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51장 초월로 가는 길(2)
눈을 떴을 땐, 전생의 방이 앞에 있었다. 붉은색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문. 중앙에는 전생의 방을 차지한 주인의 이명이 각인되어 있다.
‘광기의 전신.’
주신격에 오른 12전생 중, 하나.
‘강해져야 한다.’
현준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전생의 홀에 오기 전 마지막 기억은 검은 창에 심장이 관통된 것.
‘이 기회로, 그놈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5급 인베이더의 무력은 예상외였다. 광기의 전신, 아레스와의 만남에서 티링거를 압도할 무력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광기의 전신은 내게 어떤 힘을 줄 수 있을까? 현준은 긴장한 얼굴로 붉은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전쟁터.’
군단 소환사, 아콘의 방처럼 넓은 평원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황폐화되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망가진 땅이라는 것이었다. 그 죽은 땅의 위에는 널브러진 시체들이 곳곳에서 보였고 찢어진 깃발과 부서진 병장기들도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현준은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왔는가?”
묵직한 위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닿은 곳에 가벼운 갑옷 차림의 남자가 있었다. 그의 몸에서 범상치 않은 마력이 흘러나오는 것을 현준은 보았다.
‘기세를 갈무리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정도라고?’
이것이 주신격이라는 말인가? 신격으로 추정되는 데우스에게서 느꼈던 마력보다 몇 배는 더 강대하고 깊었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광기의 전신이군요.”
“그게 내 이명인가? 나쁘지 않군.”
아레스는 피식 웃으며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바로 시작하지.”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겁니까?”
현준의 물음에 아레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다.
“이곳의 문에 네 앞에 나타났다는 건 네게 ‘자격’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전생의 방, 그 문은 정해진 조건을 충족해야만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시든밀러 때도 그랬으며, 하사신의 경우에도…… 모든 전생이 그랬다.
“그 문을 열고 들어왔다는 건, 네게 강해지고 싶은 열망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아레스가 말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해지지 않으면 죽는다. 그리고 지구는 멸망의 길을 걷겠지. 그런 미래는 피하고 싶었다.
“그런 너에게, 내가 굳이 질문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시원한 대답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럴 필요가 없지요.”
“시작하겠다. 따라와라.”
그 어떤 설명도 없었다. 불친절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지만 오히려 현준은 아레스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5분 정도 걸었다. 발걸음을 멈춘 아레스가 검을 뽑아 휘둘렀다. 허공이 갈라지면서 공허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들어가라, 저 어둠이 널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어둠이 날 강하게 만들어준다고? 마치 하사신 같은 말을 하네.
“너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는군.”
공허한 차원의 틈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현준의 뒷모습을 보며 아레스가 무심하게 툭 던지듯 말했다. 현준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아레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굳이 질문을 해야 합니까? 강해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래, 처음부터 질문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 거죠.”
“마음에 드는군.”
아레스의 얼굴을 보지 않았지만, 목소리에서는 활력이 묻어 나왔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특별히 하나, 조언을 해주지.”
“무엇입니까?”
공허한 저 너머는 미지의 공간. 설명조차 듣지 못했다. 조언을 들을 수 있다면 감사한 일이다.
“무기를 먼저 집어라, 그리고 습격에 대응할 준비를 해라.”
“새겨듣겠습니다.”
“배웅은 여기까지다.”
짧은 조언이었지만 저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무기를 들고 습격에 대응하라는 말로 볼 때.
‘적대적인 존재가 있다.’
현준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는 한 차례의 심호흡을 끝내고 균열 속 깊은 공허를 향해 몸을 던졌다.
* * *
칠흑과도 같은 어둠 속이었다. 하지만 곧 익숙해질 수 있었다. 하사신과의 수련은 그를 어둠에 익숙하게 만들었다. 곧 희미하지만,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기를 먼저 집어라.’
시야가 확보되었다. 현준은 아레스의 조언을 떠올리고 눈동자를 움직여 주위를 훑었다.
어두운 공간, 차가워 보이는 바닥에 꽂혀 있는 검이 보였다. 현준은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달려가 검을 뽑아 들었다.
‘습격에 대응할 준비를 해라.’
아레스의 두 번째 조언. 현준은 기감을 올려 주변을 경계했다. 기척이나 마력 반응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온다.’
긴장 속의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날카롭게 키운 기감이 무언가의 접근을 경고했다.
하나가 아니었다. 살기를 잔뜩 머금고 접근하는 이들의 숫자는 최소 10체. 하나같이 강대한 마력을 품고 있었다.
‘어디냐?’
가까이서 사라졌다.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소멸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쉴 새 없이 시선을 흩뿌렸다. 어둠 속, 숨어 있는 적을 찾아 기감을 세웠다.
‘은신 특화인가?’
적의 정체를 알 수 없다.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주위에 있는 건 확실하다.
‘전생들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레스의 방을 통해 들어온 이곳 역시 전생의 공간에 해당되는 것인지 다른 전생들의 개입이 힘들 것 같았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와라.’
마력을 일으켰다. 검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치면서 주변의 어둠이 조금이나마 물러갔다.
시든밀러의 가호 없이도 오러를 다루는 데 익숙했다.
캬르르륵!
섬뜩한 울음소리. 뭔가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기감의 범위에 들어왔다. 오러 블레이드가 어둠을 갈랐다.
카앙!
금속음과 함께 뭔가에 가로막혔다. 오러 특유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순수 강철인가? 그것도 아니면…….’
최악의 경우, 가죽일 수도 있다. 방금 전의 괴물 같은 울음소리를 생각해 볼 때 어떤 이형의 존재가 갖춘 질긴 가죽일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캬르르륵!
키에에엑!
사방에서 들려왔다. 붉은 눈이 번뜩였다.
“제기랄…….”
욕설이 튀어나왔다. 현준은 검을 휘두르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곳에 살기를 머금은 공격이 쏟아졌다.
쾅!
충격과 함께 지면이 크게 흔들렸다. 어둠 속에서 흙먼지가 일어나는 게 희미하게 보였다.
헛짓을 했다는 걸 깨달은 괴물들의 붉은 눈동자가 현준에게 향했다. 그 시선에서 피에 대한 깊은 갈망이 묻어 나왔다.
“무슨 놈의 살기가…….”
리퍼의 가호보다 진한 것 같았다.
크르르르.
괴물들이 땅을 박차고 현준에게 달려들었다. 이성이 증발하고 본능만 남은 것 같은 추악한 몰골이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완벽한 합격진을 펼쳤다.
“그래, 와라!”
1초를 수십 번으로 나눈 찰나의 순간, 어둠 속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수백 갈래로 쪼개져 흩뿌려졌다. 오러 블레이드의 응용이었다.
흩뿌려진 오러 파편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괴물들의 몸에 꽂혔다. 몇몇은 쓰러졌으나 그들 중 셋은 속력을 잃었을 뿐 집요하게 현준을 노렸다.
‘손톱이었나?’
괴물들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오러 블레이를 막아냈던 것의 정체가 밝혀졌다. 다행히 가죽은 아니었고 기다란 손톱이었다.
“단숨에 끝낸다.”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동시에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검이 휘둘러졌다. 남은 괴물 셋이 팔다리가 잘린 채 무너지듯 쓰러졌다.
-1단계, 통과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레스의 것은 아니었기에 현준은 호기심이 생겼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정면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1단계의 통과가 선언되면서 어둠이 물러갔다. 괴물들의 시체도 가루가 되어 흩날렸고 풍경이 변했다.
사막이었다.
‘뭔가 온다.’
모래 언덕 너머로 폭풍이 일어난 것처럼 흙먼지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바람에 의한 현상이 아니다.
최소 수만 명 규모의 무리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다고 기감이 경고했다.
멀리 보이는 모래 언덕을 넘어서 수만의 군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과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인간이 아니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악마에 가까운 모습들이었다.
-살아남아라.
또다시 들려온 목소리. 저 수만의 군세를 상대하라고? 현준은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하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검을 들고 자리를 지켰다.
그 순간.
하늘에서 수천의 빛기둥이 현준의 주변에 내려꽂혔다. 피하려고 했지만, 적대적인 마력이 느껴지지 않아서 제자리를 지켰다.
빛기둥이 사라지고 그 속에서 수천의 무장 병력이 나타났다. 그들은 정면의 군세와는 달리 인간의 모습이었다.
근거는 없었지만, 현준은 왠지 그들이 아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내뿜는 살기는 정면에서 달려오고 있는 악마들에게 향했다.
수천의 무장 병력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며 악마 군세를 향해 돌진했다.
‘여기서 살아남으라는 건가?’
현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그는 곧 빛의 병사들을 뒤따라 악마 군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악마들은 만만치 않았다. 모든 개체가 최소 SS급 이상의 강자들이었다. 빛의 병사들 역시도 약하지 않았지만, 악마들의 군세에 비해 수가 부족했다.
“큭!”
검붉은 피부의 악마가 내찌른 창이 어깨를 스쳤다. 그리고 현준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상처가 재생되지 않아.’
전생의 방이 가지는 재생 기능이 작용하지 않았다.
‘죽을 수도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의 전생의 방과는 달랐다. 진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준은 굳은 얼굴로 물러나며 오러를 흩뿌렸다.
끼에에엑.
창을 내찔렀던 검붉은 피부의 악마가 오러 파편에 벌집이 되어서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창을 회수하지 못하고 떨어뜨렸다. 그 순간 현준이 한줄기 섬광처럼 거리를 좁히는 것과 동시에 검을 휘둘러 악마의 목을 쳤다.
기분 나쁜 색깔의 피가 솟구치고 머리를 잃은 악마가 힘없이 쓰러졌지만, 아직도 저 너머로 적들은 많이도 남아 있었다.
“전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악마 군단도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물러서지 마라! 우리는 이곳을 지킨다!”
빛의 병사들이 환호를 내질렀지만, 현준은 ‘전신’이라는 단어가 자신을 칭하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레스를 칭하는 건가?’
생각은 길지 않았다. 적들이 계속해서 몰려오고 있었으니, 생각을 정리할 시간 없이 검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아라.’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살아남아 주겠다.’
무슨 수를 써서든, 살아남아서 강해지겠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있을 티링거를 죽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