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화 왜국(倭國)의 객(客)
솨아아ㅡ.
밀려오는 파도는 선박의 현측(舷側)을 만나 산산히 부숴졌다. 흰색 거품의 꽃이 수면 위에서 만개하다가 그대로 툭 터져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무진이 탄 것은 아주 커다란 배였다. 증기를 힘차게 뿜으며 나아가는 그것은 세상 그 어떤 것이라도 밀어버릴것 같았다.
그런데도 멀어져 가는 청도의 항만에는 이보다 더 큰 배들이 즐비했는데, 그중 한 척은 무진이 타고 있던 여객선 몇 척을 합쳐놓은 듯한 크기였다.
늘어선 두 문의 함포는 제 키만한 포탄을 쏘아내는 괴물의 아가리와 같았다. 함교는 황제가 기거하는 궁궐보다 높았으니, 그 모습은 곧 세상을 홀로 상대하려는 듯했다.
"저게 열강의 힘인가."
듣기로는 저곳이 바로 교주만(膠州灣)에 자리잡은 독일의 조자처라 하였다. 그렇담 저것이 바로 그 유명한 전함이겠지.
무진은 자신의 품 속에 고이 잠들어 있던 권총 한 정을 만지작거린다. 그것도 같은 독일제 물건이라 들었기에.
설화는 저 배가 연방해군의 브란덴부르크급이니 뭐니 잔뜩 떠들어댔지만, 그런건 무진에게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다만 저것이 청도의 항만에 대놓고 정박해 있는 이유가 궁금했을 뿐.
무진이 그것을 묻자, 설화는 이렇게 답했다.
- 무력 시위죠. 저 치들, 청도의 항만에 정박할때 자신들이 타고온 전함의 제원을 마구 떠벌렸어요.
단지 선원들의 일탈이 아니었다. 그를 제지해야 할 함장이 오히려 앞장서, 배수량과 속력, 그리고 자신들이 가진 무장 따위를 선전했다.
전함의 정보는 주요한 기밀인데도 그렇다 하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압박하기 위해서라고.
실제로 함포가 쏘아내는 포탄의 위력이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가자, 부청멸양을 외치던 이들의 목소리가 쏙 들어가지 않았던가.
언젠가 저들과 부딛치게 되는 것은 필연일 터. 과연 전함과 군대를 상대할수 있을까. 차라리 버텨낼수 있을지를 가늠하는게 더 옳지 않을까.
무진은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품 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사각ㅡ.
점포에서 받은 전용 가위로 시가의 끝부분을 자르고, 성냥을 그어 끝부분에 불을 붙였다. 성냥도 향이 안나게 만든 비싼 물건이란다.
연기를 한 모금 빨자 머리가 조금 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같은 제품일 텐데 연기의 맛은 삼매진화로 태울 때보다 더 못한 느낌이었다.
무진은 혀를 쯧, 하고 차며 성냥을 전부 바다에 쏟아 버렸다. 거품꽃 사이로 붉은 인의 모습이 희미하게 저문다.
휘오오….
바람이 불어와 무진의 몸을 한 차례 쓸었다. 담배의 불이 꺼져버린 탓에, 무진은 삼매진화를 일으켜 불을 다시 붙이고는 수평선 너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혼잣말로,
"삼매진화가 향이 더 좋군."
하며 중얼거리는건 덤이었고.
배바람에 연기가 쓸려간다. 그 사이로 흘러간 추억이 떠올랐다.
무진은 이십년만에 보는 자신의 수하를 떠올렸다. 섭혼귀 여운생. 분명 서신에는 그리 적혀있더랬다.
본래 이름은 심유란일진대. 신교가 무너진 직후 산동으로 피신하며 개명하였다는 소식을 듣기는 하였지. 떠올려 보니 상당히 그리운 이름이다.
"섭혼귀라…"
그녀는 일찍 여읜 어머니를 대신하여 자신을 돌봐주었던 유모였다.
열 살이 됐을 쯤부턴, 매일 도망치기 바빴던 무진을 잡아다 수련까지 시킨 사부기도 했고.
무진은 자신을 훈련시키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마침내 허공에다 대고 한 마디 짧막한 감상을 던지기를.
"어쩌면 적당한 별호일지도 모르겠어."
한참을 그러며 흘러가는 연기를 쳐다보다, 수평 너머를 바라보다.
문뜩 흘러간 세월을 떠올렸다.
'지금 쯤이라면 환갑에 가깝겠군.'
천마는 항상 앞만을 바라보고 걷는 자. 모든 마(魔)를 발 아래 두어 교리를 몸소 실천하는 자. 존귀하여 그 자체만으로 교를 이끌어 나가는 상징이 되는 자.
그러나 소가 여물 삼키듯 과거를 되새김질 하는 지금의 모습은, 천마라 칭하기엔 부족했다. 열강과 황군의 군화에 짓밟혔던 모습도 역시 부족했다.
도저히 그들 앞에서 천마라 행세할 자신이 없었다.
십만대산 또한 제 손으로 불태웠다. 교인들이 떠난다 한들 붙잡지 않았다. 정확히는 잡을 수 없었다.
개화하는 세상 사이 저물어 버린 신교의 천마. 제 손으로 신교를 묻은 마지막 교주.
그래서 고른 호칭이 문주. 의화문주 무진.
'내가 부덕한 탓이지.'
신교의 잔재에 불과한 의화문으로 돌아가 유란이라는 이름을 부른다면, 그녀는 과연 달갑게 나와 자신을 맞이해 줄까.
이제 곧, 신교의 인연들과 만날수 있다는 기대감에 무진의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동시에 마음 한 켠에 엄습해 오는 왠지 모를 불안감.
불안감이라. 꼭 무언가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지 않은가.
고수의 직감은 항상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다고 말해주지, 무엇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말해 주지 않는다. 괜히 마음만 싱숭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무시하자.'
우선 일이 닥친 후 해결 방법을 생각해 봐도 늦지 않는다. 무진은 그리 생각하며 담뱃불을 비벼 껐다.
멀리 보이던 황도의 모습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애초에 청도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
뒤에서 허유가 달려와 무진에게 말했다.
"이제 내려가셔야 합니다요."
"알겠다. 가자."
증기선이 커다란 고래처럼 뿌우ㅡ, 하면서 울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곧 부두와 선박 사이에 기다란 다리가 하나 놓이며 사람들이 그 위를 건넜다.
일행도 그 행렬을 따라 배에서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도의 중심가가 들어왔다. 관광업이 유명한 지역 답게 숙박업소와 주점이 상당히 많았다.
의화문의 본거지는 중심가에서 한참 먼 외각에 위치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마차는 전부 사람들을 태운 채로 떠나간 상태였다. 덕분에 일행은 두 시진을 더 걸었다. 그동안 해는 저물어 능선 뒤를 넘어갔다.
하늘에 보랏빛이 짙어진 오후. 의화문에 도착하고 보니 규모가 상당히 초라했다. 무진이 지시한 탓이었다. 언제든 본거지를 옮길수 있게 하라며.
"…뭐가 이렇게 작습니까?"
"그게 남의 문파를 보고 할 소립니까요?"
"아, 실례…"
무진이 대문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러고는 밀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수십번을 고민한다.
무려 강산이 두 번 바뀐다는 이십년.
그들의 모습과 성격이 자신이 기억하는 그대로가 맞을까. 혹여 실망감이 표정에 드러나면 어쩔까.
신교를 망친 업이 냉랭한 그들의 태도로써 응보로 돌아오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두려움이라니.
이 역시 천마와는 거리가 한참은 멀지 않은가. 언제나 당당하게 나서며 품위를 지켜야 하거늘. 꼴이 우습다.
무진이 문 앞에서 고민하는 그때, 옆에 있던 설화가 움직였다.
"피곤한데 안열고 대체 뭐하십니까. 저 먼저 들어갑니다?"
그러고는 반대쪽 대문의 손잡이를 잡고서 벌컥 여는것이 아닌가.
끼이이익ㅡ.
그러자 당연하게도 문이 열렸다.
대문 앞에서 멍하니 서 있던 무진과 의화문 안에 있던 이들의 눈이 마주친다. 붉은 눈동자에서 쏘아진 두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익숙한듯 익숙치 않은 얼굴들. 세월의 모진 풍파를 견뎌낸 듯한 주름. 자신들의 모습을 훑는 무진의 시선을 마주한 대주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순식간에 경직된 분위기.
그들은 해후를 나누듯, 서로의 모습을 참으로 진득하게 뜯어 보았다.
그간 잘 지냈느냐며, 무진의 시선이 따스하게 물어왔다. 힘들었다고. 힘들게 버텼다고. 손에 박힌 굳은살과 늘어난 주름살이 말해 주었다.
눈물샘이 넘쳐, 완만한 볼을 타고 흐르던 방울이 턱 끝에 모여 소리 없이 떨어진다. 툭. 툭. 좁디 좁은 연무장의 모래 바닥이 젖어들었다.
무진은 그 사이서 멋적게 웃었다. 남들 다 우는데 자신마저 울 수는 없지 않느냐며. 참으로 그다운 처사라고 허유는 생각했다.
"…다들 반갑다."
무진의 입이 열렸다.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혹여 대화의 물꼬가 끊길까봐, 무진은 홀로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이십년 만이구나. 시간이 참으로 길어."
어느새 설화는 뒤로 슬며시 빠져 있었다. 쓸데없이 눈치만 빨라서는, 무진이 드물게 망설이는 모습을 눈치챈 모양이다.
나중에 필히 보답을 해야겠지.
가장 먼저, 시선이 왼쪽 맨 끝에 가 있는 사내에게 가 닿았다.
"송정원. 우락부락하던 근육은 다 어디로 가고, 주름살 가득한 노인이 남았나."
그로부터 차례차례, 시선이 오른쪽으로 옮겨간다.
"묘인풍. 머리를 길렀구나. 수염도 많이 자랐고. 젖살이 남아있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겠어. 그러고 보니 자네는 벌써 서른인가..."
"단천비. 자네는 여전해. 무공이 더 진일보했나 보군. 그리 늙지 않은 것을 보면 말이야."
"담대풍. 신강의 줄기처럼 굽은 등은 달라지지를 않는구나. 그러게 일찍부터 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후로도 무진의 호명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중원 각지에 퍼져 있다 급하게 모인 이들이다. 무려 제 얼굴 하나를 보겠다는 다짐만으로.
한 명, 한 명. 이름이 불릴 때마다 멈춰선 그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당장이라도 울어버리고 싶은걸 참고 있는 듯한 이도 한 명 보였다.
오른쪽 맨 마지막에 서 있던 이였다.
당연히 그렇겠지. 갓난아기일 때부터 자신을 봐 온 그녀가 아닌가.
무진이 또다시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말을 꺼냈다.
"그리고, 오랜만이야. 유란. 유모."
그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정확히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해야 옳겠지.
장 내에 있던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심유란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 사이가 천천히 벌어졌고.
"…잘 돌아오셨습니다. 교주님."
그 말에 무진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뭐, 이젠 교주도 아니지만. 다들 반갑군."
그 말에 허유가 분위기를 풀기 위해 과장된 웃음을 흘렸고. 다른 이들이 따라서 와하하ㅡ, 하고 웃어댄다.
그 사이로 무진은 천천히 걸어가 심유란을 안아주었다.
예전의 그 찬란했던 미(美)는 어디로 갔는지, 주름살 가득한 피부로 변해버린 그의 유모를.
'괜한 걱정이었어.'
무진은 잠시, 그들이 자신을 반기지 않으면 어쩔지 고민했던 사실을 깔끔히 잊어 날려보냈다. 그러고는 마지막 남은 미련을 담아 말했다.
"이십년 넘게 자리를 비운 못난 교주라 미안하군."
"괜찮습니다."
"저희만 힘들었겠습니까. 교주님도 똑같이 힘들었을 것을. 어찌 스스로를 탓하십니까."
"이젠 문주라니까."
또다시 사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분위기가 풀리며 장 내의 분위기는 자연스레 연회로 넘어갔다. 비록 상 위로 올라간 고기는 몇 점 안되지만, 담소를 나눌 동안 목을 축일 술만큼은 충분하였으니.
의화문에 합류한 일행은 각자 캐묵은 해후를 나누었다.
신교의 와해 이후 세력을 감추고 점조직처럼 활동하다 보니,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이들이 많은 탓이었다.
때문에 연회는 자연스레 늦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아침이 밝아올 시각.
쾅쾅쾅ㅡ.
"거기 누구 없나!"
바깥에서 들려온 소리에 무인들이 하나둘씩 깨어나 대문을 열어 보았고.
그러자 한쪽 복대에 여리여리한 일본도를 찬 무인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무진의 의화문주 복귀 하루 차.
난데없이 왜(倭)놈들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