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푸르른 하늘에 구름이 너울너울 헤엄치고, 햇살이 쨍하니 내리쬐는 화창한 날씨.
어느 거대한 저택의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구석에서 남녀 한 쌍이 서 있었다.
남들보다 훤칠한 키에 비단처럼 축 가라앉은 칠흑 같은 머리카락과 피보다도 검붉은 눈동자를 지닌 남성.
지나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길을 휘어잡을 정도로 훤칠한 사내가 건물 벽에 삐딱한 자세로 앞에 있는 이를 내려다봤다.
냉기가 맴도는 것 같은 사내 앞에는 아담한 키의 아기자기한 여자가 우물쭈물 손을 만지작거리며 서 있었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남성만큼이나 눈이 돌아갈 만큼의 미인은 아니지만 꽤나 아름다웠다. 나무처럼 진한 다갈색 머리카락과 화창한 하늘과 같은 푸르른 벽안을 가진 귀여운 여성이었다.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을 질끈 감으며 눈앞에 있는 사내에게 있는 힘껏 용기를 냈다.
“헤르윈! 너를 좋아해! 나랑 사귀자!”
“거절한다.”
단 1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헤르윈이라 불린 남성이 여성의 고백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헤르윈이 귀찮음이 뒤섞인 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위로 쓸어 올렸다.
“루시아, 이번이 대체 몇 번째야. 질리지도 않아?”
고백을 거절한 것치고는 친근함이 묻어있는 말투였다.
루시아가 슬그머니 눈을 뜨며 달아오른 볼을 감추지 못하고 머쓱하게 웃었다.
“흐… 98번째.”
“내 대답이 늘 같은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너도 참 너다.”
헤르윈은 지금 이 상황이 질리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상당히 무안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루시아는 바보같이 헤헤 웃는 것이 고작이었다.
힐끔 그녀를 보던 헤르윈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벽에 기댔던 등을 땠다.
“이쯤 되면 포기할 법도 한데 내가 그렇게 좋아? 네 고백을 받아주지 않는데도?”
잠시 말이 없던 루시아가 이윽고 눈매를 휘었다.
“응, 네가 내 고백을 받아주면 참 좋겠지만, 그게 힘들다면 이렇게라도 내 마음을 전하고 싶어. 그래도 남들이 다 보는 곳에서 고백하지는 않잖아?”
“윽, 16번째 생일 때처럼 공개 고백하기만 해봐. 그러면 너 한 달 동안 안 볼 거야.”
“그건 안 돼!”
가벼운 말투로 내뱉은 헤르윈의 말에 루시아가 장난기 섞인 톤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것뿐이야. 너무 부담 갖지 마.”
21살이나 된 성인이면서 그녀가 내뱉는 말은 순수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이 너무나도 부담스럽게 느껴져 헤르윈이 눈살을 찌푸렸다.
“……루시아 아그네스. 나는 아리스타를 좋아해.”
“……….”
헤르윈이 덤덤하게 자신이 마음에 품고 있는 여인의 이름을 말했다. 그러면서도 루시아가 연신 신경 쓰이는지 그녀의 눈치를 봤다.
루시아의 푸른 벽안에 슬픈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도 알아.”
“하아…….”
헤르윈이 답답한 속을 풀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루시아를 힐끔 바라봤다.
“가자. 여기서 더 늦으면 애들이 오해하겠어.”
“너를 곤란하게 하면 안 되지. 얼른 가자!”
루시아는 다시 본래의 발랄한 모습으로 돌아와 평소처럼 환한 미소를 보였다.
그 모습에 안도한 헤르윈은 먼저 앞서가는 루시아의 뒤를 따라갔다.
고백하고 대차게 차인 여성과, 고백을 받고도 일말의 고민 없이 차버린 남성의 모습치고는 참으로 허울 없었다.
기묘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는 두 사람이 자리를 떠남으로써 없어졌다.
두 사람이 가고 텅 빈 공간에는 짙은 그림자만이 남아 있었다.
* * *
“어, 저기 온다.”
“같이 있었군요. 한참 동안 보이지 않아서 찾으러 가려던 참이었답니다.”
“뭐야, 뭐야. 너네 둘이 따로 밀회라도 가진 거야?”
남녀구분 없이 친분이 있는 이들끼리 가진 사교모임에서 사라졌던 헤르윈과 루시아가 함께 나타나자 사람들이 짓궂은 농담을 하나씩 내던졌다.
헤르윈은 제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에단을 귀찮은 손길로 툭 쳐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거 아니니까 별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아니 그도 그럴 게, 네가 다른 여자도 아니고 바로 ‘루시아’랑 있던 거잖아. ‘루시아’!”
에단은 다 안다는 듯 능글맞은 표정과 함께 눈썹을 위아래로 씰룩였다.
“루시아가 널 좋아한 지도 몇 년이냐? 이제 슬슬 받아줄 때도 되지 않았어?”
에단이 다시 한번 헤르윈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헤르윈이 붉은 눈을 서늘하게 뜨며 고고하게 에단을 내려다봤다.
살의를 띄는 눈빛을 정통으로 받게 된 에단이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그 입 다물어.
붉은 눈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입으로 내뱉지 않았음에도 그의 의사를 정확히 알아들은 에단이 꼬리를 말며 입을 꾹 다물었다.
“에단 말도 틀린 건 아닌데 뭐. 루시아가 널 좋아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잖아.”
이번엔 조용히 차를 마시던 브라이언이 입을 열었다.
그가 긴 머리를 뒤로 넘기자 근처에 있던 하녀들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흐느적 녹아내렸다.
에단과는 다른 의미로 성가신 브라이언이 속을 긁기 시작했다.
“너, 그 입 다물어라.”
헤르윈이 이를 으득 갈며 경고했지만, 브라이언은 에단처럼 뒤로 물러서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는 것에 그쳤다.
능구렁이처럼 제 손아귀를 쏙쏙 피하는 브라이언이 참으로 얄미웠다.
헤르윈의 주먹이 파들파들 떨리고, 이마에는 굵은 핏줄이 우뚝 섰다.
“정말, 루시아도 있는데 못하는 말이 없군요. 루시아, 이 사람들의 말은 무시해요.”
이 자리에 루시아가 없는 것도 아니건만. 사람들이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자꾸만 이름을 들먹이자 잠자코 있던 크리스틴이 입을 열었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 크리스틴. 근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괜찮아.”
루시아는 크리스틴을 진정시키며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런데 진짜로 둘이 어디 갔다가 온 거야?”
이번에 입을 연 사람은 헤르윈이 마음에 담고 있다고 밝혔던 여인, 아리스타였다.
그녀는 헤르윈이 마음에 품은 게 이해가 될 만큼, 여신이 강림한 것 같은 미모를 가진 여인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슬쩍슬쩍 흩날리는 옅은 금발은 꼭 신이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짜낸 금실 같았고,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 안에는 신비스럽기 짝이 없는 보랏빛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루시아가 웃으며 손사래 쳤다.
“아니, 오던 도중에 만난 것뿐이야.”
“맞아, 아무 일도 없었으니 괜한 오해 하지 마, 아리스타.”
헤르윈이 루시아의 말에 사족을 덧붙였다.
아리스타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너희들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더 이상의 의심 없이 무사히 넘기자 헤르윈이 남들 모르게 옅은 숨을 내뱉었다.
그는 슬그머니 루시아와 아리스타 사이에 남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동그란 테이블 위로 서로의 대화가 오갔다.
시답잖은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루시아가 크게 웃었다.
비타민을 뿜어내는 것 같은 상큼한 웃음을 내뱉던 루시아는 남들 모르게 옆을 흘겨봤다.
헤르윈도 지금 나누고 있는 대화가 즐거운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차가운 인상의 그가, 지금은 참으로 따스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옆에 앉은 이에게 향했다.
왼쪽에 앉아있는 루시아가 아닌 오른쪽에 위치한 아리스타에게.
루시아는 잠시 손을 떨다가 테이블보 밑으로 제 손을 감춰, 꽉 마주 잡았다.
에단의 실없는 농담에 아리스타가 호탕하게 웃었다.
아리스타는 귀족의 기품을 잃지 않으면서도 시원하게 웃는 것이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여자인 자신마저 그녀에게 눈길을 빼앗기는데 하물며 그녀를 좋아하는 헤르윈은 오죽할까.
지끈- 지끈-
루시아는 가슴이 조금씩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늘 느껴왔던 불협화음이 오늘따라 유독 거슬렸다.
헤르윈의 고개가 조금이나마 옆으로 돌아가 그의 눈동자에 자신이 담겼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일었다.
‘그럴 리가 없지.’
루시아는 제 바람이 덧없다는 것을 직감하며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자리를 망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이 자리를 즐기자고 마음먹으며 심장을 조금씩 두들기는 송곳을 무시했다.
웃음을 터트리는 이들 가운데에 루시아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 누구도 그녀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만큼 완벽한 조화였다.
* * *
“하아…오늘 재밌었다.”
늦게 끝난 모임 때문에 루시아는 어두운 밤이 되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도 피곤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루시아는 뻐근한 어깨를 문지르며 하녀들에게 웃옷을 건넸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그때, 하얀 머리를 말끔하게 뒤로 넘긴 노신사가 다가왔다. 총집사장인 아론이었다. 루시아가 빙그레 웃음 지었다.
“응, 내가 좀 늦었나?”
“아닙니다, 오랜만에 친우분들을 만나신 것이지 않습니까.”
“후후, 이해해줘서 고마워.”
“백작님께서 아가씨를 찾으십니다.”
아론이 본론을 꺼냈다. 방으로 향하려던 루시아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이 시간에?”
설마 자신이 집에 늦게 와서 혼내려는 건가 싶었다.
“바로 백작님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드릴까요?”
아론이 루시아가 편히 답할 수 있도록 배려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안내해줘.”
아론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바로 백작 부부가 차를 자주 즐기는 다도실이었다.
집무실일 것이리라 예상했던 루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아론이 열어주는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어머니까지 계시네요?”
다도실에는 루시아의 아버지인 요한과 어머니인 줄리안이 있었다.
두 사람은 떨떠름하게 들어오는 루시아를 반겼다.
“드디어 왔구나. 친구들과 재밌는 시간을 보냈니?”
“네…뭐, 그렇죠. 그런데 두 분 모두 이 시간까지 여기서 뭐 하세요? 혹시 지금까지 절 기다리신 거예요?”
루시아가 줄리안의 손을 꼭 잡으며 그녀의 곁에 앉자, 차를 마시던 요한이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평소의 부드러운 눈빛과 달리 엄한 가주의 모습을 하고 있는 진한 벽안을 보고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할 말이 있어서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데요?”
무게까지 잡으며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는 루시아는 괜히 침을 꿀꺽 삼켰다.
“너도 이제 21살이잖니?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지도 오래고.”
‘결혼’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루시아의 몸이 굳어졌다.
“네가 페네우스 공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여태껏 기다려왔지만, 이제는 안 된다.”
“설마 지금…….”
“선을 보거라, 루시아.”
요한과 똑같은 푸른 벽안을 가진 눈이 서서히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