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7장 리퍼가 남긴 것(3)
언제 의식을 잃었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꿈속, 전생의 공간이었다.
눈앞에 있는 검은 철문에는 ‘피에 젖은 살인귀’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피에 젖은 살인귀’라는 이명과는 어울리지 않는 잘 정돈된 영국식 서재가 눈에 들어왔다.
‘여긴 처음이네.’
리퍼의 가호는 여러 번 받았었다. 하지만 그의 방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재 형태의 방은 꽤 넓었다.
모퉁이를 돌자 바로 보이는 창가에 검은 중절모를 쓴 창백한 얼굴의 신사가 앉아 있었다.
판자로 막혀 있는 창문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은 이윽고 현준에게 닿았다.
정확히는 현준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작은 보관함을 보고 있었다.
“당신이 찾던 게 이겁니까?”
말하는 것과 동시에 리퍼의 눈앞에 보관함을 들어 올렸다. 리퍼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분한 표정이었지만 깊은 슬픔이 묻어나왔다.
보관함을 열자 낡은 목걸이가 보였다. 안에 함께 들어 있던 단검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닌 것인지 리퍼는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그는 보관함 안에 손을 집어넣어서 목걸이를 꺼냈다. 꺼내 든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리퍼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끝이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현준은 하얀 천장 아래 누워 있었다.
‘병원인가?’
몸을 일으키자 지난밤의 기억이 밀려들어 왔다.
소진이 전투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화상을 없애주었고 태민이 요양을 위해 입원해야 한다면서 수속을 밟아주었던 게 마지막 기억이다.
현준은 고개를 돌려 병실 안을 살폈다. 꽤 넓은 1인실이었고 옆의 탁자에는 에코 길드 사무소에서 가져온 보관함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열어보니 목걸이가 있던 자리에는 회색 가루만 남아 있었고 그 옆에는 단검이 놓여 있었다.
목걸이는 가져가고 단검은 보상으로 남겨둔 것 같았다.
-피에 젖은 살인귀, 리퍼가 당신에게 잔혹한 피의 축복을 선사했습니다. 이제 적들이 흘린 피는 당신을 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단검을 집어 든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정사를 찾아가 봐야겠네.’
리퍼가 보상으로 남긴 장비의 성능이 궁금했다. 이른 시일 내에 감정을 받아보고 싶어졌다.
에코 길드의 집행부장이 따로 보관하고 있을 정도이니 분명 쓸 만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무엇보다 리퍼가 보상에 인색할 것 같지는 않았다.
보관함에 들어 있는 단검을 아공간 주머니로 옮기고 다시 침대에 앉으려는 찰나였다.
기척이 느껴지더니 이내 병실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강현준 씨? 깨어 계십니까?”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온 목소리는 태민의 것이다.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태민이 걸어 들어왔다. 그는 현준의 침대 옆에 놓인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입을 열었다.
“한소진 씨는 저희 길드 사무소에서 동생분들과 함께 쉬고 있습니다.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 먼저 알려드립니다.”
태민의 말에 현준은 안심했다.
에코 길드 집행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고는 하지만, 집행부장 정성민이 마지막에 언급한 배후의 존재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었다.
흑막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길드 사무소에 있다면 당장은 안전할 것이다.
“한소진 씨와 동생분들의 안전에 대해서는 저희 길드에서 최대한 신경을 쓰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코 길드 집행부 쪽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꽤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겨우 하루가 지났지만, 정규 길드원들 사이에서 이탈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차분하게 내용을 정리해서 보고하는 태민의 모습은 충직한 비서 같았다.
“길드 사무소 쪽은 특수 경찰에서 조사를 시작했지만 이렇다 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태민의 말에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사신의 가호로 증거를 지웠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좋습니다. 특이 사항 있으면 바로 보고해 주세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급자와 하급자의 대화 같았지만 태민은 개의치 않았다.
던전 레이드 시대에서 강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현준은 레이스 길드에게 있어서 은인이었다.
무엇보다 에코 길드의 흑막을 상대로 한 배를 탄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가 레이스 길드로 합류한다는 선택지를 고를 경우 정말 상급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태민은 미리 준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에코 길드의 배후에 대한 정보는 없죠?”
“죄송합니다. 저희 길드의 능력으로는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혹시나 싶어 물었지만 생각했던 대로였다.
에코 길드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낸다면 조금이라도 대비할 수 있겠지만 레이스 길드의 정보력으로는 에코 길드의 배후를 추적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계속 주시해 주세요.”
길드가 큰 타격을 입었으니, 복수해 올 게 분명하다.
은밀한 일에 사용되는 집행부 헌터들 대부분을 잃었지만, 배후의 존재가 있으니, 지원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저희 길드에서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태민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 모습이 꽤 믿음직했다.
* * *
매일 같이 소진이 찾아와 ‘힐’을 해준 덕분에 3일 만에 퇴원하게 되었다.
병원에서 나온 현준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감정소를 찾아가는 일이었다.
가장 가까운 감정소를 찾아간 그는 리퍼가 보상으로 남긴 단검을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내 놓았다.
“이 장비의 감정을 의뢰하고 싶습니다.”
“어디 한번 봅시다.”
감정사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단검을 훑고 지나갔다.
“흐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흔한 타입의 장비가 아니라서 그냥 조금 놀란 겁니다.”
“흔한 타입의 장비가 아니라고요?”
현준의 물음에 감정사는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봉인된 장비입니다.”
“그게 무슨…….”
“말 그대로입니다. 중요 능력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저도 ‘봉인된 장비’는 소문으로만 들었고 실제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헌터님께서 모르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감정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현준은 ‘봉인된 장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설명이 더 필요했다.
감정사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설명을 위해 입을 열었다.
“봉인된 장비도 여러 타입으로 나누어지지만, 이 단검 같은 경우에는 특정한 조건을 만족시킬 때마다 봉인이 한 단계씩 풀리게 되어 있네요.”
“그럼 지금 당장은 장비로서의 가치가 없는 겁니까?”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하지만 감정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모든 봉인이 걸려 있는 지금 상태에서도 B급의 마력 흡수율과 사용자 신체 강화 옵션이 붙어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번졌다. 마력 흡수율이 뛰어난 장비는 오러를 다룰 때 그 효율이 증가하게 된다.
수많은 오러 사용자들이 꼭 필요로 하는 장비 옵션 중 하나였다.
“일단 장비의 고유 이름은 ‘도살자’인 걸로 확인했습니다.”
감정사는 마력으로 장비의 정보를 열람하는 게 가능했다. 이름을 알아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봉인이 몇 단계나 걸려 있는지는 제 능력으로는 알 수 없지만, 최종 봉인이 풀리게 된다면 최소 S급 판정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상태로만 해도 B급 장비로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것으로 지금 현준의 무장에 B급 장비가 하나 더 추가된 셈이다.
“다른 옵션은 없습니까?”
“회수 기능이 있는 걸로 확인되었습니다. ‘회수’라는 시동어를 외치면 단검이 마력을 기억한 사용자의 손으로 되돌아올 겁니다. 단검 투척을 주로 하는 헌터들이 선호하는 옵션 기능이죠. 자세한 내용은 감정서에 기록해서 드리겠습니다.”
그는 감정서를 작성했다. 간단한 작업이기 때문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작성이 끝났습니다. 확인하시면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감정사가 말한 내용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현준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카드를 꺼내서 감정 비용 100만 원을 결제했다.
비공식 길드전에서 얻은 C급 장검의 감정을 맡기고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C급 장비면 옵션 기능도 거의 없을 게 분명하니 굳이 돈 낭비하기 싫었다.
“할부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감정소에서는 여유가 없는 헌터들을 위해 할부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었지만.
“일시불로 해주세요.”
현준은 망설임 없이 일시불을 말했다. 예전과는 달리 지금 그의 통장에는 돈이 아주 많았다.
던전 공략과 비공식 길드전으로 2억 가까이 모은 데다가 오늘 아침에 레이스 길드로부터 에코 길드 집행부 전력을 무력화시킨 것에 대한 사례금으로 10억이라는 거금을 받아서 여유가 넘쳤다.
결제를 끝내고 감정소를 나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진동하며 전화가 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꺼내서 화면을 확인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태민이었다.
“여보세요.”
-김태민입니다. 방어 전투에 적합한 단독 주택 하나를 찾았습니다.
스마트폰에서 태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현준은 어제 그에게 소진, 그리고 동생들과 함께 지낼 만한 단독 주택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었다.
레이스 길드 사무소에서 계속 지내게 할 수는 없었다.
고아원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니 새로 집을 구해서 지낼 생각이었다.
레이스 길드 집행부에서 경비를 맡은 헌터들을 지원해 주기로 약속했다.
“위치는요?”
-수원입니다.
수원이면 서울과 멀지도 않으니 위치도 나쁘지 않았다.
-오늘 내부 구조를 확인하기로 했습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네, 좋습니다.”
-차량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위치를 전송해 주세요.
위치를 전송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검은 세단이 도착했다.
현준은 태민과 함께 차를 타고 수원으로 이동해서 단독 주택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떻습니까?”
부동산 업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쁘지 않네요.”
내부 구조는 훌륭했다. 서울이 아니라서 그런지 가격에 비해 면적도 넓고 시설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태민이 전투가 발생했을 때 방어에 적합한 구조라고 말해서 더 마음에 들었다.
“언제 입주할 수 있습니까?”
“새집이긴 하지만, 준비가 덜 되어 있어서 당장은 힘듭니다.”
“비용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까 최대한 빨리 입주할 수 있게 해주세요.”
현준이 말했다. 소진과 동생들을 불편한 길드 사무소에서 오래 지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면 빨리 안전한 곳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비, 비용 문제가 없으시다면 일주일 안에 해결하겠습니다.”
부동산 업자가 말했다. 현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한민국에서 돈으로 안 되는 건 없었다. 갑자기 씀씀이가 커진 느낌이지만 그만큼 능력이 생겼으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