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화 극도(極道)
얼마 전에는 소림의 방장을 만나러 가는 입장이었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무진이 상대를 초청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왠지 모를 오묘함을 느끼며 좁은 방 안에 들어온 무진은, 자연스레 두목에게 바둑을 권했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 탓이다.
"손이 심심한데, 바둑은 어떠신가."
"그런 취미는 없소."
무진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두목은 화려한 모양의 투구와 복면을 벗고서 무진의 앞에 앉았다.
드러난 그의 얼굴은 버드나무 껍질처럼 갈라져 주름살이 훤했다. 반대편에 앉은 무진과 극명히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단천비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두 잔을 쟁반에 올려 가져왔다. 무진이 다상 위에 잔을 얹자, 두목이 곧바로 찻잔을 집어든다.
탁ㅡ.
그가 다상에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명백한 결례일지대 거리낌이 없는 모습. 무진을 전혀 대우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분명 자신이 초대한 손님일진대 계속해서 하오체를 고집하는 모습 또한 그렇다. 무진을 아래로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늙어 말라 비틀어진 입술이 찻물에 적셔져 촉촉해진 상태로 열렸다.
"요즘 정세가 말이 아니오. 그렇지 않소?"
"확실히. 여기저기서 문제가 터지는 것이 아주 골치가 아프더군."
물론 그 중 하나는 무진의 눈 앞에 있는 왜놈들의 소행이었다. 얼마 전에는 산동의 아편굴을 모조리 쓸어다가 돈을 벌고 있다던가.
흔히 음지라 불리는 사업들을 천천히 장악해 나가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 뒷배에는 일본 제국이 있을 테고.
무진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 그런 혼란스런 와중에 아나하구미(我那覇組)의 구미초께서 이곳을 방문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도 병력까지 이끌고."
"당연히 일에 대한 논의 뿐이지, 다른 무엇이 더 있겠소."
"그렇군. 일… 일이라."
동네 왈패가 노점을 오가며 자릿세를 뜯어내는 것도 일이다. 소매치기가 행인의 주머니를 훔치는 것도 일이다. 사람을 하나 담궈도 일이라 부를 수는 있다.
헌데 그저 일이랍시고 말을 흘리다니. 꿍꿍이가 좋지 못하다는 뜻이다. 뭐, 왜놈들이 늘 그렇지만서도.
호로록ㅡ.
무진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어서 말했다.
"어디, 들어나 보지."
그러자 두목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항만. 그리고 각종 시설물에 댄 연줄을 빌리고 싶소."
"연줄?"
철도와 항만은 황실에서 중요하게 관리하는 시설이다. 대놓고 접근하자니 지금처럼 황군이 견제해올테고, 뇌물을 먹이자니 또 왜놈이라며 배척당한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의화문에게 접근해온 것이겠지. 문파라 하면 으레 지역의 연줄을 꽉 잡고 있는 유지가 아닌가.
본래 악가와 협력하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을 공산이 크다.
"그래. 연줄 말이오. 도대체 이 청이란 나라는, 꽌시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군. 본래 일을 함께하던 이들이 갑작스레 연락이 끊겼소. 황실이 개입한 탓이지."
그는 그리 말하고는 다시 찻잔을 집어 뜨거운 물을 벌컥벌컥 목 너머로 삼켰다. 그리고는 역시나 탁ㅡ, 하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다상 위로 찻잔을 얹어놓았다.
언뜻 보기에는 분풀이처럼 보이는 행동이었다. 실제로도 남자의 표정을 보니 그러했고.
두목은 조금 화를 식히는가 싶더니, 이어 제 나라의 언어로 낮게 읊조렸다.
"(제기랄. 이래서 지난 전쟁때 청 왕실을 없앴어야 했는데)."
"뭐라는 건가."
"아, 혼잣말이오. 신경쓰지 마시오."
예의가 없군.
무진도 따라서 혼잣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그 말을 주워들은 두목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창피한 것을 아는건지 아니면 단순히 모멸감을 느낀 건지.
그는 무진을 바라보고는 몇 번 헛기침을 내뱉더니, 실례를 범했다며 의례적인 사과와 함께 말을 이었다.
표정에서는 살심이 조금 엿보이건만. 이쪽의 협조를 구해야 하니 속마음을 숨기려 애써 자제하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들부들 떨리는 눈동자에선 투명한 창에 비친듯 생각이 고스란히 읽혀왔다. 웃기는 일이군. 무진이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사과를 받아 주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하기를.
'사려가 얕다. 표정을 숨기는 편이 아니야. 문관이라기 보다는 전형적인 무관이군."
가늠되는 무력의 수위를 보아하니 현장에서의 공로로 올라갔던 것이 분명하다.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것저것 정보를 뜯어먹기에 좋은 놈이란 뜻이다.
유능한 적군보다 무능한 아군이 더 무섭다고 하던가. 무능한 적군과의 대담은 언제나 환영할 만한 일이었고, 지금 무진의 눈 앞에 앉아있는 이가 바로 그런 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인맥만을 연결해 주면 되는건가?"
"우선은 그게 다요."
"우선은?"
"추후에 또 필요한 일이 있을수 있지 않소."
"그럼 그 사안은 나중에 논의하도록 하지."
무진이 잠시 차를 홀짝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연결해준 인맥으로 대체 무얼 하려길래 그러는 건가. 무려 대 일본의 사무라이가."
대 일본의 사무라이. 실로 그 표현이 정확하다. 좌천된 무사가 야쿠자를 조직하고서 남의 나라. 남의 땅에 버젓이 들어와 장사를 한다니.
무언가 뒷배가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분명 일제의 정부가 개입하였겠지. 뻔한 일이다.
"본국과 관계가 있다고 믿는 것인가. 비약적인 생각이오. 문주."
"말을 잘못했군. 미안하네."
"연결해준 인맥으로 무얼 하려는게 그대들의 입장에서 중요한가. 그저 조금 협력해 주고 떡고물만 챙겨가면 그만일 것을. 안 그렇소?"
"혹여나 잘못 소개해 주었다가 일을 그르치면, 관계를 맺어왔던 이들에게 내세울 체면이 없어서 말이지."
무슨 이유일까. 무진의 고민에 대한 답은 오래 지나지 않아 떠올랐다.
상해와 홍콩의 커다란 시장은 모조리 서양의 열강들이 침탈해 갔다. 일본은 뒤늦게 제국으로 올라선 후발 주자. 그나마 제 몫을 챙기기 위해선 음지를 점거하는 수밖에 없었겠지.
허나 그것 뿐일까. 정세란 것이 보통은 한 가지 이유만으로 돌아가지는 않을진대.
무진은 왜국의 닌자가 전해 주었던 소식을 떠올렸다. 남경으로 총을 운송하고 있다고 하던가. 철도와 항만에 대한 관시를 요구한 이유 또한 그 일에 지장이 생겨서겠지.
남경에 대체 무엇이 있기에.
"그럼 어찌하면 좋겠소?"
"직접 한번 봐야겠군. 뭘 운송하는지."
"…좋아. 그리 하겠소. 빠른 시일 내에 약속을 잡지. 나도 바쁜 사람이니 말이오."
"멀리 미룰 필요도 없어. 이틀 후에 내가 직접 찾아가도록 하지."
"그럼 제남(齊南)의 창관으로 오시오. 그곳에서 나를 찾으면 성대히 응대하겠소."
남경에 웅크린 무언가라. 어쩌면 그것이 신교가 무너진 원인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생각이 맞다면, 무림에 나오고 나서 처음으로 잡는 단초였다. 저 멀리 목표가 희끄무레하게 아른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 답은 오래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을것처럼 느껴졌다. 직감이 그리되리라 말한다면, 무진은 참고 인내하기로 했다.
"이야기는 얼추 끝난거 같으니 이제 그만 일어나겠소."
"이틀 후에 보지."
"그러기를 바라겠소."
두목은 곧장 복면과 투구를 뒤집어 쓰고 밖으로 나섰다. 수십에 이르는 야쿠자들의 무리 가운데서 사람 하나가 튀어나와 제 두목을 모셔갔다.
그를 대하는 수하의 태도가 낯설었다.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아마도 믿음을 주지 못한 탓이겠지.
오로지 공포만으로 단체를 통솔하는 유형의 무장(武將)이란 소리였다.
야쿠자들은 저들끼리 모여서 썰물이 빠져나가듯 천천히 물러가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장날 장터를 방불케 하던 의화문의 앞이 썰렁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무진은 그 광경을 바라보다, 어느새 다가온 허유와 송정원 영감에게 말했다.
"다들 채비를 해라. 청도로 가야겠다."
"갑자기 왜 다시 청도로 가신단 말씀이십니까요?"
"일전에 황군의 참장과 약조한 것이 있다. 교주만(膠州灣)의 앞에서 보기로 했었지."
"바로 채비하겠습니다요."
허유가 그리 말하고는 다시 의화문의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각종 잡동사니를 챙기는지, 대문 안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퍼졌다.
무진은 그 사이로 황군의 고수와 했던 약조를 다시 떠올렸다.
이름이… 그래. 유소하였나.
무진이 그리 중얼거리며, 품에서 시가 하나를 꺼내 입에 물고는 손가락을 퉁겼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피어오른 불길이 잘려진 연초 끝에 불을 붙여 놓았다.
그 자연스러운 모습에 송정원 영감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선 물었다.
"연초를 피우시는지요."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닙니다…."
영감이 말 끝을 흐렸다.
"말해 보라."
"별 일 아니옵니다. 그저… 전대 교주님의 모습과 흡사하게 느껴진 탓에. 늙은이가 잠시 실언을 했나 봅니다."
"별 일도 아니군. 유난떨 일 없다."
무진이 숨을 한 번 깊게 빨아들였다, 연기와 함께 내쉬었다.
후우….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무진이 운을 떼었다.
"아버지도 연초를 피우셨나?"
"그렇습니다."
"내 앞에선 한 번도 보이질 않으셨거늘."
"…"
그가 연거푸 연기를 내쉬고는 말했다.
"이만 가지. 준비가 끝난 모양이야."
"받듭니다."
* * *
교주만(膠州灣)의 앞에 자리를 잡은 황군의 전각 앞에 선 무진은 앞에 서 있던 보초에게 말을 건넸다.
외인은 함부로 발을 들일수 없다며 한사코 막아서던 보초는 설화가 가져온 신분패를 보더니 군말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얼마 후 안에서 군인 하나가 달려오더니 안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며 무진을 안내했다.
견장을 보니 꽤 높은 직위로 보였다. 느껴지는 기의 양 또한 만만찮다. 청도에 황군이 보유한 고수들이 집결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말은즉, 산동을 주름잡고 있던 거대 세가의 토벌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유소하가 무진을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황군과 민간을 떠나 고수를 대하는 무인으로써의 자세였다. 아직까진 무진의 전력을 목격한 몇 안되는 인물이기에 그렇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벌써 보름쯤 되었던가요."
"그래. 딱 보름 만이지."
무진이 자연스레 그의 앞에 있던 의자 하나를 빼서 앉았다.
설화와 허유도 함께였다.
유소하가 그중 허유를 돌아보고는 물었다.
"일행이신지?"
일행인 것은 당연했다. 아마도 믿을 수 있는 인물인지를 묻는 말이리라.
"일행이다."
"알겠습니다. 이렇게 찾아오셨다는 것은, 전에 말했던 일에 참여할 의향이 있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악가토벌전.
당연히 그 주제를 먼저 물어올줄 알았다.
황군의 고수들이 집결하는 주된 이유가 아닌가.
무진은 답했다.
"참여하지. 그런데 그 전에, 먼저 방해꾼을 제거해야 하지 않겠나."
무진이 그리 말하자 유소하의 표정에 의문이 일었다. 그러면서도 입은 꿋꿋이 닫혀 있었다. 계속 말해보라는 눈빛이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해 주어야지 않겠나.
무진은 유소하에게 이어서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