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40화 (40/217)

# 40

11장 고결한 성기사(4)

“홀리 스피어!”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성스러운 마력의 창이 오크 검성의 발치에 꽂히는 걸 본 소진은 분한 마음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위력적인 공격 기술을 다루기에는 아직 숙련도가 부족했다.

“힐!”

소진은 홀리 스피어를 계속 사용하는 대신 ‘강현준’의 부상을 완전히 회복시키는 걸 선택하고 치유를 시전했다.

그의 상처 부위에 다시 한번 백색의 빛이 깃들면서 회복이 시작되었다.

“됐다!”

부상 대부분이 회복되었다. 현준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오크 검성에게 달려들었다.

소진 덕분에 부상 대부분을 회복한 그와 달리 오크 검성은 여전히 피투성였다.

복부와 흉부에만 관통상이 각각 하나씩이었고 팔과 다리도 성치 않았다.

S급 마수의 질긴 생명력이 아니었다면 이미 쓰러져서 죽어가고 있을 정도의 부상이었다.

“카르타고!”

“이, 인간……!”

현준은 카르타고의 이름을 외치며 방패에 깃든 가호를 강화했다.

오러 실드가 더욱 선명하게 빛나자 오크 검성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는 이미 한계였다.

“하앗!”

기합과 함께 일순간에 거리를 좁히며 검을 휘둘렀다.

“커헉!”

날카로운 오러 블레이드는 지친 오크 검성의 왼팔을 단숨에 절단했다.

검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오크 검성은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내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현준은 그를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홀리 스피어!”

소진이 던진 성스러운 마력이 창이 퇴로를 차단하자 현준이 한 줄기의 섬광처럼 달려들어서 검을 휘둘렀다.

오크 검성은 방어를 시도했지만 오래 버터지 못했다. 5번의 공방 교환이 끝나기 전에 그의 심장에 검이 꽂혔다.

“쿨럭…….”

오크 검성은 검붉은 피를 토하며 힘없이 쓰러졌다.

그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현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신성 마법’과 ‘힐’로 원호하고 있던 소진이 달려왔다.

그녀는 현준의 앞에서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현준아, 괜찮아?”

“저는 괜찮아요. 다른 사람들을 부탁할게요.”

침착하게 소진을 달래며 공략팀의 다른 헌터들을 부탁했다.

각성 직후, 현준에게만 힐을 집중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그녀는 쓰러져 있는 헌터들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힐!”

쓰러진 이들에게 백색의 마력이 닿았다.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부상이 회복되었다. 극심한 고통과 과다출혈 등으로 정신을 잃었던 이들도 하나둘, 낮은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세상에…… S급 마수를…….”

가장 먼저 회복을 끝낸 최인기가 다가왔다. 그는 놀란 마음에 말을 끝맺지 못했다. 시선은 오크 검성이 남긴 마정석에 고정되어 있었다. 시체는 시간이 지나서 소멸한 뒤였다.

“S급 마수는 처음 봤습니다.”

인기가 솔직하게 말했다. B급 헌터에 불과한 그가 S급 마수를 봤을 리가 없었다.

하위나 최하위는 A급 던전에서도 보스로 출현하기는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오크 검성이 튀어나올 때까지만 해도 죽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냥에 성공할 줄이야…….”

“감탄은 나중에 하고 피해 상황부터 보고하세요.”

현준이 인기의 말을 잘랐다. 오크 검성의 출현으로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라 예상하는 탓에 다소 경직된 목소리였다.

“몇 명이나 죽었습니까?”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확실합니까?”

“조금 전에 확인했습니다.”

의식을 차리고 회복을 끝낸 헌터들이 하나둘씩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인기의 말대로 죽은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중상을 입었던 이들도 소진의 ‘힐’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던전 밖으로 통하는 워프 게이트까지 이동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워프 게이트가 활성화된 걸 확인했습니다.”

보스의 죽음으로 안전이 확인되었다. 공략팀의 헌터 한 명이 워프 게이트의 확인을 끝내고 밝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S급 마수의 앞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모두가 들뜨고 기쁜 표정이었다.

죽은 사람이 한 명도 없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좋았다.

공략팀 헌터들이 전원 무사한 걸 확인한 현준의 눈동자는 이윽고 소진에게 향했다.

시선이 닿는 걸 느낀 것인지 소진 또한 현준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준아…… 나도 잘…….”

“자세한 건 나중에 들을게요.”

“나, 나는…….”

“전부 이야기해 줄 거죠?”

“다, 당연하지.”

현준의 물음에 소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현준에게 모든 걸 말할 생각이었다.

지금 갑작스럽게 찾아온 2차 각성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에 안정시켜 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다.

“돌아갑시다.”

인기가 말했다. 워프 게이트가 작동되었다는 건 던전이 클리어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인기와 공략팀 헌터들이 차례대로 워프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환한 빛과 함께 그들의 몸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현준과 소진이 워프 게이트 안으로 들어섰다.

환한 백색의 빛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이윽고 시야가 회복되었을 땐 더 이상 목숨을 위협받았던 던전 내부가 아니었다.

“길드장님. 최인기 씨한테 대충 사정은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던전 관리국 직원을 붙잡고 사정을 설명하고 있는 인기를 대신해 태민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난 괜찮아요. 공략에 참여했던 다른 길드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잠깐 사이에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정밀 검사를 받으러 근처 병원으로 보냈습니다. 길드장님께서도…….”

“전 괜찮아요. 그냥 빨리 쉬고 싶네요.”

“여기는 저와 최인기 씨한테 맡겨주시죠.”

현준의 솔직한 말에 태민이 대답했다. 던전 관리국 직원에게 히든 던전의 존재를 보고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조사관이 던전이 폐쇄되기 전에 투입되어 진상을 파악하고 마정석 외의 추가 보상을 책정한다.

지금 태민은 피곤한 현준을 대신하여 인기와 함께 던전 관리국 직원을 상대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 부탁할게요.”

그의 호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소진도 당장 휴식이 필요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차량이 대기 중입니다.”

“고마워요.”

“편히 쉬십시오. 진행 상황은 내일 오전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오후 8시를 넘긴 시간이었으니 아침 일찍 연락이 온다고 해도 휴식을 취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시간이 충분했다.

현준은 소진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고 자택으로 돌아갔다.

소진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현준의 피곤한 얼굴을 보고는 먼저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를 2층으로 올려보내고 현준도 마당에서 잠시 바람을 쐬며 생각을 정리하다가 자신의 공간인 3층으로 올라가 침실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 * *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문이 눈앞에 있다.

“로마노프…….”

현준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화려한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들어오라.”

융단의 끝이 닿는 곳에 있는 황좌에서 로마노프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고 내부는 넓었지만, 목소리는 선명하고 크게 들렸다.

현준은 융단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그는 로마노프의 앞에 도달했다.

“당신입니까?”

“어떻게 알았나?”

“당신의 마력이 느껴졌습니다.”

로마노프의 가호를 사용하면서 그의 마력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전투 중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제게 설명해줄 수 있습니까?”

궁금한 게 많았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로마노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었다.

“처음부터 그 ‘던전’에는 ‘힘’이 잠들어 있었다. 짐이 행한 것은 아주 사소한 ‘간섭’일 뿐이었지.”

2차 각성자가 가장 많이 탄생하는 곳이 히든 던전이라는 사실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았다.

아직 던전 관리국의 공식적인 조사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오늘 공략한 던전은 히든 던전이 분명했다.

“그 던전에 2차 각성을 유도하는 마력이 잠들어 있었다는 말입니까?”

“2차 각성? 그래, 단어의 선택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건 잠재능력을 각성시키는 ‘힘’이 잠들어 있었고 그대의 신하는 그 시험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짐에게는 ‘신하’의 운명이라면 아주 사소한 ‘간섭’을 행할 힘이 남아 있다는 것이지.”

신하의 운명 간섭, 그건 로마노프가 가지고 있는 권능 중 하나였다.

“누나는 제 신하가 아닙니다.”

“그대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짐의 권능과 가호가 그녀를 그대의 ‘신하’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저는 그런 걸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그게 결정되는 기준이 뭡니까?”

현준이 질문했지만, 로마노프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리며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은 황좌 뒤에 걸려 있는 ‘황제의 깃발’로 옮겨갔다.

“그건 지금 말해줄 수 없다.”

“그런…….”

“때가 되면 그대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궁금한 건 없느냐?”

로마노프의 대답에 현준은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생각을 정리한 뒤,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지금 소진이 누나 말고도 다른 ‘신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로마노프, 당신의 권능이 ‘신하’라고 인식한 사람 말입니다.”

“있다.”

“누구입니까?”

“그건 알려줄 수 없다. 하지만 몇 명인지는 이야기해 줄 수 있지.”

현준은 로마노프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보기와는 달리 비밀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았다.

“좋습니다. 몇 명입니까?”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알 수 있는 정보만 확보해도 모르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성기사’를 제외하면 1명이다.”

“그렇습니까?”

“실망하지 마라. 지금은 성기사를 포함해서 2명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늘어날 거다. 나의 힘은 그런 종류니까.”

로마노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의 충성심은 짐조차도 감탄이 나올 정도군. 그대에게는 군주의 자질이 있는 모양이다. 역시 짐의 환생답다.”

충성심 강한 신하. 현준은 그가 누군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김태민……’

최근 그의 행동을 보면 ‘신하’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였다.

현준이 머릿속을 정리하는 동안 로마노프가 다시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누군지 알 것 같다는 표정이군.”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를 잘 활용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의 ‘진명’은 알고 있겠지?”

로마노프의 물음에 현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맹신하는 눈먼 기사.’

그게 태민의 진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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