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25화 (25/217)

# 25

7장 리퍼가 남긴 것(2)

성민은 현준의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현준이 있었다. 전신에 화상을 입었지만 멀쩡하게 서 있었다.

고통이 심할 게 분명했지만,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을 뿐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괴, 괴물…….”

“약하다고.”

차갑게 내뱉었다. 카르타고와 하사신 덕분에 고통은 익숙했다.

화염의 폭풍은 위협적이었고 성민도 위협적인 살인 기술을 가진 집행부 헌터였지만 카르타고, 하사신과 비교할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다.

그의 공격은 두 전생에 비하면 뻔히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A급 헌터의 공격이라서 그런지 빨라서 쉽게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치명상을 입는 건 피할 수 있었다.

“화염이여!”

성민이 다시 한번 불꽃을 일으켰지만, 현준은 큰 위협으로 느끼지 않았다. 이미 한번 당해본 덕분에 공격 경로가 훤히 보였다.

전생의 방에서 수백, 수천 번을 넘게 죽는 과정에서 그의 통찰력은 눈에 띄게 발전했다.

“죽어라!”

화염의 폭풍이 다시 현준을 노렸다.

‘두 번 당할 생각은 없다.’

빠르게 화염 폭풍의 좌측으로 빠져나와 성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황급히 화염 방패를 소환했지만, 불꽃이 방패의 형상을 완성하기 전에 현준이 먼저 내찌른 검이 그의 왼손을 관통했다.

“크아아악!”

“가지고 놀고 싶지만 미안. 시간이 없어서.”

어느새 성민의 왼손에서 뽑혀 나온 검을 회수한 현준은 다음 공격을 위한 동작을 이어가고 있다.

성민이 검을 휘둘러 화염을 불렀다. 하지만 현준은 다리가 불길에 휩쓸리면서도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커헉!”

휘둘러진 검이 성민의 상체를 깊게 베었다. 그는 붉은 피를 흘리면서 비틀거렸다.

“어, 어째서…….”

“고통에는 익숙하거든.”

대답과 함께 내찌른 검이 성민의 복부에 꽂혔다. 왼손에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제대로 된 반격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회피를 시도해서 복부에 검이 꽂히는 데 그친 것이다. 가만히 있었다면 심장에 검이 파고들었을 것이다.

‘무슨 놈의 검술이…….’

성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이들과는 검술의 수준부터 달랐다.

“템빨이…… 아니었던 건가…… 쿨럭!”

성민이 붉은 피를 쏟아냈다. 왼손과 복부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 탓에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했다.

그는 대인전 경험이 풍부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적이 없어서 고통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현준은 고통에 익숙했다.

그래서 화염에 휩싸였을 때도 다른 이들이라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하고 몸부림치는 데 그쳤겠지만, 현준은 침착하게 회피와 반격을 펼칠 수 있었다.

“크으윽! 제기랄!”

성민은 욕설과 함께 신음을 토해냈다.

끔찍한 고통 때문에 화염을 통제하는 것에 집중하기 힘들었고 복부에 꽂힌 검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곧 이어질 공격에 훤히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다.

“너…… 우리 길드 뒤에 누가 있는지는 알고 이러는…….”

“끝이다.”

끝까지 들을 필요도 없다. 검을 뽑는 대신 왼손에 들고 있는 방패를 힘차게 휘둘렀다.

방패는 방어 수단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훌륭한 둔기가 된다.

콰앙!

비명 소리조차 묻어버리는 굉음과 함께 성민의 안면이 함몰되었다. 처참한 몰골이 되어 쓰러지는 그를 보며 현준은 냉소를 흘렸다.

복부에 꽂힌 검을 뽑아내자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니 숨이 완전히 끊어진 건 아닌 듯하다.

“사, 살려…….”

성민이 엉망이 된 얼굴을 들어 올리며 애원했다. 이대로 허무하게 죽는 건 싫었다.

하지만 성민을 내려다보는 현준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는 말없이 검으로 성민의 심장을 찔렀다.

“컥…….”

“미안하지만 후환을 남겨두는 취미는 없어서.”

심장이 꿰뚫린 성민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더니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현준은 그 시체를 뒤로한 채 차가운 시선으로 사무실 안을 훑었다.

-리퍼가 흥분합니다. 그가 찾는 물건이 이곳에 있습니다.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익숙한 마력의 파장이 느껴졌다. 리퍼의 가호를 발현할 때 느꼈던 것과 같은 종류였다.

‘여긴가?’

마력의 이끌림에 따라 도착한 곳은 집행부장 정성민의 개인 사무실이었다.

그의 책상 서랍 쪽에서 리퍼의 강렬한 바람이 느껴졌다. 서랍을 열자 그곳에는 낡은 목제 보관함이 하나 있었다.

가호와 함께 흘러들어 온 리퍼의 잔존 마력이 눈앞의 보관함을 열라고 말하는 듯했다.

보관함을 집어 들고 열었다. 안에는 작은 단검 한 자루와 낡은 목걸이가 들어 있다.

‘이게 리퍼가 말한 그건가?’

사무실이 불타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 살필 시간은 없었다.

단검과 목걸이를 챙겨서 그나마 불길이 덜 옮겨붙은 복도로 나오며 마력을 끌어모았다.

-하사신이 사악한 계략을 시작합니다. 배후의 그림자가 당신과 관련된 흔적을 지웁니다.

하사신의 가호가 발현되는 것과 함께 증거인멸이 시작되었다. 현준은 냉소를 흘리며 건물을 떠났다.

성민이 소환한 화염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에코 길드 사무소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내부의 경비를 맡은 집행부 헌터들을 조용히 처리했기 때문에 화재 현장에 출동한 이들은 대부분 소방 인력이었다.

특수 경찰국에서 출동한 인원도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애초에 ‘살인’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인 것 같았다.

‘안심해도 되겠어.’

어둠 속에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현준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하사신의 가호로 증거를 지운 데다 불까지 났으니, 칼 맞은 시체가 몇 개 생긴 것만 제외하면 완벽한 암살이다.

‘돌아가자.’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화상도 그렇고 전체적인 부상이 가볍지 않다.

이대로 병원으로 돌아가면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태민과 접촉해서 회복계 헌터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골목 깊숙한 곳에 들어가 스마트폰을 꺼내 태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대기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강현준 씨? 맙소사, 방금 에코 길드 사무소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혹시…….

“접니다. 자세한 건 만나서 말하겠습니다. 소진이 누나랑 함께 와주세요.”

스마트폰은 도청의 위험이 있다. 그래서 자세한 걸 설명하지 않았다.

회복계 헌터인 소진의 도움이 있으면 지금의 부상 정도는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알겠습니다.

“위치는 메시지로 바로 보내겠습니다.”

전화 통화가 끝났다. 현준은 현재 위치를 태민에게 전송했다. 벽에 기댄 채 30분 정도 기다렸을까? 골목 안으로 들어오는 2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강현준 씨!”

태민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현준은 경계를 풀고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준아!”

심하지는 않지만, 전신에 화상을 입고 피투성이가 된 모습을 본 소진이 황급히 달려와 마력을 끌어모았다.

두 손에서 치유를 위한 백색의 마력이 피어올랐고 동그란 두 눈동자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힐.”

소진의 마력이 닿자 성민과의 전투에서 입은 화상이 천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현준이 회복하고 있는 동안 태민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주변을 경계했다.

“현준아.”

소진이 조심스럽게 현준을 불렀다. 벌써 많은 마력을 소모한 것인지 음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현준은 복잡한 감정이 묻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서야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마력이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에서도 치유를 멈추지 않는 소진 덕분에 부상은 많이 회복되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

목소리에서 복잡한 감정이 묻어나왔다.

“저는 괜찮아요. 누나.”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소진이 원하는 대답이었으니까.

“그래…….”

소진의 목소리에 힘이 없다. 가깝게만 느껴졌던 현준이 갑자기 멀게만 느껴졌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처럼.

“너무 멀리 가지는마.”

그녀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바람을 담아 속삭였다.

* * *

한 남자가 어두운 복도를 걷고 있다. 길게 이어진 복도 끝에는 고급스러운 문양이 각인된 목제 문이 보였다.

남자는 눈동자를 움직여 주변을 빠르게 훑더니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두운 조명 탓에 어둠에 가려서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의원님, 접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남자가 가볍게 노크를 하며 말했다. 안에서 누군가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하자 남자는 차분한 동작으로 문을 열었다.

“심각한 일이군. 그렇지?”

“역시 의원님이십니다.”

“그야, 집행부장이 먼저 날 찾았을 때는 좋은 이야기를 들어본 기억이 없으니까.”

의원이라고 불린 남자는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이미 그는 집행부장이 부정적인 보고를 쏟아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끝낸 듯했다.

“에코 길드가 당했습니다.”

“집행부가 타격을 입은 건가?”

“그렇습니다. 지금은 사실상 집행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합니다.”

의원의 예상대로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에코 길드에는 우리 쪽에서 꽤 투자를 했지 않나? 최근 집행부 전력이 강화되었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 일 없다는 보고를 받았던 것 같은데 말이지.”

“그동안 진행 중인 일이 틀어져서 집행부의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보고서에는 고의적으로 피해를 축소시킨 것 같더군요.”

집행부장이 보고했다. 의원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술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에코 길드에서 가장 최근에 손댄 게 레이스 길드 제압 건이지?”

“예. 그렇습니다. 레이스 길드의 집행부를 제압하고 흡수해서 실버 티어로의 승급을 노리고 있던 게 에코 길드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일은 레이스 길드 쪽에서 손을 썼다고 생각하면 되겠군?”

의원은 현 상황에서 에코 길드의 집행부를 무너뜨린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레이스 길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문인 점이 하나 있습니다. 레이스 길드는 에코 길드를 제압할 힘이 없습니다. 최근에 비공식 길드전에서 용병의 출현이 확인되었지만, 관련 자료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에코 길드의 집행부장 정성민은 레이스 길드의 비공식 길드전 용병이었던 현준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지만, 정식으로 보고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료도 문서로 보관 중이었기 때문에 길드 사무소가 완전히 불타면서 모두 불타 사라지고 말았다.

“비공식 길드전 용병이라…… 그놈이 범인일 것 같은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미 저희 쪽 사람을 보내서 에코 길드 사무소를 조사했지만 아무런 증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마치 귀신이 다녀간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최소 A급의 헌터가 동원되었겠군. 그것도 암살에 특화된 놈일 거야…….”

의원이 말했다. 그는 헌터는 아니었지만, 이쪽 세계에 발을 깊이 담근 탓에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집행부장 정성민이 당할 정도이니…… A급 실력자는 확실합니다. 레이스 길드에서 어떻게 포섭했는지가 의문입니다.”

A급 헌터의 몸값은 부르는 게 값일 정도다. 브론즈 티어 길드에서도 하위에 속하는 레이스 길드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어쩌면 오성 그룹에서 관여했을 수도 있어.”

“오성 그룹에서 저희와 완전히 척지기로 결심한 걸까요?”

“걔들이 아니면 레이스 길드의 배후가 될 만한 세력이 없지.”

“그렇다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직접 움직이는 건…… 아직 시기가 좋지 않으니, 괜찮은 실버 티어 길드에 연락해서 레이스 길드랑 그 용병 놈 처리하라고 해.”

의원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묻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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