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세기 천마실록-28화 (29/29)

제 28화 극도(極道)

늘 물이 찰랑거릴 것만 같던 푸른 하늘은, 어딘가에 구멍이라도 크게 났는지 물을 주륵주륵 내려댔다. 이런 날이면 항상 꿉꿉한 공기가 사방해서 진동했다. 코를 찌르는 듯한 악취도 함께다.

솨아아ㅡ.

우산이 미처 가려주지 못한 양쪽 어깨 끝단이 천천히 젖어들었다. 그 너머로 불 켜진 가스등불의 빛이 보였다. 외세에 개방된 연태(煙台)의 옛 거리였다.

사람이라고는 개미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는 차갑게 식은 동네. 문앞에는 케케묵은 거미줄들이 진을 치고 언젠가 걸려들 제 먹이를 기다린다.

서이들의 문물과 세력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온 탓에 옛 사람들이 밀려 떠나고, 집터만이 오도 가도 못 한채로 쓸쓸히 남아 자리를 지켰다.

창문 안쪽으로 얼핏 보이는 삶의 흔적들은 온기를 간직한채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다. 계절은 여름을 향해 달리건만, 거리는 때이른 겨울을 맞았다.

그렇게 이곳은 훌륭한 완충지대가 되었다. 왜놈들의 창촌을 가리고 보호해줄, 이파리 무성한 수풀과 같이.

무진은 연초를 피웠다. 그 끝에서 난 연기가 빗방울 사이를 뚫고서 뭉게뭉게 올라간다.

후우….

연초 끝에서 떨어진 불똥이 바닥에 닿아 빗물에 젖어들었다. 무진은 시가를 대충 비벼 끄고는, 빗방울 사이로 보이는 수많은 시선들을 응시한다.

며칠 전 그들과 나누었던 대화가 머릿속에 잠시 떠올랐다.

* * *

"왜놈들을 먼저 일망타진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불가능합니다."

곧바로 답을 내리는 유소하. 이유를 묻는 무진에게 그는 이렇게 답하였다.

"추격을 시도해 보았는데, 왜놈들과 협력한 이들 중에 하나같이 정상이 없습니다. 하나같이 약에 절어있는 채로 헤실거릴 뿐이더군요."

"그 놈들의 뒤를 밟으면 그만 아닌가."

"쉽게 잡혀주질 않더군요. 약쟁이 꽁무니좀 밟는다고 드러날 놈들이었으면 저희끼리 진작 잡았을 겁니다."

"그랬었군."

"얼마 전에는 이놈들이 아편굴을 통째로 접수했는지, 그곳을 중심으로 점조직처럼 퍼져나가더군요. 그러니 포기하고 악가를 먼저 치는게 낫습니다."

유소하가 다시 태산(泰山) 근처의 지리도를 들여다 보며 말했다. 중원의 오악(五嶽)은 하나같이 천혜의 요새.

그곳에 세워진 악가의 견고한 수비진을 빠르게 뚫을 방법을 모색중인 것이다. 본래는 시간을 천천히 들여 말려 죽이면 될 터였으나.

왜놈들이 문제였다.

소재지를 특정할 수도 없고, 황군의 권력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 변수 덩어리들. 혹여 놈들이 뒤에서 덮치기라도 하면 궤멸이었다.

"놈들이 개입하기 전에 먼저 악가의 숨통을 끊어 놓아야…"

"잠깐."

그리고 놈들의 소재지를 특정할 방법은 무진이 확실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악가가 고립된 틈을 타 놈들을 먼저 일망타진하면 그만.

"내게 방법이 있다면 어떤가."

* * *

무진이 놈들의 본거지에 들어가기 전, 뒤를 밟고 있는 황군의 고수들을 슬며시 쳐다보았다.

어느새 눈이 마주쳤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를 보내오는 그들. 무진도 마주 끄덕이고는 골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습하고, 미끄럽고, 퀴퀴한 냄새가 잔뜩 올라오는 곳. 하수와 연결된 뚜껑이 이곳저곳에 방치되어 있다.

찍ㅡ.

무진의 걸음을 인식한 쥐새끼들이 거리 곳곳에서 파바박 뛰어나왔다가, 다시 그림자 사이로 숨어든다.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비좁은 골목의 끝에서부터 환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지 두 개의 벽 사이를 지나고 있을 뿐인데, 어느 순간 그 좁은 공간은 별세계로 통하는 어떠한 통로처럼 느껴졌다.

단지 기분 탓만은 아니겠지. 실제로 공기가 변했으니까.

왁자지껄 떠드는 행인들의 소리가 불쾌하다. 술에 쩔은 채로 골목의 쥐새끼처럼 떠들어대는 이들이다. 곳곳에는 하급 관료복을 입은 이들또한 모습을 비춘다.

옆구리에는 술과 여자를 낀 채로다.

"역겹군."

무진은 거리의 중심을 천천히 걸어갔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오묘한 분위기 탓인지는 몰라도, 술에 취해 홍조가 짙게 피어난 주정뱅이들은 모조리 그를 피했다.

검은 옷에 검은 중절모. 붉은 눈까지. 한 사내로써의 존재감이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독보적인 외형은 무릇 야쿠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중에는 며칠 전에 의화문에 쳐들어왔던 놈들도 있었는지, 어디론가 헐레벌떡 뛰어가는 놈들의 모습이 더러 보였다.

무진은 조급해하지 않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얼마 뒤, 똑같이 정장을 입은 이가 무진의 앞을 가로막고는 정중한 어투로 말을 건넸다.

"환영합니다. 오야붕께서 기다리십니다."

"늦으면 섭섭하겠어."

"예. 빨리 모시겠습니다."

무진은 덩치의 뒤를 따라 빠르게 걸었다. 어느 건물 사이로 들어가자 비좁은 복도 사이로 얇은 창호지만이 전부인 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공간이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안에선 쉴 새 없는 교성이 들려왔다. 추잡하게 허리를 흔드는 소리. 살을 부딛치는 소리. 비명. 고함.

향락의 장이다. 음욕과 배설, 타락의 장이기도 했다.

'잘 따라오고 있겠지.'

건물의 위쪽에서 인기척이 계속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무진은 계속해서 느껴지는 퀴퀴한 향을 무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 순간부터 음욕에 젖은 소리들은 모두 물에 젖은듯 먹먹해져만 갔다. 무언가에 막혀 들려오지 않았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복도가 차츰 어두워져 간다. 그러다가 그 복도의 끝에서 덩치가 문을 열어젖히자, 커다란 방이 하나 나타났다.

방의 모든 벽이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일본식 미닫이문이었다.

중앙에는 전에 보았던 늙은 두목이 기모노를 입은 채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앞에는 작은 다상과 함께 사케가 하나 놓여 있었다.

양옆으로 수많은 왜의 무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모두 사케를 하나씩 든 채로.

"이게 뭔가."

"환영식이지. 우리의 새로운 식구가 될 이를 위해 열었는데, 어떤가. 마음에 들었소?"

새로운 식구라니. 누구 멋대로 가족을 만들어 붙인다는 말인가. 어안이 벙벙해진 무진이 허, 하고 짧게 웃었다.

두목은 그것을 마음에 들어 보인 반응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가 넓적한 쟁반 그릇같은 술잔에 사케를 채워, 높게 들어올렸다.

파도가 쳤다. 자그만한 술잔 위에서다. 그의 뒤에는 커다란 파도와 잉어가 그려진 그림이 있었다.

과연.

그에게 있어 자신은 다 잡은 잉어와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두목이 늙은 이빨로 씩 웃어보이며 무진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지."

"그럴까."

직사각형의 형태로 둘러앉은 왜의 무인들. 무진도 따라 앉았다. 두 눈을 조금씩 감았다 뜨며 두목과의 거리를 가늠해 본다. 자그마치 오 장이 넘어갔다.

무진은 두 다리를 포개어 앉았다. 딱 무릎 정도 되는 높이에 잔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빈 잔이다. 곧 방의 벽 미닫이문을 열고 나타난 계집들이 술병을 들고 와, 앉아 있는 왜놈들의 앞 술잔에 하나씩 채우기 시작했다.

쪼르르….

"맑군."

무진이 술을 품평하는 사이, 두목이 칼을 빼 들었다.

스릉ㅡ.

잘 갈린 날이다. 사람의 피를 몇이나 머금었는지 온화한 등불을 쬐었음에도 돌아오는 빛에는 서슬퍼런 감정이 실렸다.

두목은 그것으로 제 손가락에 상처를 내었다. 검지의 중앙이었다. 피가 흘러나와 손 끝으로 모여, 손톱까지 닿고서야 떨어졌다.

똑.

똑.

물같이 맑은 사케의 위로 붉은 핏방울이 떨어져, 연기처럼 뭉게뭉게 피었다. 어느새 붉게 물든 두목의 사케를 보며 무진은 연초가 마렵다고 생각하였다.

피를 닦아낸 그가 입을 열었다.

"사카즈키고토다. 그걸 마시면 너도 이제 우리 가족이다."

그가 말을 끝내자, 옆에서 다가온 하녀가 칼을 들고서 무진의 옥체에 상처를 내었다. 일부로 저항하지 않자, 두목의 잔과 똑같이 붉은 피가 잔 안으로 스미었다.

조금 비리겠군. 무진이 중얼거렸다.

"노메!(飲め, 마셔라)"

왜인 하나가 외쳤다.

두목도 말했다.

"마셔라."

왜인들이 따라 외친다.

"노메!"

"노메!"

달아오르는 분위기.

그리고 그 사이로 발걸음을 쪼르르 옮기는 이가 있었다. 별로 중요하진 않은 말단처럼 보였으나, 품에는 돌돌 말린 종이 한 장을 가지고 있었다.

두목의 옆에 있던 카시라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노 빠가야로가(저 바보새끼가)…"

고작 꼬붕 하나가 좋은 상황에 눈치도 없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망치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든 생각은 불쾌감이었다.

그러나 곧 조금 다른 시각의 의견이 떠올랐다. 만약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전해야 할 중요한 소식이라면.

꼬붕을 즉시 참하지 않고 종이를 펼쳐 읽어 본 카시라의 눈빛이 믿을 수 없는 것을 봤다는듯 흔들렸다.

그 시선은 두목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무진의 얼굴을 한 번 향했다가, 곧바로 제 손에 들린 종이에 다시 한 번 쳐박혔다.

악가주와 서른의 정예 총병을 홀로 상대한 괴물의 용모파기가.

지금 저 반대편에서 술잔의 의식을 치르는 이의 얼굴과 너무나도 똑같았다.

이상한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소(거짓말)…!"

카시라의 심상치 않은 행동에 두목이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카시라는 두목에게 제 손에 들린 종이를 전달했다.

두목의 눈이 찢어질듯 커진다. 그리고 아까 전의 카시라와 마찬가지로, 시선이 무진과 종이에 그려진 얼굴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점점 심상찮아지는 분위기.

눈치 빠른 왜의 무인들 몇명이 슬며시 제 앞섬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곧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른 두목이, 악귀처럼 붉어진 얼굴로 다상을 박차고 일어나 무진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코로세(죽여)ㅡ!!"

순식간에 엎어지는 술상. 그리고 품 속에서 칼과 총 따위들을 꺼내며 달려오는 왜의 무인들. 무진은 그 광경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술상을 엎었다.

드르르륵ㅡ!

방의 양 옆에 있던 미닫이문이 일제히 열렸다.

단순히 계집들이 드나드는 통로가 아니었던 것이다.

무장한 왜놈들 십수명이 방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무진이 기를 끌어올린다. 단전에서 흘러나온 마공의 구결이 끈적이는 타르처럼 전신을 맴돌았다.

무진이 팔을 휘둘러, 가장 앞에서 달려오는 이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쩌억ㅡ!

도끼로 나무를 찍는 듯한 흉측한 소리가 울리고. 마기를 두른 손바닥에 강타당한 왜놈은 그대로 머리가 함몰된 채 고꾸라졌다.

무진은 즉시 놈의 손에 들린 사시미를 뺏어들고선, 두목이 서 있던 방향을 향해 투척하며 뒤로 몸을 날렸다.

터어어엉ㅡ.

날아간 칼이 투구끈을 조이던 두목의 눈 옆을 지나 벽에 틀어박혔다. 날이 조금 스쳤는지 볼에서 따끔거리는 느낌이 올라왔다.

불에 데인 것처럼 스멀스멀 올라오는 통증. 그 감각은 고스란히 분노로 치환되었다.

"…금방 죽이러 가마. 이 망할 새끼야!"

두목이 제 투구끈을 마저 조이고는, 벽에 고이 장식돼있던 제 무장들을 챙겨 매달기 시작했다.

* * *

야쿠자들의 구역 중 가장 커다란 건물의 기왓지붕에 낮게 엎드려 있던 황군의 참장 유소하는, 지붕에 귀를 댄 채로 엎드려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참장님. 아무래도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래 보이는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밑에서는 창녀들과 손님들이 서로의 몸을 밀고 짓밟으며 거리로 뛰쳐나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길을 오가는 취객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다가오는 모양새다.

참장은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가서 전해. 포위망을 좁히라고."

"참장님은 들어갈 생각이십니까?"

"그래야지. 황실의 적이 저곳에 있거늘."

유소하는 그리 말하고는 한쪽 팔로 지붕 처마 끝을 잡고 매달렸다. 그러자 조금 불투명한 창문의 안쪽으로 창관의 건물 내부가 보였다.

아무도 없는 모양.

그는 곧바로 몸을 흔들어 속력을 주더니, 콰창ㅡ! 하고 창틀째로 부수며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안으로 들어와 주변을 살핀 유소하가 밖에다 대고 말했다.

"황 유격."

"하명하십시오."

"아까 봐 뒀던 그 관리 새끼는, 꼭 생포하라고 전하고."

그는 그리 말하고는, 돌아오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건물의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황(皇)자가 적힌 기다란 장검을 든 채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파파고의 힘을 빌린 일본어라 어색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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