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세기 천마실록-26화 (27/29)

제 26화 왜국(倭國)의 객(客)

장발의 머리를 풀어헤친 묘인풍이 대문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요?"

그러자 바로 앞에 있던 무인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私たちの主任がお会いしましょう。"

놈의 아가리에서 튀어나온 능숙한 일어.

아마도 왜국에서 곧장 건너온 무인인듯싶었다.

그러나 중원 땅에서 아무리 일어로 이리저리 떠들어 봤자, 묘인풍에게는 지나가는 개가 짖는 소리와 다를바가 없었다.

무인 나이 서른이라 치면 이제 막 자신감이 차오를 질풍노도의 시기가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묘인풍은 곧바로 놈에게 걸쭉한 욕설을 내뱉었다.

"아니, 이 개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쳐들어와서 씨부려?"

욕설이 주는 그 오묘한 분위기는 만국 공통인 것일까. 왜놈은 곧바로 발작하듯이 화를 냈다. 눈깔을 죽일 듯이 치켜뜨는 것이 당장 칼이라도 꺼낼 기세다.

"お前今悪口を言ったのか?"

"흐, 등신 새끼."

묘인풍은 그리 중얼거리고 있을 때, 뒤에서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에구, 무슨 일인가?"

"아, 영감. 왜놈들이 쳐들어왔소이다."

"음… 숫자가 조금 많은 거로 보이네만."

"알 게 뭐요. 하나하나 죽이다 보면 줄겠지."

묘인풍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주변에 모인 왜놈들만 어림잡아 서른.

자신이라면 모든 인원을 정문으로 끌고 오지는 않았을 테니, 오십은 잡는 게 맞았다.

왜놈이 버럭 화를 냈다. 정말로 칼을 꺼내려는지 허리춤에 손을 올려놓은 채로였다. 아무래도 묘인풍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느낀 모양이다.

순간 뽑혀 나온 왜놈의 검날에서 빛이 번쩍였다. 정말로 휘두를 생각일까.

"こっちを見ろと!"

스릉ㅡ!

어, 진짜 뽑았네.

묘인풍은 그리 중얼거리며 기가 찬다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제 앞에 있는 놈이 상대의 무력을 가늠조차 못 하는 하수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 거 참… 이 씨발놈이."

묘인풍은 그러고는 품속에서 대뜸 장도(粧刀) 하나를 뽑아 들었다. 날이 여간 잘 선 게 아닌지, 운무 낀 하늘 사이로 날아든 빛이 날에 서슬 퍼런 광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흥분한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중원인이 그 모습을 보았다면 살심을 품은 마인 이라며 소리치고는 당장 전투를 준비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은 한평생 마공을 마주해본 적 없는 왜인이었다.

한 번의 휘두름이 있었고, 혈색이 어려있는 팔이 피 분수와 함께 허공을 날았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왜놈이 훨훨 날아가는 제 팔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상황을 깨닫고는 잘려나간 단면을 붙잡고 주저앉았다.

"아아악ㅡ!!"

외마디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무림을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거슬리게 느끼는 소리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음성. 일평생 질리도록 들어본 그것이 들린다면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뛰쳐나오는 것이 무인이다.

때문에 그 소리는 의화문 안에서 술에 취해 뻗어 있던 이들을 깨우기에 딱 적당했다. 열 명이 조금 넘는 고수가 각자 창, 칼을 들고서 뛰쳐나온다.

"무슨 상황인가."

"습격이야?"

묘인풍은 이번에도 똑같이 왜놈들이 쳐들어 왔노라고 말해 주었다. 고수들은 그 말에 대문 바깥에 서 있던 야쿠자들을 쳐다보았다.

하나같이 날카로운 일본도를 빼 들고서 긴장 어린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게다가 몇몇은 손에 조그만 쇳덩이를 든 채로 이쪽을 겨누고 있었다.

도저히 사람을 해할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 형태였으나, 그들은 안다. 저것이 한 명의 고수가 내지르는 정권과 같은 위력을 가졌음을.

"…작정하고 온 모양이군. 전에 쳐들어왔던 그놈들인가?"

"여기 어물쩍거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닌데, 난들 알겠나. 인당 삼두(人當 三頭). 빨리 잡고 가지."

"칼 든 놈들은 쉽지. 쉬워. 그런데 총 든 놈들은… 모르겠군. 여간 위험한 게 아니라서 말이야."

"그리고 영감. 계산이 틀렸어. 적어도 이만한 수를 주변에 더 숨기고 있을 거다. 쪽바리란 그런 놈들이야."

의화문의 무인들이 짤막한 대화를 나누었다. 시선은 여전히 앞을 바라보면서다.

"문주 님은?"

"어젯밤에 내상을 다스리시겠다며 칩거에 드셨다."

"시기가 좋지 않아. 버텨야겠군. 아니면 다 족치거나."

"맞아. 기선을 잡는 게 최선이지."

송정운 영감이 소매를 펄럭이며 팔을 앞으로 내뻗었다. 한 시대를 이끌었던 노고수의 풍모다. 그 모습에 위압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세 놈. 최대한 잔인하게 잡아 죽여. 우리가 누구인지 보여줘라."

붉은 눈동자 여러 쌍이 왜놈들의 행색을 쓱 훑는다. 뱀의 시선을 담은 눈깔이다. 쥐새끼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려야 하는 그런 것들. 그리고 무림은 강한 자가 뱀이다.

오싹ㅡ!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단지 아까 흙에 뿌려진 핏자국들이 조금 말라붙은 탓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자신만만하게 달려온 그들이 무언가 위축됨을 느꼈다는 것이다.

무엇일까.

숫자는 언제나 정직하다. 자신들과 그들 사이의 머릿수는 물경 다섯 배. 절대로 질 수 없는 싸움을 하려고 왔으나 기이하게도, 그래.

죽을 것만 같았다.

살기를 마주한 오감은 뇌에 필사적으로 신호를 보낸다. 가증할 전기 신호는 사형수가 눌러앉은 전기의자처럼 계속해서 쏘아졌다.

전신에 가닥가닥 늘어진 말초 신경으로부터 내달리는 영상이 대뇌를 간지럽히듯 자극한다. 귓속을 혀로 잔뜩 헤집는 듯한 감각이 이와 유사할까. 등골이 시렸다.

너는 이렇게 죽는다…

흘러들어온 전기 신호가 그들의 고막에 대고서 속삭였다.

호전성과 흥분감 따위가 거세되고 두려움만 남은 것들이다. 살아있으나 숨을 쉬지 않으며, 한때 생기가 돌았던 두 눈은 다만 박제된 듯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인 놈들을 도륙 내는 것은 죽 떠먹기보다 쉽다. 의화문의 고수들은 바람에 흩날리는 연기가 된 듯 움직였다.

그들은 홀연히 날아 왜놈들의 눈앞에 서서 반응 따위 없는 상대에게 검을 휘둘렀다. 바닥에 뿌려진 피가 모래와 뒤엉킨다. 핏물 빠진 고깃덩이는 흙먼지로 범벅되어 창백히 식어갔다.

그렇게 세 명의 목을 베었을 때쯤.

내력 실린 외침이 장 내를 강타했다.

"그만ㅡ!!"

조금은 어눌한 발음이 섞여 있었지마는 그것은 분명 중원의 언어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왜놈들. 그리고 이제 막 칼질을 시작하던 의화문의 고수들이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화려하게 장식된 전신 갑주. 귀신의 얼굴을 형상화한 것 같은 붉은 복면. 그리고 길고 짧은 두 자루의 일본도.

사무라이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게다가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가 야쿠자들의 두목이라는 것은 확실한 모양이다.

"아나하구미(我那覇組)의 구미초다."

"그렇습니까."

"너희 두목과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다. 문을 열어주지 않겠나."

그 말에 영감이 화답했다.

"허허… 요즘은 이야기를 총칼로 하나 봅니다. 전쟁이라도 하러 오셨습니까?"

"글쎄. 그건 당신들이 어떻게 하냐에 달렸지 않겠소."

"아침부터 남의 문파 앞에 무장한 이들을 끌고 와서 하는 말을 어찌 믿겠소. 앞에선 사람 좋은 척 굽신대고, 뒤에선 칼을 찌르는 게 왜놈들의 심리지. 안 그런가?"

"축객령이군."

"알아들었으면 썩 꺼지시지요. 당신네와 할 말 따윈 없으니."

두목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기선을 제압할 생각으로 껄렁한 놈 하나를 먼저 보냈건만, 대화가 조금 흘러가나 싶더니 곧바로 살기를 내비치며 칼을 휘둘러 온다.

순식간에 셋을 잃었다. 다급히 내력을 실어 외쳐 막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축객령. 상대가 생각 이상으로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일선에 늘어선 이들을 보니 전부 한 가닥 하는 고수들이다. 홀로 저들을 모두 상대하려면 사지 두 짝은 각오해야겠지.

협공한다 해도 전력의 손실이 막심할 터다.

'무장이 아쉬워.'

총. 활. 단창. 본래 사용하던 무장들을 두고 온 탓에 손맛이 심심하다. 저만한 고수들을 상대하는데 허리춤에 매달린 두 자루의 일본도가 끝이라.

'아무래도, 오늘은 힘들겠군.'

본래 머릿수로 압제하여 아나하구미의 산하로 넣고 협력을 얻어낼 생각이었는데, 악가와 손을 잡으며 보았던 일반적인 중소 문파와는 무력의 수준이 달랐다.

게다가 기세는 또 어떤가. 전부 할복을 했으면 했지, 순순히 밑으로 기어들어 올 놈들은 아니었다.

휘하에 있는 것들이 숙련된 총병이라면 얘기가 또 달랐겠으나, 하필 그런 이들을 모두 남경으로 지원해준 직후였다.

'하루가 급하거늘...'

본국으로부터의 지원은 이틀 정도 남았다. 무려 제국 육군의 후쿠시마 소장이 약속한 것이 아닌가. 상당한 양의 전력일 것이 분명할 터.

돌아가서 전력을 재정비하고, 그다음은 다른 문파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켜 산동을 장악하건. 그도 아니라면 악가를 쳐서 복속시키건 해야겠지.

생각을 마친 두목이 입을 열었다.

"알겠네. 돌아가지."

"다시 보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시체는 가져가겠다."

"마음대로."

왜놈들은 목과 팔다리가 잘려나간 제 동료들을 질질 끌고 갔다. 덕분에 지저분한 흙길 위로 핏물이 길게 그려졌다. 그를 보고 눈을 찌푸리는 이는 없었다.

사람 한둘 죽는 게 대수롭지 않은 무림이다. 전쟁이 일상이 된 왜인들도 비슷했다. 그렇게 아나하구미가 등을 돌려 돌아가려던 때였다.

난데없이 뒤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이제 겨우 약관을 넘겼을 듯한 앳된 외모의 사내였다. 그는 대문 지붕의 용마루 위를 딛고 서 있었다.

"거기, 구미초라 했나. 먼 길 왔는데 차라도 한잔하고 가지."

전신에 시커먼 정장을 차려입고는, 양인들처럼 코트와 중절모까지 눌러쓴 모양새다. 심지어 그것마저 검었다.

약관이라. 무인으로써의 성취를 기대하기는 힘든 나이였다. 보통의 재능을 가졌다면 겨우 이류 초입에 들었을 터인데.

오히려 느껴지는 기세가 다른 이들 못지않았다. 아니, 그보다 더 한가.

"가랬다가, 오랬다가. 변덕이 심하군. 자네가 문주인가."

"바로 봤네."

"그 기세를 보고도 알지 못한다면 세월이 헛된 것이겠지."

무진은 그의 행색을 보고는 방금의 말을 긍정했다. 눈가에 가득한 주름살이 세월을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백 년을 가까이 살아온 노인이겠지. 그럼에도 육체는 별로 쇠하지 않았는지, 갑주를 차려입은 입은 거구는 주변의 야쿠자보다도 한참 더 컸다.

"확실히 그렇군. 사무라이인가?"

"구시대의 잔재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야."

무진이 구두 굽을 잠시 들었다, 아래를 향해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문이 귀신 들린 것처럼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들어오게."

영락한 사무라이가 무진이 딛고 서 있는 대문을 향해 홀로 걸음을 옮겼다.

그 광경을 본 영감이 무진의 옆으로 올라오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문주님. 무슨 생각이십니까. 위험한 자입니다."

"내게 다 뜻이 있어 그러니, 조금만 참아 보아라."

"…알겠습니다. 그럼 내상은 어찌 되셨습니까."

"무얼, 새삼스레. 전부 다스렸다."

어느새 그가 문지방을 넘어 마당으로 들어온 채로 무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대한 입장에서 손님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닐 터.

무진은 아래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잠시 얘기를 나누고 오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영감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간다.

무진은 그 뒤에다 대고 말을 덧붙였다.

"심유란과 허유. 그리고 같이 온 일행들을 부탁하마."

"분부를 받듭니다."

흙바닥에 털썩, 하고 착지한 무진이 천천히 두목을 향해 걸어갔다. 마침내 무진이 그의 앞에 서자, 두목의 입에서 여전히 어눌한 중원 어가 튀어나왔다.

"초대해 주어서 고맙군."

"별말씀을. 들어가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젠 내일도 올라갑니다 여러분. 드디어 현생 일이 거의 다 정리됐어요.

그동안 일일연재도 못지켜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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