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화
산동악가 山東岳家
그녀는 생각했다. 악가 놈들은 완전히 미쳤다고.
그래. 제정신이라면 북경의 바로 턱밑에서 그런 미친 짓거리를 하고 있지는 않겠지. 그 사실을 안다면 당장이라도 황군이 쳐들어올 텐데.
어두운 골목길을 발이 다 찢어질 정도로 달린다. 악가의 무인들이 서슬 퍼런 창대를 들고서 그녀를 쫓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 가죽이 걸레짝이 되는 것이 죽는 것보다야 낫다.
살려 보내줄 생각 따윈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그야 당연했다. 증언 한마디로 일문의 흥망성쇠를 좌우할 수 있는 그녀를 멸구(滅口)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이 악가의 수뇌였더라도 일단 죽이고 보라 명령했을 터다.
물론 지금 쫓기는 것은 그녀 자신이니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잡생각 따위 집어치우고 도망쳐야 했다.
"아으…"
갑작스레 등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고통. 날카로운 유리 파편 하나가 그녀의 발바닥에 박혀 있었다.
뚝, 뚝.
피가 흐른다.
뎅그렁ㅡ.
대충 손가락으로 유리 조각을 집어 던졌다. 길바닥에 피 묻은 조각이 구른다. 동시에 피부를 잡아 찢는 고통이 올라와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당장이라도 도움을 청해야 하건만, 주변에 지나다니는 서역인은 전부 술 한잔 거나하게 빨고서 계집질에 미친 이들이니.
저들에게 달려가 외치는 것만큼 멍청한 선택지는 없으리라.
굴까지 끌려가서 입에 아편이 물려진 채로 허리를 흔드는 최후밖에는 생각나지 않는다.
결국, 처치도 혼자 해야 했다. 흙먼지를 대충 털어낸 후, 입고 있던 옷을 부욱 찢어 상처를 감싸는 것이 전부였다.
타다다닥ㅡ!
멀리서 골목 벽에 몇 번이고 부딪혀 울린 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시야에는 보이지 않으나 근처에 있다는 뜻이겠지.
아마 근처까지 거리를 좁힌 듯하다.
'대체 무력대를 몇 개나 움직이는 거야.'
고민해 봐야 의미 없는 일. 그녀는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본래 합류하기로 했던 동료가 색출되어 죽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무공이라도 배워 두었어야 했나. 뒤늦은 후회가 물려왔다.
'그래도 의미는 없었을 거야.'
신문혈과 태릉혈로 무공 수위를 귀신같이 짐작하는 그 수법을 보건에, 아마 무공의 흔적이 있었다면 진즉에 잡혀 고문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된 것 또한 필연이라는 소리. 웃기는 일이었다.
느닷없이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발자국이 있다!"
"쫓아!"
악가의 무인들.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간다.
"썅…"
그녀가 어금니를 악물며 뛰어온 자리 뒤로, 발에서 흘러나온 피가 기다란 핏자국을 만들고 있었다. 이래선 도망친다 해도 별 소용이 없을 터.
설상가상으로 저 멀리서도 인영이 보였다. 그녀가 가는 길을 막겠다는 듯 서 있는 두 명의 모습.
커다란 키에 코트를 걸친 중절모 사내와 조금 얍샙이 같은 인상의 남자였다. 무인일까. 그렇게 보기엔 샌님 같은 덩치인데.
뒤에서 시퍼런 창날을 치켜들고 쫓아오는 놈들이 수두룩하다.
'일단 앞으로 뛰자.'
어떻게 되건 간에 순순히 잡히는 것보다야 낫겠지. 뒤에서 몰려오는 십수 명의 무인들보다는 저 샌님 둘을 뚫는게 빠를 테고.
그녀가 그리 생각하며 골목 사이를 질주할 때였다.
빛 한점 들지 않는 골목은 어두웠다. 저 앞의 사내가 걸친 장포도 마찬가지였고. 마치 풍경에 녹아들듯 인영은 그림자처럼 순식간에 다가왔다.
가로등의 빛이 닿지 않는 곳이다. 시퍼런 달빛만이 그 움직임을 관조했다. 사내의 모습은 서이의 복장을 걸치고 있음에도 영험하게만 보였다.
그 움직임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는 소리다.
'고수…'
비록 자신이 무술을 익힌 것은 아니지만, 가까이서 꽤 많은 고수의 움직임을 보았다. 어느 정도 익숙하다는 소리.
그런 그녀에게도 눈앞의 사내가 보여준 신묘한 움직임은 지금껏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수법이었다. 아니, 술법이라 해도 좋았다.
그나마 비슷한 움직임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황군의 절대 고수 염홍장의 움직임이 그러했다. 자연의 신묘함이 녹아들어 있는 보법.
불가해(不可解)의 존재와 같았다.
악가의 무인들이 사내를 향해 소리쳤다.
"이봐! 그 년 막아!"
"도둑이다!"
사내가 답했다.
악가의 무인들이 아닌 그녀를 향해서였다.
"창부야."
"…네?"
"너, 무얼 숨기고 있느냐. 아주 큰 벌집을 건드린 모양새야."
순간 좋지 않은 예감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눈앞의 존재가 실로 기괴하게 보였다. 대체 누구일까.
그녀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괴인의 손이 뻗어진다. 그녀의 어깨를 잡아 자신의 뒤로 물렸다. 손짓에 느껴지는 힘이 미약했음에도 저항할 수 없었다.
중력을 타고 떨어지는 사과처럼. 밑으로 자연스레 흐르는 폭포처럼. 그것은 당연했다.
"눈빛을 보니 알겠다. 달콤한 꿀을 아주 한가득 안고 있어. 허유."
"예."
"계집을 붙잡아 두어라. 벌들을 물리고 오마."
"알겠습니다요."
사내가 앞으로 걸어갔다. 밤길에 휘날리는 검은색 코트 자락은 일렁이는 그림자와 같았다. 저들도 눈치가 없지는 않았는지 곧장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는 사내를 향해 창을 뻗었다.
후웅. 창대가 서슬 퍼런빛을 흩뿌리며 진격했다. 그대로 공간을 점한 채로 뒤에서 이격이 뻗어져 날아온다. 유수처럼 연계되는 협공.
비록 흑도방파와 같은 모습으로 전락했다고는 하나, 명색이 천하제일 창가였다.
이어서 뻗어오는 삼격과 사격. 사내를 향해 뻗어져 오는 창대의 개수가 점점 늘어난다. 여기까지가 고작 삼 초였다.
"미쳤군."
악가 무인이 질린듯한 표정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사내는 허리부터 무릎까지 온몸의 관절을 꺾어가며 창날을 전부 피하고 흘려냈다.
첫 번째로 뻗어졌던 창날이 회수된다. 끝까지 일렁이기만 하던 그림자 사이에서 손이 뻗어 나온 것도 바로 그때였다.
덥썩ㅡ!
창백한 손 위로 힘줄이 도드라져 보인다. 여리여리하게만 보이는 체구 사이로 극성으로 연마된 금나수법이 숨어 있었다.
악가의 무인이 창대를 쥐고서 힘을 꾹 줘 본다. 상완의 이두와 삼두가 불끈 솟아올랐다. 물론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손짓. 사내의 몸에서 풍기는 기파에는 그런 느낌이 있었다. 다급해진 무인이 소리쳤다. "저 새끼 찔러!"
꾸드드드득ㅡ.
그는 창대를 잡은 손을 놓지도 않고 뒤이어 날아오는 다른 창격들을 모두 피하거나 쳐냈다. 사내가 잡고 있던 막대를 당기자, 무인 하나가 앞으로 고꾸라지듯 튀어나온다.
동시에 사내의 장법이 놈의 턱주가리를 강타했다. 온몸을 뒤덮은 커다란 근육이 무색하게도 무인의 체구는 바닥으로 스르르 쓰러졌다.
순식간에 골목 안쪽을 감도는 정적.
사내가 말했다.
"안 덤비면 이쪽에서 가지."
동시에 검은 신형이 앞쪽으로 쏜살같이 질주했다. 사내가 멈춰선 곳은 악가의 무인들이 모여있는 한복판.
좁은 골목이었다. 무리의 중심에 들어온 사내를 상대로 창을 휘두를 수는 없는 일. 자칫하면 눈먼 창날에 아군이 먼저 죽게 생겼다.
판단은 빨랐다. 악가의 무인이 소리쳤다.
"창 버려!"
그 말 한마디에 십수 개의 나무자루가 바닥을 뒹굴었다. 뎅그르르… 동시에 악가 무인들의 주먹에 기가 서린다.
묵천암뢰신공(墨天暗雷神功)의 칠흑과도 같은 내력. 사내는 그것이 별빛 서린 어두운 골목길에 꽤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쳐라!"
무인의 말 한마디에 악가 무인들의 권격이 순식간에 뻗어져 온다. 동시에 사내가 돌았다. 코트 자락을 휘날리면서다.
휘리리릭ㅡ!
풀어진 옷자락이 팽이처럼 돌아갔다. 그 모습이 부채 혼자 동떨어져 추는 선무(扇舞)와 같았다. 사내의 팔과 다리가 무인들의 명치와 턱주가리를 강타했다.
눈으로 쫓기도 힘들 속도였다. 힘없이 스러지는 악가 무인들 사이로 시뻘건 안광이 홀로 광채를 내고 있었다.
그제야 사내의 정체가 짐작이 갔다. 마인(魔人). 수십 년 전 십만대산을 주름잡으며 중원을 호령하던 마교의 잔재.
꿀꺽.
그녀가 목 뒤로 마른 침을 넘겼다.
마교의 무인인 점은 제쳐두고라도 일단 절세의 고수였다. 그런 고수가 어느새 다가와 자신의 눈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긴장이 안될 리가.
"너, 창부가 아니구나."
"……"
"이름이 무엇이냐."
"…설화(雪華)입니다."
"반갑구나. 나는 무진(無瞋)이라 한다."
당장 관아로 달려가도 모자랄 판에, 이번엔 정체 모를 마인에게 신병(身柄)을 잡혀 버렸다. 설화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우선 신발이라도 신지."
어느새 마인의 옆에 서 있던 얍삽해 보이는 남자가, 악가 무인의 발에서 신발 한 짝을 벗겨와 그녀의 발치에 내려놓고 있었다.
"일단 이거라도 신으시지요. 헤헤…"
"네… 알겠습니다…"
설화는 무진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갔다. 자의 반 타의 반인 것이, 왠지 그리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가끔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예지에 가까운 예감. 혹은 직감.
따르지 않으면 항상 목숨이 위험해지고는 했다.
설화는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도, 과연 범인지 용인지도 모를 괴물의 아가리에 발을 들여놓았다.
* * *
무진과 허유가 짐을 풀어놓았던 여관. 그 한가운데에 설화가 앉아서 무진의 눈치를 살살 살피고 있었다.
도주로를 차단한답시고 문을 막고 있는 허유는 덤이었다. 그래 봤자 창문으로 몸을 던지면 어쩔 텐가. 이 층이라 큰 문제도 없을 텐데.
물론 설화는 발에 입은 부상과 일전에 보았던 무진의 무공 수위 때문이라도 도주는 진즉에 포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의 신경전이 이어지고. 설화의 애간장도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저만한 고수가 자신만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차라리 무언가 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그녀의 심정이리라.
그 바람이 마침내 이루어졌는지, 무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너, 창부의 눈빛이 아니야. 위장했군. 창녀로."
"어떻게 알아내신 겁니까. 독심술? 고수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뜬 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확신하시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한 게 아닐까…"
말이 많다.
게다가 도중에 삼천포로 빠지기까지 한다.
긴장한 지금도 이 정도인데 긴장이 풀리면 대체 어느 정도로 말을 쏟아내는 걸까.
무진이 생각했다. 상황을 보니 황군이 첩보용으로 심어 놓은 공작원이 분명한데. 오히려 저러면서도 기밀은 쏙 회피하는 입담을 칭찬해야 할까.
이러니저러니 하던 결국 갑은 무진이 맞았다. 무진은 고민할 것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했다.
"누구의 칙서를 받았나?"
"…안 받았다고 하면 믿어주실 겁니까?"
"설마. 그대야말로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간파한듯싶은데. 신교의 고문술을 시험해보고 싶으면 그리해도 좋아."
후우ㅡ.
무진의 말이 끝난 직후, 설화가 깊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황(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