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화
산동악가 山東岳家
일평생을 십만대산과 옥 안에서만 살아온 무진에게 있어서 중원이란 늘 새로운 곳이었다. 나름 신식으로 변발도 하고 양복과 코트를 빼입는다지만 말이다.
대륙의 크기 또한 새롭게 느껴졌다. 그러나 명심해야할 점은 새로운 무언가는 항상 긍정적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지도로만 보았을땐 바로 옆에 붙어있던 산동과 하남이, 실은 걸어서 꼬박 며칠이 걸리는 거리였다던가.
하필 그 거리를 내상을 입은 몸으로 걸어가야 했다던가 하는 이아기 말이다.
"…이거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군."
"조금만 더 참으십쇼 문주님. 의화문이 곧입니다요."
"농이다. 나도 무공의 반작용으로 입은 내상 때문에 죽었다는 고수의 소문이 퍼지는건 달갑지 않아."
쿨럭ㅡ.
무진은 기다란 문장을 한 호흡 내에 전부 몰아 내뱉고는, 곧장 입 밖으로 걸쭉한 피를 한 움큼 뱉어냈다.
실로 강박증적인 행동. 그 꼴을 옆에서 본 허유의 고개가 절레절레 돌아간다.
그나마 붉은 선혈이다. 며칠 전의 거뭇케 죽은 피보다는 색이 조금 연했으니 다행이라고 봐야 할까.
"그래도 조금 호전되셨습니다요."
"이제 거의 다 남은 느낌이다. 본단에서 며칠 정양하면 완전히 회복되겠어."
"아이고, 그것 참 다행입니다. 나리."
"비꼬지 말아라 이놈아."
그 말을 끝으로 무진과 허유 사이에서의 대화는 더 오가지 않았다. 무진의 몸을 배려한 처사였다.
그 뒤로 또 한참을 걸은 끝에 무진은 산동의 초입인 제녕(濟寧)에 들어올수 있었다. 마침 해가 저물어 가는 시기다. 무진과 허유는 그곳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여관에 짐을 풀고 북경고압(北京烤鸭)을 주문해 간만의 찬을 즐겼다. 기름진 오리 고기의 풍미가 입 안을 감쌌다.
오랜만에 사람다운 식사였다.
산길에선 대충 끓인 잡곡에 간장을 풀어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난 뒤 무진이 허유에게 제안했다.
"슬슬 일어나 경치나 둘러보러 가지."
"몸은 괜찮으십니까요?"
"그래. 걸어다닐수 있을 정도는 된다."
내력을 돌려 경공법을 쓸 수는 없겠다만 걷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무진은 며칠 전에 허유가 사온 코트를 걸쳐 입었다. 이번에도 역시 검정색.
연갈색이라던가 다른 색도 많다는 허유의 권유를 마다하고서 굳이 고른 색이다. 검은색이 왠지 모르게 친근하게 느껴져서일까.
혹시 어쩌면, 피가 묻어도 별 티가 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허유는 그리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무진의 뒤를 따랐다.
산동반도는 대륙에서 저 혼자 툭 튀어나와 있는 천혜의 항구. 심지어 그 위치조차 북경과 인접한 곳이 아닌가.
상해와 홍콩과 같이 수많은 양이선들이 정박하기에 적당했다. 그렇게 들어온 교역품들은 전부 제녕을 지났다.
자연스레 발달할 수밖에 없는 도시였다.
"밤이 깊은데도 낮처럼 환하구나."
"저 가로등 하나를 만드는데만 얼마가 들었을지… 확실히 제녕이 돈이 많이 벌리긴 하나 봅니다요."
딱딱한 회반죽으로 잘 포장된 도로 옆으로 작은 별들이 늘어서 있다. 때문에 밤의 거리는 낮만큼이나 화사하다. 주로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이 그렇다.
술에 취해 홍조가 든 얼굴들. 도로를 지나는 시끄러운 발굽 소리. 타국어로 떠들어 대며 잔 부딛치는 소리. 바람이 쓸어넘기는 가로수의 머리칼.
평생 딛어본 적 없던 이국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거리였다. 무진은 그 사이를 거닐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복잡한 감상을 안고서.
그러다 무진의 걸음이 한 거리 앞에서 문뜩 멈추었다.
산발이 된 여자 한 명이 어두운 골목 사이로 정신없이 뛰어들어가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뒤로는 온통 시뻘건 전등으로 칠해진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선 골목. 창호지에 비치는 투박한 그림자는 여체의 모습을 띄었다.
사창가.
서역의 창촌은 시뻘건 전등을 매달아 홍등가라 불린다 하던가.
무진은 방금 뛰어가던 여자를 곧장 기억에서 지워 버렸다. 사창가에선 으레 있는 일이었으니까.
"여긴…"
무진이 말 끝을 흐리고, 뒤따라온 허유가 설명을 이었다.
"창녀촌이구만요."
"그건 알고 있다. 그런데 이게 왜 번화가 옆에 있는겐가. 한창 구석에 있어야 할 것이."
"문주님. 저긴 번화가가 아닙니다."
"무슨 소리. 저렇게 화려해 보이는 거리가? 사람도 많이들 지나다니는고만."
"정확히 말하면, 청의 번화가가 아닙니다요. 여긴 관아의 관리구역 바깥입죠."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청의 번화가가 아니라 하였나.
청의 땅에, 황제의 땅에 세워진 저 빛나는 거리가 청의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대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그 짧은 말은 무진의 가슴에 조그만 파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새삼 거리를 오가는 이들의 이목구비가 낮설다. 무진이 사실을 인지한 직후부터였다. 거리를 지나는 이들 중에 청의 사람은 거의 보이질 않았다.
그의 감상에 쐐기를 박듯 허유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열강의 것이지요."
저곳에 있는 것은 청이되 청이 아니었다. 열강의 자본과 기술에 잠식당한 또다른 서역일 뿐이었다.
무진이 가게 안의 점원을 보더니 물었다.
"그래도 저기 장사를 하는 이들은 전부 청나라인이 아닌가."
"자본이 열강의 것입니다요. 왜놈들과 독일인들의 자본이 대부분입죠."
"허어…."
국가란 것이 이다지도 쉽게 무너지니 참으로 부질없구나. 무진이 그리 생각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는 와중 홍등가 골목 사이에서 기다란 막대를 들고 나오는 장정 여럿이 보였다.
끄트머리에 뾰족한 창촉이 달린 물건이었는데, 그 전체를 붕대로 칭칭 감아놓은 모양새였다.
심지어 옷 안쪽에는 얇은 철판을 조금 덧대어 놓았는지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그 꼴이 누가봐도 '나 무인이요.' 하고 온몸으로 말하는 듯했다.
무진이 그들을 보고는 허유에게 물었다.
"저들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
"아, 저놈들 말입죠? 악가네요."
"그 천하제일창가?"
"예. 홍등가에서 저러고 다니는 꼬라지를 보니… 흑뢰단(黑雷團)인거같은데요?"
그들의 고개는 마치 무언가를 찾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쉴 새 없이 돌아가기 바빴는데, 청력을 강화해 엿들어 보니 도망간 창녀 하나를 찾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무진이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그들 중 한 명의 눈이 무진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가 곧장 무진을 향해 다가와 소리친다.
"당신 뭐야! 뭔데 그런 눈빛으로 꼬라봐!"
"뭐, 꼴아봐? 허…."
마치 시정잡배와 같은 모양새에 무진이 혀를 끌끌 찼다. 산동악가는 분명 정파의 세가였을텐데. 대체 언제부터 흑도의 길로 돌아섰던 건가.
그런 무진의 반응에 상대는 더 약이 올랐는지 큰 소리로 따져들기 시작했다.
더구나 흑색 트렌치 코트에 중절모를 걸친 무진의 모습은 영락없는 샌님의 그것이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얕보였다.
"당신, 이거 안보여?"
왈패는 그러면서 제가 들고 있던 창대를 허공에 휘적거렸다.
"창이야, 창. 응? 눈 안깔아?"
"아주 미쳤군. 술이라도 한 잔 걸쳤나?"
"에이 씨발, 척 봐도 비실비실한 새끼가…"
놈이 무진의 가슴팍을 향해 손가락을 세우고 쿡쿡 찌르려는 그때, 왈패의 동료가 뒤에서 달려와 제지했다.
"에헤이… 그만해. 그만! 딱 봐도 지나가던 평민이구만."
"아니 썅, 저렇게 꼴아보는데 민초는 무슨…"
발작하던 왈패가 제 동료들에게 팔다리를 붙잡힌다.
"이봐! 이놈 들어서 뒤로 데려가. 사단날라. 빨리!"
"씨발 놔보라고ㅡ!"
잠시간의 소동이 지나간 후, 그들의 대장 격으로 보이는 덩치 하나가 와서 무진에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요즘 민감한 일이 잦아서…"
허유가 물었다.
"민감한 일이요?"
"관계 없는 분들에게 말해주기엔 조금 그렇습니다. 그냥 그렇다고 알아 두십쇼."
덩치는 그리 말하더니, 품에서 은전 두 푼을 꺼내서 허유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소소하지만 대가입니다. 어디 신고하시면 서로 얼굴만 붉어지니, 아무쪼록 넘어가 주셨으면…"
자신의 손에 쥐어진 돈을 본 허유는, 헤벌레 웃으며 답했다.
"아, 그럼요. 저희가 뭐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하하하, 마음씨가 참 넓으신 것이 대협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아니 뭐, 저희야 말로…"
이젠 한술 더 떠서 서로의 얼굴에 금칠이나 하기 바쁘다. 무진이 그 꼬락서니를 보다 못해 뒤로 돌아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덩치가 질문을 던졌다.
"그 혹시… 이쪽으로 계집 하나가 뛰어갔다거나 하는걸 보신 적은 없습니까?"
"계집이요?"
"예. 창녀 하나가 도망을 쳤지 뭡니까."
그러고 보니 아까 골목 안쪽으로 뛰어 들어가던 여자가 하나 있었지 않나. 무진이 기억을 곰곰히 되짚어 보고는 말했다.
"아, 본 것 같군."
"어디로 갔습니까? 내 잡으면 사례하리다."
"저쪽이요."
무진이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런데 가리킨 방향은 아까 전 창녀가 달려가던 곳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감사하오, 대협. 얘들아 찾았단다. 가자!"
그걸 본 덩치가 곧장 제 수하들을 이끌고 달려나간다.
허유가 무진에게 물었다.
"문주님. 정말 보셨습니까요?"
"그래."
"정말 저쪽으로 간걸 보셨습니까? 아니, 대체 어느새?"
"아까 골목에 들어오기 전에 봤었지. 그리고 방향은 반대쪽이다."
"예, 예에?"
놀라는 허유를 향해 무진이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놈들, 악가라고 했지?"
"예. 아마 맞을 겁니다요. 악가 놈들이 이 주변 사창가를 꽉 잡고 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니…"
무진이 허유의 오른손을 당겨와 맥을 잡으며 말했다.
"저 덩치, 아까 은전을 쥐여줄 때 네 태릉혈(太陵穴)과 신문혈(神門穴)을 짚더구나. 알고 있었느냐?"
"아뇨, 몰랐습죠. 워낙 감촉같아야죠."
"아마 일부로 시비를 걸었을 게다. 수상해 보이는 이들은 전부 이런 식으로 확인하는 것이겠지."
"이런 우라질 놈들이…."
허유의 얼굴이 붉어진다.
"창녀 하나를 잡는데 저런 고수를 굴린다… 뒤가 구리다고 생각하지 않나. 더구나 네가 전에 말했었지. 악가 놈들이 왜놈들과 손을 잡았다고."
"예… 그렇긴 한데…."
"우리도 도망친 그 계집을 쫒자. 놈들이 무슨 비밀을 숨기고 있을지 궁금하구나."
그러자 허유가 또다시 사색이 된 얼굴로 답했다.
"문주님 내상은 괜찮으십니까요? 혹시라도 충돌하게 되면…"
"가볍게 놀아주면 그만인 일이다. 설마 놈들이 제녕 한가운데서 총이라도 발포하겠느냐."
"그래도 혹시 고수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괜찮다. 악가주라도 나오지 않는이상 고전할 일은 없을게다."
무진은 건곤대나이를 믿었다. 비록 미완성인 상태라 자신에게도 충격이 온다지만, 그것만으로 소림의 고수들을 모조리 꺾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질 일은 없었다.
악가 놈들이 미쳐서 화포라도 마구 쏴대지 않는 한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젠 진짜 아무 문제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