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173화 (173/217)

# 173

51장 초월로 가는 길(3)

-99단계, 통과했다.

99단계를 통과했다고 울리는 목소리. 현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살아남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계속해서 변화하고 쏟아지는 적들에게서 죽지 않았다.

위기도 있었다. 죽을 뻔한 게 여러 번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현준은 멀쩡히 서 있었다.

99단계에서 죽기 직전까지 몰아 붙여졌지만, 목소리가 통과를 선언하면서 전신에 가득한 치명상이 모두 회복되었다.

아까부터 이런 식이다. 단계를 통과할 때마다 모든 상처가 회복되었다. 시험을 진행하는 중에 재생의 가호가 발동되지 않았다.

‘다음은 뭐냐.’

곧 100단계가 시작될 것이다.

‘뭐든 상관없다. 다 부숴주마.’

현준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99단계의 시험을 넘어오면서 온갖 적들과 마주했다.

악마 군세와도 싸웠고 독과 용암의 향연에서도 살아남아야만 했었다. 지금은 어떤 적이 튀어나와도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신감이 차올랐다.

‘온다.’

뭔가가 있다. 현준은 살기를 머금은 시선을 흩뿌렸다. 99단계의 시험을 통과하면서 그의 감각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실전 경험은 풍부할 정도로 늘었다.

검을 들어 올리는 간단한 동작에도 자신감이 넘쳤다. 날카로운 시선의 끝이 어딘가에 닿았다. 그곳에 흐릿한 잔상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빠르게 가까워졌다. 현준의 검에서도 오러 블레이드가 뿜어져 나왔다. 적을 맞이할 준비는 끝났다.

‘이런!’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잔상의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다. 현준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오러 블레이드가 서로 충돌하면서 사방에 마력 조각이 튀었다.

“큭!”

뒤로 튕겨 나왔다. 짧은 신음성을 삼키며 검을 회수했다. 이 한 번의 충돌로 현준은 확실하게 깨달았다.

‘약하지 않아. 강적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만난 적 중에 가장 버거운 상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단계라는 무게에 어울리는 적이다.

‘어떤 놈이냐…….’

얼굴을 보고 싶었다. 차분하게 정면을 경계하며 조금 전의 충돌로 일어난 흙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자욱한 안개와 같았던 흙먼지가 물러나면서 습격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순간.

“이런, 제기랄!”

현준은 그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동공이 흔들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선명해진 시야, 정면에 허리를 편 채 검을 들고 있는 이는 강현준, 자신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건 그냥 똑같은데?’

도플갱어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였다.

‘나 자신을 뛰어넘으라는 뜻인가?’

현준은 도플갱어의 무력이 자신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라 본능적으로 확신했다.

“와라.”

가벼운 도발. 하지만 도플갱어는 선뜻 행동하지 않았다. 자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는 순간, 현준이 빈틈을 파고 들어올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에 성벽처럼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그것은 현준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기랄…….’

지루한 대치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현준과 도플갱어는 여전히 서로를 노려보며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끝이 없다.’

현준은 먼저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타앗.

땅을 박차고 하늘 위로 솟구쳤다. 마력을 뒤로 분사하여 가속을 얻은 상태에서 그대로 도플갱어를 향해 내려꽂혔다.

콰앙!

굉음과 함께 땅이 꺼졌다. 거대한 크레이터 중앙에서 현준과 도플갱어가 살벌한 검격을 주고받고 있었다.

전생의 가호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순수한 마력과 오러 응용으로 승부를 봐야만 했다.

다행히 도플갱어 역시도 가호의 사용은 제한되어 있는 것 같았다.

‘가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면…….’

난 아마 끝장이 났겠지. 하고 현준은 생각했다.

“큭!”

신음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10초 동안 수천 번 이상의 검격을 주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승부가 나지 않았다.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들다고 말한 누군가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계를 뛰어넘어라.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야 하는 싸움이었다.’

현준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장기전으로 갈수록 곤란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전력을 다해서 한계를 넘어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승부가 날 리가 없었다.

도플갱어를 응시하는 시선에서 차가운 살기가 묻어 나왔다. 현준은 그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미소를 머금은 채 모든 마력을 끌어 올렸다.

우우웅!

바람이 전율했다. 땅이 흔들렸다. 모든 마력을 게워내듯 쏟아냈다. 마력은 힘이 되어 현준의 신체를 강화시켰다. 질드레의 가호를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현준은 강화 술식을 배워서 사용법과 이론을 알고 있었다.

“그 지옥 같은 시간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강화 술식이 몸을 뒤덮었다. 심상치 않은 마력의 유동, 그제야 도플갱어가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끼고 행동했다.

술식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마력에 의한 단순 강화는 펼친 것인지 그의 몸에서 푸른 오러가 피어올랐다.

“늦었어.”

차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다가오는 도플갱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두꺼운 철 기둥 같은 두께의 거대한 오러 블레이드가 도플갱어를 노렸다.

그는 검을 들어 올려 방어를 시도했지만, 현준의 것에 비해 너무나 초라한 오러 블레이드였다.

콰앙!

굉음이 터졌다. 도플갱어의 오러 블레이드가 박살 났다. 그는 황급히 오러 블레이드를 재생성했다.

“쿨럭!”

도플갱어가 기침과 함께 입 밖으로 붉은 피를 토해냈다. 급하게 오러 블레이드를 재생성하느라 내상을 입은 모양. 마력로가 꼬인 것이다.

씨익.

현준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기세가 무너졌나?’

틀림없다. 이대로 밀어붙인다면 이길 수 있다. 승기를 잡은 것 같았다. 하지만 현준의 상태도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오래 끌면 나도 위험해.’

질드레의 마력 없이 수준 높은 강화 술식을 유지 중이었기 때문에 마력로가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눈과 귀, 그리고 코와 입에서 붉은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차가운 시선이 도플갱어에게 닿았다. 그리고 현준이 땅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검을 휘둘렀다.

도플갱어의 재생성된 오러 블레이드는 수십 번의 검격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한번 처참하게 박살 났다.

‘끝이다.’

현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살기를 머금은 시선 끝에 도플갱어는 무표정으로 검을 버리고 오러 실드를 생성했다.

“막을 수 있을 것 같냐!”

하늘을 향했던 검이 도플갱어를 향해 내려꽂혔다. 오러 블레이드는 오러 실드를 반 토막 내고 깊숙이 파고 들어가 도플갱어의 몸을 두 쪽으로 쪼갰다.

“수고했다.”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것과 동시에 아레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플갱어가 쓰러져 있던 바닥에 꽂혀 있던 시선을 거두고 현준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아레스가 있었다.

“이제 너는 자격을 갖췄다.”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현준은 아레스를 겨우 1번 봤을 뿐이지만, 그가 대부분의 설명을 생략하는 타입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너무 생략했다. 조금의 설명은 필요했기에 현준은 조심스럽게 요청했다.

“신격이 될 자격을 갖췄다는 말이다.”

신격. 드높은 존재. SSS급 위에 군림하는 자들. 아레스는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설명을 덧붙였다.

그가 설명을 끝내고 입을 닫았을 때, 현준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너무 들뜨지 마라, 신격이라고 해도 별거 없으니까.”

아레스가 무심한 듯 말했지만, 현준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주신격의 시선에서 볼 때는 신격의 경지가 낮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지.’

신격.

그 경지에 대해 자세히 들은 바는 없다. 하지만 SSS급 최상위보다 높은 지점에 있다는 건 알았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설명을 해주면 좋겠는데요? 뒷말을 삼켰지만, 아레스는 현준의 마음을 짐작한 것인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마음이 급하군. 당장에라도 주신격이 되고 싶지?”

아레스의 물음에 현준음 침묵을 지켰다.

“그 마음, 다 안다.”

당장에라도 적을 박살 내고 싶을 테지, 아레스가 덧붙였다. 현준은 대답 대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기에 네게 신격을 내리는 것이다. 강현준.”

아레스는 현준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황금의 검이 들려 있었다.

분위기상 신격 임명에 필요한 도구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왼쪽 무릎을 꿇어라.”

아레스가 말했다. 현준은 그대로 따랐다. 마치 주군에게 서약을 맹세하는 기사처럼 왼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렸다.

“너를 신격으로 임명하마.”

황금의 검이 오른쪽 어깨에 닿았다.

“우리의 모든 것을 걸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막아내라.”

황금의 검이 왼쪽 어깨에 닿았다.

“너를 신격에 임명한다.”

아레스는 황금의 검을 회수했다. 그리고 현준의 앞에 힘차게 꽂았다.

“그 검을 뽑아라, 그 순간부터 넌 신격이 된다.”

현준은 말없이 황금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 순간 검신에서 시작된 기운이 오른팔을 통해 스며들어 왔다. 신격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신성한 기운은 아니었다. 그저 압도적인 마력일 뿐이다.

전신을 채우는 마력 특유의 충족감에 현준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아레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별거 없네요.”

“그래, 별거 없다.”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지만 무심하게 툭 내뱉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레스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가기 전에 조언을 하나만 더 해주겠다.”

“새겨듣겠습니다.”

“너는 이제 신격이 되었다.”

아레스의 말에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계속 말씀하시지요.”

현준이 부드럽게 재촉했다.

“신격이 되었다는 게 뭘 뜻하는지 아느냐?”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걸 뜻하지 않을까요?”

“그것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게 하나 있지.”

의미심장하다. 중요한 순간에서 말을 끊었다.

현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는 아레스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귀를 열었다.

“신격의 마력은 침략사령부의 검은 마정석을 다룰 수 있다.”

“검은 마정석을……?”

“더 말해주고 싶지만, 시간이 없군. 잘가라, 가서 반드시 이겨라.”

아레스가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현준은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아래에서부터 몸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뭐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전생의 방에서 나갈 때는 늘 시야가 검게 물들거나, 자신의 의지로 나간 게 대부분이었다.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건 처음이었다. 마치 누군가 강제로 추방하는 것 같았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레스가 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자 눈앞에서 더 이상 현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그의 뒤로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왔는가?”

아레스가 로브를 입은 남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조율자여.”

“재밌는 짓을 하셨더군요. 아레스.”

“주신격 중에서도 가장 인간과는 거리가 먼, 네놈이 ‘재미’라는 것도 느끼나?”

피식 웃으며 아레스가 답했다. 조율자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후드 아래 작은 어둠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형벌은 알고 있지요?”

“하사신처럼 잠깐 쉬는 건가?”

아레스의 물음에 조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레스, 당신은 영원히 쉬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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