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11장 고결한 성기사(3)
오크 검성. 하위에 속하지만, S급 마수의 출현에 공략팀 헌터들은 경악했다.
“도, 도망…… 커헉!”
또 다른 헌터가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오크 검성은 다음 목표를 물색하기 위해 시선을 흩뿌렸다.
그리고 소진이 있는 곳에서 그의 눈동자가 멈췄다.
후방을 장악한 상황에서 회복계 헌터를 노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제, 제기랄!”
소진이 위험하다. 현준은 달리기 시작했고 인기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뒤로 물러나요!”
인기가 소진의 후드를 붙잡고 뒤로 던졌다. 과격한 방법이었지만 그녀를 살리려면 다른 방법은 없었다.
뒤이어 완성된 화염 장벽이 오크 검성과 소진의 중간 지점을 가로막았다. 결국, 검성의 칼날은 다른 이들에게 향했다.
“크아아악!”
“으아아악!”
현란한 칼춤을 추는 모습은 분풀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든 헌터들이 무력하게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현준은 피가 새어 나올 정도로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급소는 피했나?’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니었다. 부상자를 남겨놓는 것으로 현준의 집중을 분산시킬 의도였다.
‘악랄한 놈이야.’
어느새 코앞까지 거리가 좁혀졌다.
“힐!”
소진의 목소리와 함께 마력의 이동이 느껴졌다. 쓰러진 헌터들의 상처에 새하얀 치유의 빛이 차례대로 깃들었다.
소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지금 무리하고 있었다. 다수의 인원을 한 번에 치유하는 건 쉽지 않은 기술이다.
품고 있던 마력은 순식간에 빠져나갔고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최대한 빨리 제거한다.’
무리하고 있는 소진의 모습을 힐끗 살핀 현준은 현란하게 검을 휘두르며 오크 검성에게 달려들었다.
어둠 속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푸른빛을 내뿜으며 오크 검성의 왼팔을 노렸다.
“큭!”
현준이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해내며 뒤로 물러났다. 복부에서 피가 쏟아졌다. 분명 먼저 오크 검성의 왼팔을 노렸지만 당한 쪽은 자신이었다.
“제기랄!”
욕설을 내뱉으며 검을 휘둘러 오크 검성의 적극적인 전진을 저지했다.
전생의 방에서 최후의 검성, 시든밀러에게 최강의 검술을 사사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완벽하지 소화하지 못했다.
S급 하위 마수 중에서도 검술에 조예가 깊은 오크 검성을 상대하기에는 아직 수련이 부족했다.
“상위 검술 중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검술을 구사하는군. 너는 검성의 제자인가?”
오크 검성이 검격을 퍼부으며 물었다. 현준은 그 공격들을 방패로 막아내며 슬쩍 고개를 들었다.
“대답해야 하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크아아악!”
고통이 느껴졌을 땐 이미 휘둘러진 검이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간 뒤였다.
핏물이 튀고 오크 검성은 두 번째 공격을 이어가기 위해 서둘러 검을 회수했다.
하지만 그건 현준도 마찬가지다. 들어 올린 검은 오크 검성의 취약한 곳을 노리고 있었다.
“힐!”
뒤에서 소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허벅지의 상처가 조금씩 회복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속도가 평소보다 느렸다. 그녀는 이미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힐끗 시선을 옮기니 파랗게 질린 소진의 얼굴이 보였다.
‘마력 탈진…….’
지나친 마력 소모로 인한 현상이다.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을 테지만 그녀는 힐을 멈추지 않았다.
“혀, 현준아…… 내가 도와줄게…….”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에서 처절함이 느껴졌다. 현준은 마음을 다잡고 오크 검성을 향해 검을 내찔렀다.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사방에 마력 파편이 튀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둘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갔다.
언뜻 보기에는 접전이었지만, 사실은 현준이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전생의 방에서 수련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검술에 특화된 S급 하위 마수를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소진은 ‘힐’을 멈추지 않았지만, 격렬하게 움직이는 상황에서 마력이 바닥난 회복계 헌터의 힐이 제대로 효과를 보일 리가 없었다.
“큭!”
입 밖으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오크 검성의 검이 방패를 교묘하게 흘리고 들어와 복부에 꽂힌 것이다.
하지만 현준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가 휘두른 검 또한 오크 검성의 가슴팍을 깊게 베었다.
“이, 인간 따위가!”
오크 검성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지만, 황급히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현준 못지않은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연격을 펼치는 것은 무리였다.
공격이 중단되고 거리가 벌어진 사이 현준도 자세를 재정비했다.
“힐!”
소진의 지친 듯한 목소리와 함께 백색의 빛이 상처에 깃들었다. 현준은 짧은 순간 눈동자를 움직여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좋지 않았다. 얼굴이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력 탈진이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녀는 힐을 멈추지 않았다. 현준뿐만 아니라 쓰러진 헌터들 모두에게 ‘힐’을 쏟아내고 있었다.
‘출혈이 심해…….’
방어 자세를 취한 상태에서 오크 검성을 경계하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시야가 조금 흐릿해질 정도의 과다 출혈이었다.
단치히의 가호와 소진의 미약한 힐이라도 없었다면 이미 쓰러졌을 정도였다.
‘안 돼…….’
현준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자신이 쓰러지는 순간 공략팀은 전멸하고 소진은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는 고통을 무시하며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 * *
“크아아악!”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현준의 목소리였다. 그는 모두를 지키기 위해 오크 검성과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소진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검격을 교환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현준이 피투성이가 되어 가고 있다는 건 그녀도 알 수 있었다.
“제발! 제바아아알!”
소진은 애원하듯 절규하며 마력을 끌어올렸지만, 이미 마력이 바닥난 상태에서의 힐이 제대로 먹힐 리가 없었다.
현준의 부상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오크 검성과의 교전에서 상처가 늘어나기만 했다.
“힐! 힐! 힐!”
전신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 왔지만, 치유 마법을 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력 탈진이 찾아온 상황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마력을 더 소모하면 목숨을 위협하는 마력 폭주로 이어진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현준을 살리고 싶었다. 그를 살릴 수만 있다면.
‘난 죽어도 괜찮아.’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도움이 안 되는 무력한 스스로가 증오스러울 정도로 싫었다.
“쿨럭!”
마력 폭주가 시작된 것인지 격한 기침과 함께 입 밖으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고통도 더욱 심해졌다.
전신에서 경련이 일어나 몸이 떨렸지만, 그녀는 ‘힐’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한번 붉은 피를 쏟아낸 순간, 오크 검성의 검이 현준의 가슴을 관통했다.
“아, 안 돼에에에에!”
그녀의 절망 가득한 목소리가 석실을 울린 순간이었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습니다. 던전 수호신이 주관하는 성기사의 시련에 도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갖춰진 것입니다. 시련을 이겨낸다면 당신은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얻을 것입니다.
-절대 황제, 로마노프가 지엄한 황권으로 ‘성기사의 시련’을 강제 생략합니다.
-지금부터 당신은 ‘고결한 성기사’의 뜻이 이어받았습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드세요.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소진은 환청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저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목소리가 말을 끝맺었을 때, 압도적인 양의 마력이 몸에 쏟아져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이, 이건…….”
목소리가 떨렸다. 소진은 지금 자신한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극도의 혼란 속에서의 방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결한 성기사여, 검을 드세요. 당신의 소중한 사람을 지키세요.
전신을 가득 채우는 마력과 함께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들이 흘러들어 왔다. 그것들을 완전히 소화할 여유는 없었다.
아직 그녀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마력이 재충전되고 몸에서 힘이 넘치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리고 단편적인 기억 조각의 파도 속에서 몇 가지 도움이 되는 ‘기술’의 ‘사용법’이 뇌에 각인되었다.
“지켜야 해…….”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다. 이 힘이라면 현준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사악한 악마가 전수해 준 힘일지도 모르고 어떤 대가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상관없다.
소중한 사람을 지켜낼 수만 있다면 목숨조차 바칠 수 있다.
“빛이여!”
본능적으로 기억 속에서 찾아낸 시동어를 외치자 순백의 빛이 소진의 몸에 깃들었다.
그것은 성기사들이 사용하는 신성한 버프였다. 어느새 그녀는 허리에 걸려 있던 소검을 뽑아 들고 있었고 시선은 오크 검성에게 닿았다.
“서, 설마…… 2차 각성……?”
쓰러져 있던 공략 2팀장 최인기가 압도적인 마력의 파동을 느끼고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곧 그의 눈에 신성한 마력에 휩싸인 소진의 뒷모습이 보였다.
“홀리 스피어!”
“크아악!”
다른 기억의 파편에서 찾아낸 시동어를 외치자 성스러운 마력으로 이루어진 창이 날아가 오크 검성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그는 현준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고 비틀거렸다.
“리퍼!”
현준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마력을 끌어올리며 리퍼를 호출했다.
-살육의 피가 잠들어 있던 리퍼의 살의를 깨웠습니다. 치명적인 살기 일부가 해방됩니다.
리퍼가 응답했다.
쿠웅!
해방된 살기가 오크 검성의 전신을 아주 짧은 순간 마비시키는 것과 함께 내부를 뒤흔들었다.
이어서 현준의 검이 오크 검성의 복부를 노렸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리퍼의 살기로 인해 몸이 마비된 탓에 대응이 늦었다. 검을 들어 올려 현준의 검격을 방어했지만.
“카르타고!”
우렁찬 외침이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오크 검성은 눈앞에 오러를 머금은 방패가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콰앙!
충돌음과 함께 오크 검성이 멀리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벽의 일부가 무너지면서 돌무더기가 그를 파묻었다.
“해치웠나?”
하지만 곧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인위적인 바람이 불어 흙먼지를 날려 보냈다.
돌무더기가 폭발하듯 사방으로 튕겨 나오면서 오크 검성의 모습이 드러났다.
“오러 아머…….”
현준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오크 검성의 안면에 푸른 오러가 깃들어 있었다.
오러 아머를 얼굴에 집중시켜서 방패 치기를 막아낸 듯했지만, 그런데도 광대뼈가 크게 함몰되어 있었다.
“이, 인간 놈이…….”
“누나, 힐 주세요.”
오크 검성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힐을 요청했다. 소진이 갑자기 ‘힘’을 얻게 된 경위를 지금 당장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중요한 건 지금 그녀가 도움된다는 사실이다.
“힐!”
소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백색의 빛이 상처에 깃들었다. 순식간에 상처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힐량이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그녀는.
‘2차 각성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