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11장 고결한 성기사(5)
자정을 넘긴 늦은 시간. 현준과 레이스 길드 공략팀이 클리어한 던전의 입구에 검은 세단 1대와 승합차 2대가 정차했다.
게이트 앞을 지키고 있던 던전 관리국 보안과 직원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정차된 차들의 문이 벌컥 열리고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이들이 일사불란하게 하차했다.
“어, 어디 소속이십니까?”
보안과 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검은 정장의 무리에서 안경을 쓴 깔끔한 인상의 남자가 천천히 거리를 좁혀왔다.
분위기로 볼 때 그가 리더인 것 같았다.
“던전 관리국 조사과 4팀장 이진형입니다. 상부에서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정확한 시간이 전달되지 않아서 오전에 도착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럴 예정이었습니다만, 사소한 일정 변경이 있었습니다.”
“그, 그렇군요. 지금 게이트를 열겠습니다.”
보안과 직원이 손짓하자 다른 이들이 지하의 던전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열었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진입한다.”
진형은 보안과 직원들이 옆으로 물러나기 무섭게 발걸음을 옮기며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조사과 4팀이 뒤따랐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던전의 입구가 나타났다.
“너무 긴장하지 마라. 이미 클리어된 던전이니까. 마수가 나타날 일은 없다.”
오늘 조사에는 신참이 1명 섞여 있었기 때문에 진형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이미 사전에 교육받았겠지만, 이렇게 현장에서 재확인까지 받으면 심리적으로 많이 안정된다는 걸 진형은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 정밀 조사를 시작한다. 모두 움직여.”
“예! 알겠습니다!”
힘찬 대답과 함께 조사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조사팀은 던전 곳곳에 남아 있는 잔존 마력을 수집하고 분석하며 깊숙한 곳으로 전진했다.
상부에서 최대한 빨리 조사를 끝내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진형은 조사를 진행하면서도 부하들을 거듭 재촉했다.
거의 쉬지 않고 움직인 덕분에 보스방의 조사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끝났다.
진형은 조사팀과 함께 워프 게이트를 이용해 던전 밖으로 나왔다.
“데이터 정리했어?”
“일단은 대분류만 나눠서 정리해 두었습니다. 지금 보내 드리겠습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차를 타고 던전 관리국으로 이동하는 중에 조사 자료의 전달과 정리가 이루어졌다.
“어떻습니까?”
자료를 정리해서 넘긴 조사관이 진형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에게는 정리된 자료를 바탕으로 던전 등급을 판정할 정도의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궁금했던 것이었다.
“길드 공략팀이 클리어했다고 했었나? 어디 길드 소속인지 혹시 알고 있어?”
“레이스 길드 소속이라고 들었습니다.”
“레이스…….”
진형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말끝을 흐렸다. 이름은 들어본 적 있었다.
‘구’ 에코와의 길드전에서 길드장이 엄청난 무력을 선보였기 때문에 레이스의 이름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진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걸 본 조사관이 물었다. 진형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공략팀 자료 가지고 있지?”
“예, 필요할지도 모를 것 같아서 공략 사무과에서 자료를 받아왔습니다.”
“보내줘.”
“지금 보내 드리겠습니다.”
조사관이 태블릿을 몇 번 터치하자 자료가 전송되었다. 그리고 그걸 읽는 진형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떨렸다.
“팀장님?”
“던전에 진입한 공략팀 인원 중에 가장 등급이 높은 헌터는 A급이었고…… 그마저도 한 명이었다고? 확실한 자료겠지?”
“물론입니다. 확인 절차까지 끝난 겁니다.”
“조사 결과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방금 그 던전은 S급 최하위 판정을 받을 거다.”
진형의 말에 조사관은 큰 충격을 받았다.
“네? 하지만 제가 확인한 공략팀의 전력으로는 S급 던전의 클리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 하지만 조사 자료가 잘못되었을 리는 없지.”
“만약 사실이라면 엄청난 이슈가 되겠군요.”
“레이스는 재평가받겠지.”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차가 멈췄다. 던전 관리국에 도착한 것이다. 진형은 태블릿 PC와 서류철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나머지는 사무실로 가서 이야기하지.”
그리고 차에서 내려 던전 관리국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이들이 조사팀을 포위하듯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진형은 본능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는 B급 마법계 헌터이기도 했다.
“어디서 나오셨습니까?”
진형이 마력을 거두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던전 관리국 건물 안이었기 때문에 별일 없을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사과 3팀장입니다.”
리더로 보이는 이가 앞으로 한 걸음 나오며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내사과에서 무슨 일로……?”
“조금 전에 던전 조사를 끝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관련 자료를 모두 넘겨주셨으면 합니다.”
“자료를요?”
내사과 팀장의 요구에 진형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자세한 내용은 기밀이라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어떤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 자료가 필요하다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예상대로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던전 관리국 내사과는 비밀스러운 자들이다. 이 정도만 해도 많은 걸 말해줬다고 할 수 있었다.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내사과 팀장은 예의를 갖춰 물었지만, 처음부터 진형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던전 관리국 내에서도 내사과가 가지는 권한은 엄청났다.
상부의 정식 명령만 있으면 그들은 어떤 부서라도 조사할 수 있었고, 던전 관리국 내부에서 출입할 수 없는 공간이 없었다.
“협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모든 자료가 내사과 3팀에 넘어갔다.
* * *
꿈에서 깨어났을 때는 오전 11시에 가까운 늦은 아침이었다.
혹시나 한 마음에 스마트폰을 확인했지만, 부재중 전화나 메시지는 없었다.
태민이 오전에 연락하기로 했었지만, 현준의 몸 상태를 배려해서 연락을 미룬 것 같았다.
“후우!”
현준은 짧게 심호흡한 뒤, 차가운 물을 한 잔 마시는 것으로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그리고 바로 2층으로 내려갔다.
2층은 소란스러웠지만, 소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아원 동생들이 거실을 뛰어다니며 놀고 있을 뿐이었다.
“소진이 누나는?”
“아직 자고 있어요.”
작은 공을 들고 뛰어다니며 놀고 있던 남자아이에게 묻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도 많이 피곤할 것이다. 갑작스럽게 힘을 얻었으니, 당분간 심리 상태가 혼란스러울 수도 있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휴식과 함께, 생각을 정리하면서 힘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동생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현준은 경호원들이 지내는 1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이 끝나는 곳의 정면에 위치한 거실 소파에 태민이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곧 현준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쉬고 계시는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피곤했는데…… 고마워요.”
현준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태민이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다가왔다.
“2시간 전에 던전 관리국으로부터 연락받았습니다. 일단 길드 사무소로 가면서 계속 이야기하시죠. 차가 대기 중입니다.”
차고 쪽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기자 대기하고 있던 태민이 뒤따랐다.
차고에서 운전기사가 차량과 함께 대기 중이었지만 태민은 그를 돌려보내고 본인이 운전석을 잡았다.
현준이 뒷좌석에 탑승하자 차량이 출발했다.
“던전 관리국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오늘 오전에 조사 결과가 나왔다고 하더군요.”
현준의 물음에 태민이 대답했다. 공략이 끝나고 클리어가 되더라도 던전이 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던전 관리국에서 절차를 밟아 폐쇄를 진행해야만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조사팀 파견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폐쇄 절차는 임시 중단된다.
“판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S급 최하위 던전으로 판정되었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나왔네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사전 조사에서 히든 던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공략 일정을 잡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 B급 난이도였다.
그런데 S급 최하위의 히든 던전이라는 사실을 던전 관리국에서는 알고 있었다고?
“알고 있었다고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누군가가 사전 조사 결과를 고의로 누락한 것 같습니다.”
차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실수’가 아닌 ‘고의’라는 게 중요했다.
“고의로 누락된 게 확실합니까?”
“던전 관리국 내사과에서 확인했습니다.”
청렴하기로 유명한 내사과의 조사 결과라면 믿을 수 있다.
“내사과는 웬만해서는 움직이지 않는 거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현준이 물었다. 내사과의 엉덩이가 무겁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저희 쪽에서도 갑자기 내사과가 움직인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지금 상황에서 조심스럽게 추측한다면…….”
신호등이 붉게 물들고 차가 멈췄다. 태민은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빠르게 훑더니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떤 세력이 저희 길드 공략팀에 손실을 주기 위해 던전 사전 조사 결과를 누락하거나 조작했고, 그 과정에서 증거가 남았거나, 그 세력과 반대되는 제3의 세력이 정보를 내사과 쪽에 흘리면서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흘러들어 왔거나, 확보하고 있었다면 약 12시간 만에 내사 결론을 낸 것도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그 ‘어떤 세력’에 대한 정보는요?”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구’ 에코의 배후 세력이 분명합니다.”
태민의 대답에 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한동안 조용하다 싶었는데 이렇게 견제가 들어올 줄은 몰랐다.
과거 에코와의 본격적인 길드전이 발생했을 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답답하고 기분이 나빴다.
대부분의 정보가 드러난 이쪽과 달리 ‘배후’ 쪽은 철저하게 숨어 있었다.
현재 레이스의 정보력으로는 그들에 대한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어둠 속에서 심장을 노리는 칼날과도 같았다.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제가 확보한 최나영 비자금의 절반을 길드 자금으로 활용하겠습니다. 그걸로 집행부와 정보부의 전력을 강화하세요.”
과거 최나영의 비자금은 대부분 현준에게 흘러들어 갔고 레이스가 길드 자금으로 확보한 건 일부에 불과했다.
그렇게 하는 게 세탁이 편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후로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기 때문에 추가 세탁을 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절반이면 현 길드 집행부와 정보부의 전력을 3배 이상 강화할 수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진행하세요. 적이 공격을 시작할 때 우리는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