 태어난 이상 가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다른 가문과 결혼해야만 했다.
“내가 너를 위해 괜찮은 가문의 영식들을 뽑아봤다.”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친 요한이 테이블 위에 서류 4개를 올렸다.
“모두 무엇 하나 빠짐없이 훌륭한 자들이다. 우리 아그네스와도 참으로 잘 맞는 가문들이지.”
확실히 요한이 성심성의껏 준비한 것이 눈에 띄었다.
보통은 가문을 위하여 10살 이상 차이 나는 남자와 결혼하라고 들이미는 경우도 허다한데, 요한이 준비한 서류에는 루시아와 5살 이상 차이 나는 사내는 없었다.
“이 사내들과 좋은 자리를 마련해볼 테니 그리 알 거라.”
“……이미 결정하신 거네요.”
이 약혼에 루시아의 의사는 없었다.
언젠가는 이렇게 되리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찾아오니 씁쓸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밝은 성격의 딸이 축 늘어지자 옆에서 그녀의 손을 잡아주던 줄리안과 요한마저 그녀의 눈치를 봤다.
귀하게 낳은 딸이라 그런지 마음이 약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당장 내일 선을 보라는 게 아니야. 네가 마음을 추스른 다음에 봐도 괜찮아.”
“……아니에요, 어머니. 저도 슬슬 짝사랑을 그만둘 때가 됐죠.”
루시아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버거워 보여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줄리안은 딸에게 위로 한마디 건네줄까 싶다가도 단호한 요한의 눈빛에 입을 달싹이는 것에 그쳤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뜻은 뭔지 알겠어요. 저도 이제 아그네스의 일원으로서 그 책임을 다하도록 할게요.”
의외로 루시아가 선 자리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얼마면 되겠니?”
“음… 글쎄요.”
의미심장한 말이다.
시간을 달라고 했으면서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한 말투.
“이번에 정말, 정말 마지막으로 헤르윈에게 제 마음을 고백할 때까지만…….”
분위기가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줄리안은 딸이 안타까워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고 요한은 피곤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부모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서도 루시아는 도저히 헤르윈에 대한 미련을 놓아버릴 수 없었다.
“만약 헤르윈이 기적처럼 저를 받아준다면 그와 약혼해도 될까요?”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약혼한다면 우리야 더할 나위 없이 좋지. 하지만, 페네우스 공자가 거절한다면 군말 없이 선을 보는 게다. 알겠지?”
희망을 품는 루시아와 달리 요한은 지독하게도 현실적이었다.
당연히 거절하리란 말에 상처받을 만도 한데 루시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할게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러운 딸이 반항도 하지 않고 고분고분 따르자 요한은 마음 한구석이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래, 밖에 나갔다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얼른 들어가서 쉬거라.”
“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모두 안녕히 주무세요.”
루시아는 요한과 줄리안에게 가벼운 볼 키스를 남기며 조용히 떠났다.
문이 닫히고 나서도 한참 동안 문가를 바라보던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봤다.
“우리가 너무 갑작스럽게 말한 걸까요? 차라리 차근차근 시간을 줬으면…….”
“지금까지 계속 기회를 줬다는 걸 알잖아. 그리고 이건 당신도 동의한 일이야. 이제 와서 물릴 수는 없어.”
“그건 그렇지만…….”
“……줄리안, 이리 와.”
요한이 손을 뻗자 줄리안이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로 그에게 다가갔다. 마음이 좋지 않은 아내를 요한은 꼭 끌어안았다.
“괜찮아, 모든 게 잘 될 거야. 우리도 정략혼이었지만, 이리 잘 지내잖아.”
“당신을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죠. 하지만, 이런 운이 우리 딸에게도 오리라 생각하기에는…….”
귀족 사회에서의 결혼.
그것도 정략혼은 결혼하는 대상들의 의견을 배제하고 오직 가문과 가문의 결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부분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
밖에서는 신사라고 불리는 남성이 알고 보니 욕설과 손찌검을 일상 삼는 가정폭력범이었다던가, 내조를 잘한다고 알려진 부인이 뒤로는 가문의 재산을 횡령했다던가.
그 외에도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 불륜을 저지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위와 같은 예시는 너무 극단적이라고 쳐도, 성격이 안 맞아서 싸우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정략혼으로 만난 요한과 줄리안은 천생연분이라고 해도 될 만큼 서로 잘 맞았다.
첫눈에 반하여 활활 불타오르는 사랑까지는 아닐지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에 대한 사랑이 서서히 싹터가 지금은 서로가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줄리안은 자신이 1%도 되지 않은 희박한 행운을 거머쥐었음에도 혹독한 현실을 잘 알기에 딸이 걱정되었다.
언젠가는 당연히 해야 할 결혼임에도 그녀가 좋은 배필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다 잘될 거래도? 루시아가 당신을 닮아서 사람 보는 눈 하나만큼은 정확하잖아. 마냥 여린 것 같아도 속은 얼마나 강한 아이인데.”
“당연히 알죠.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줄리안을 다독이면서도, 요한 역시 그녀 못지않게 마음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아내가 진정할 때까지 여린 어깨를 어루만지며 줄리안의 곁을 지켰다.
딸을 걱정하는 부모에게 밤은 지독히도 길었다.
* * *
어두운 밤, 꿈나라로 간 다른 이들처럼 침대에 누운 루시아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멍하니 실크로 만든 캐노피를 바라보다가 두 팔로 눈을 가렸다.
“하아… 약혼이라.”
약혼이라는 단어에 놀라기는 했으나 예전부터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 생각했기에 급작스럽지는 않았다.
그저 아버지에게 그 말을 때에도, ‘드디어 때가 왔구나’ 생각했을 뿐.
루시아는 얼굴을 가린 두 팔을 스르륵 내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에 놓인 등불에 불을 붙이자 타닥 타는 소리와 함께 주황빛 불이 책상을 환하게 비췄다.
책상에는 자주 쓰는 깃펜과 잉크,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 다이어리를 꾸미기 위해 모았던 아기자기한 압화 등등이 보였다.
수많은 물건 중에서도 그녀는 오르골 상자에 손을 뻗었다. 만들어진 지 15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오르골에선 아직도 청아한 소리가 났다.
오르골 안에는 색이 예쁜 돌멩이와 압화 처리된 네 잎 클로버, 손수건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일관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것은 루시아가 가장 아끼는 보물 1호였다.
“헤르윈…….”
루시아는 촉촉하게 젖은 눈을 꾹 감으며 그 함을 소중하게 껴안았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한참을 책상에 얼굴을 대고 있었다. 다갈색 머리카락이 책상 위로 내려앉으며 흐트러졌다.
그렇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따라가자 한 액자가 보였다.
그 액자에는 헤르윈의 어릴 적 모습이 걸려있었다.
* * *
[제국력 723년 12월 28일]
다사다난했던 1년을 보내고, 새로 다가오는 1년을 무사히 보내기 위해 여는 제국의 큰 연례행사, 신년회.
사교계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페네우스 공작가가 이번만큼은 신년회에 참석하기 위해 오랜만에 제도로 내려왔다.
그들은 이번 신년회 동안 아그네스 백작가에서 머물기로 했다.
오랜 기간 친분을 유지해온 가문이기도 했고, 줄리안과 페네우스 공작부인인 스칼렛이 아카데미 시절 둘도 없는 친구였기에 두 사람의 의견을 반영하여 이루어진 결과였다.
그렇게 신년이 시작되기 며칠 전, 12월 28일에 페네우스 공작가는 제도에 도착했다.
“아그네스 백작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인사를 하는 요한을 따라 줄리안이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고, 그 옆으로 그들의 아이들이 제 부모를 따라 서툴게 인사했다.
지극한 환대에 페네우스 공작인 하일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야말로 이리 초대해주어 고맙소.”
“줄리안! 오랜만이야!”
요한과 악수를 나누는 하일 곁으로 공작부인인 스칼렛이 다가왔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그녀는 줄리안을 와락 껴안았다.
줄리안은 처음엔 당황하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근 몇 년 만에 보는 친구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게, 이게 대체 몇 년 만이니? 그동안 잘 지냈어?”
“그럼, 잘 지내고말고. 세상에, 못 본 사이에 혈색이 더 좋아졌네. 백작님이 잘 해 주시나 봐?”
“어머, 너도 참. 못 하는 말이 없어.”
줄리안이 얼굴을 붉히며 스칼렛의 팔을 살짝 때리자 스칼렛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아, 혹시 이 애들이 네 아이들이야?”
스칼렛이 줄리안 옆에 서 있는 두 남매를 뒤늦게 발견했다.
“응, 맞아. 이제 며칠 뒤면 7살이 될 루카스랑 5살이 될 루시아야. 얘들아, 인사하렴. 내 친구란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카스 아그네스라고 합니다.”
“루, 루시아 아그네스입니다…….”
당당한 루카스와 달리 루시아는 우물쭈물 수줍은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너희가 루카스와 루시아로구나. 네 어머니로부터 이야기 많이 들었단다. 루시아는 이번에 5살이 된다지?”
“네에…….”
“내게도 아들이 두 명 있는데, 그중 한 명은 너랑 동갑이란다. 헤르윈, 이리 와 보겠니?”
스칼렛이 뒤에 있는 제 아들을 불렀다.
동갑이라는 소리에 호기심이 일은 루시아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스칼렛 뒤로 한 남자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루시아의 눈이 점차 커졌다.
검은 머리칼과 루비처럼 반짝이는 붉은 눈을 가진 아이.
남자라고 먼저 말하지 않았더라면 여자라고 오해할 만큼 상당한 미모를 가진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