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세기 천마실록-15화 (16/29)

제 15화

산동악가 山東岳家

"황(皇)."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단어는 한순간에 일의 경중을 뒤바꿔 놓았다.

황실이라. 악가(岳家)와 소림에 이어 마적 놈의 품에서 찾은 칙서까지 포함하면 벌써 세 번째다. 온 나라에 황실의 입김이 끼치지 않은 곳이 없다.

아무리 중원 대륙이 황제의 땅이라지만 너무 과하다. 대체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걸까. 무진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황제의 칙서까지 받은 양반이 여기서 왜 창부 노릇을 하고 있지?"

"그건 기밀입니다."

선을 긋겠다는듯 딱 잘라 말하는 설화.

"지금 기밀이니 뭐니 따질 상황이 아니다. 창부야. 네 목숨줄을 누가 쥐고 있다고 생각하나."

"마인들이 이 일에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없지. 그런데 지금부터 끼어들기로 하였다. 그러니 어서 말하거라."

내뱉고 나서 생각해 보니 고집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녀 역시 어안이 벙벙했는지 무진을 노려본다.

그렇게 노려보면 뭐 어쩌잔 말인가. 주도권은 여전히 자신에게 있었다.

"감당 불가능한 정보일 것입니다. 구해주신건 나중에 따로 알려 포상을 내리겠습니다. 이만 빠지는게 어떻습니까."

무언가 일어나려 하고 있다. 따지자면 단순한 직감에 불과했다. 그러나 경지에 이른 고수의 감은 예지와도 같은 법.

지금이라도 그 끈을 확실히 쥐고서 따라가야 휩쓸리지 않을 터.

무진은 기껏 눈 앞에 나타난 줄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감당하고 말고는 내가 정한다. 악가가 소중히 모아온 꿀단지를 네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말하여라"

무진이 그녀에게 고개를 들이밀며 협박했다. 붉은 한 쌍의 눈동자가 위협적이었다.

보아하니 말하지 않으면 무슨 수를 써서든 알아낼 기세였다. 가령 고문이라던가. 어쩐다. 설화의 수심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냥 말해버려? 어차피 퍼진다고 가치가 훼손되는 정보도 아닌데.'

하아…

그녀의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고민이 많았는지 그 새 수척해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말하지요. 혹시 피울거라도 있습니까?"

"연초 말인가?"

"예."

"계집이 연초라니. 배우기 쉽지 않았을 텐데."

"남정네들 사이에서 일하다 보니 알게 됐습니다."

무진이 담백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일이라니. 무슨 일을 말하는 겐가."

잠시 벙쪘던 설화가 이내 속뜻을 알아듣고는 붉어진 얼굴로 대꾸했다.

"…미쳤습니까? 당연히 군(軍)입니다."

"허, 그래. 알겠다."

무진이 품에서 목곽을 하나 꺼내 열었다. 마지막 남은 연초 한 개비가 보였다. 아끼던 건데. 아무래도 정보값으로 퉁 쳐야할 모양이다.

무진이 설화의 입에 담배를 물려주고서 손가락을 튕겼다. 샛노란 불꽃이 손가락 사이에서 튀었다.

설화의 눈이 크게 떠진다.

"방금 무엇입니까?"

"뭐가 말이냐."

"그 손가락에서 불이…"

"잔재주다."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것이 절세의 고수만 펼칠 수 있다는 기예인줄도 모르고.

그녀가 입에 문 연초를 빨며 향을 음미한다. 누구에게라도 뺏길 새라 급하게 들이마시는 모습.

시가의 끝이 빠르게 타들어간다. 나름 고급품인데. 향이 아까웠다.

"후우… 뭐부터 듣고 싶으십니까."

"네가 악가에서 뭘 들었는지. 혹은 보았는지. 놈들이 벌떼처럼 달려들던 이유가 무엇이냐."

설화의 입이 열리려다 말았다.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린다. 말하기를 주저한다기 보다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사건의 규모가 커다란 것일까. 무진은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가 말을 다시 시작한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였다.

"놈들이 하고 있던건 총포(銃砲)의 밀수입니다."

화두가 강렬하다.

곧바로 무진의 표정에 금이 갔다. 보기 드물게 당황하는 모습.

"…미쳤군."

"황군이 안다면 바로 악가를 밀어버릴 겁니다. 규모에 따라 황군 제일고수가 움직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아본 바로는 충분히 그리 될 겁니다."

"어느 정도지?"

"수천 정. 지역 군벌 하나를 능히 무장시킬 수량입니다. 왜국(倭國)의 무라타 소총과 그 탄약을 떼거지로 들여오고 있습니다. 폭탄을 몇 번 들여온 것도 확인되었습니다."

"확실히 눈에 불을 켜고 쫒을만 하군."

"아신다면 좀 풀어주시겠습니까. 이 사실을 관에 알려야 합니다."

무진이 이마에 손을 얹고 고민했다. 예상보다도 훨신 커다란 일에 끼어든 형국. 그러다 문뜩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관이라고?'

수천 정의 소총을 밀수한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적을 하고 또 제녕까지 운송하는 동안 감사가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터.

어떻게 피했나.

간단하다. 뒷돈을 먹이면 그만이다. 그것도 몇 개의 현을 전부 장악할 정도로.

순간 섬뜩함을 느낀 무진이 설화에게 물었다.

"너, 앞뒤 따지지 않고 들어올 성격이 아니야. 본래 예정된 탈출로가 무엇이지?"

"…창부로 영업을 나가면 대기하고 있던 이가 와서 절 지목하는 식으로 빠져나갔을 겁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무인들에게 걸려서 죽었습니다."

"이런."

서이들의 거리 한복판에서 대놓고 창관을 운영하며 벌어들인 수익이 어디로 갈까. 놈들은 이미 산동의 절반을 꽉 틀어쥐고 있었다.

관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라고 했나. 그럴 리가. 돈을 받았으니 알고도 무시한 거다. 눈 뜬 장님처럼.

오히려 관아가 위험하다.

어찌 걸렸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나. 그야 당연하다. 일대에 전부 악가의 눈과 귀가 깔려 있을텐데.

무진의 머릿속에서 상황이 맞춰졌다.

"…일이 꼬였군."

무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화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거 아주 위험해. 허유. 짐을 챙겨라. 당장 떠난다."

지금쯤이면 뒷골목의 소동이 악가 놈들에게 발각되고도 남았을 시간이겠지. 십수명의 무인들이 쪽도 못쓰고 당했다.

마침 놈들의 손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수량의 총이 있지 않나.

무진이 말했다.

"당장 제녕을 떠야 해."

"예? 아니, 무슨 일입니까요?"

"설명할 시간 없다. 어서."

허유가 서둘러 짐을 정리한다. 옷가지가 조금 들어있는 케이스 하나만 챙기면 충분했다. 무진이 작게 뇌까렸다.

"쯧… 이미 시작됐군."

"뭐가 말이죠?"

"생사결(生死決)."

그와 동시에 밖에서 수십명의 걸음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어림잡아 삼십.

뒤이어 어디선가 들어봤던 목소리가 무진의 귀청을 울렸다.

홍등가에서 만났던 덩치의 목소리다. 허유의 혈맥을 짚었던 바로 그놈. 놈의 말소리가 바닥 아래서 답답하게 들렸다.

-여기에 놈들이 있는게 확실하오?

-예. 아마 맞을 겁니다요.

-제보 고맙군. 여기 받으시오.

-아이고, 뭐 이런걸 다…

-어디 방이지?

-이 층으로 올라가셔서 맨 끝 구석에…

'이미 다 알고 왔군."

무진이 설화를 돌아보며 말했다.

"옷 벗어라."

"그게 무슨……"

"급하다. 빨리 벗어."

동시에 무진은 여관의 이불을 말아 옷 안에 밀어넣기 딱 좋은 형태로 만들기 시작했다. 무슨 속셈일지 대강 감이 잡혔다.

설화는 구석에서 쪼물거리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노출도가 과한 옷이라 금방금방 벗겨졌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움을 참고서 옷을 전부 갈아입자, 무진이 설화가 입고 있던 옷가지 안에 구겨진 이불을 끼워넣었다.

코트로 옷 입은 이불더미를 감싸자, 등 뒤에 메달린 덩어리가 정말 감쪽같이 등 뒤에 업힌 사람처럼 보였다.

살짝 삐져나온 옷가지를 보니, 어둠 사이로 숨으면 완벽하게 속아 넘어가리라.

"내가 시선을 끌겠다. 허유. 그녀를 의화문 본단까지 이송해라. 남양호를 타고 쭉 내려가면 곧장이겠지."

"문주님. 아직 내상이 남아있으시지 않습니까요. 차라리 제가…"

"됐다. 실수 없게 처리해라. 일이 잘 풀리면 산동을 먹을 수 있을게야."

콰드득ㅡ!

"먼저 가지."

무진이 여관의 창호지를 뚫고서 낙하했다. 검은 신형이 순식간에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밑에서 악가 무인들이 소리치는 것이 들린다.

"저기 있다!"

"잡아!"

그리고 귀청을 울리는 뇌음.

타아앙ㅡ!

"이런 미친 놈들!"

허유가 소리쳤다.

"이럴 때가 아니구만요……아가씨는 얼른 나갑시다."

"우선 관에 도움을 요청해야…”

"미쳤습니까요? 거리 한복판에서 총을 쏴 재끼는데 관이 잘도 도와주겠습니다. 안 그려요?"

허유가 설화의 팔을 잡아끌고 문밖으로 나섰다. 무인들의 발소리와 총성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무진이 시선을 확실히 잡아끌고 있다는 뜻. 그러나 상대가 총을 들고 있다면 그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지금 말고는 기회가 없었다.

'우리가 멀어져야 문주님의 숨통이 트인다.'

남양호의 나룻배를 타고 도망친다. 물 위에서는 쉽게 쫓아오지 못할 터. 허유는 조용히 여관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달렸다.

* * *

무진은 지붕을 타고 넘으며 도주했다. 아래에선 서른을 조금 넘는 인원이 전부 기다란 장총을 들고서 자신을 뒤쫓는다.

간혹 창대를 꼬나쥐고 똑같이 지붕 위를 달리는 이들도 있었다. 자신감에 넘치는 신진 고수들이 주로 그랬다.

앞뒤에서 덮쳐 오는 창대를 서로 빗겨내며 턱을 후려치자, 고개가 마치 닭 모가지처럼 손쉽게 비틀린다.

즉사였다.

'저들보다는 아래쪽이 더 문제인데.'

길을 가다 말고 무슨 일인가 하며 뒤를 돌아보는 평민들. 곧 그들의 손에 들린 막대가 총이라는 것을 알고는 기겁하며 숨어 들어간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장총이라. 위력만큼은 가히 고수의 일 초에도 비견될 만한 물건이 서른 정이다.

본래는 허유가 도망갈 시간 정도만 벌어 보자는 심산이었을 터.

건물의 옥상 사이를 타넘으며 사각을 방패 삼아 숨었다. 아직도 자신의 뒤에 매달린 이불이 도망친 창부인 줄 아니, 우스운 일이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끌면…'

그때였다.

피잉ㅡ!

일순간, 무진의 머리 위에서 날카로운 섬광이 일었다. 날에 비친 달빛.

무진이 황급히 몸을 뒤로 내빼자, 서 있던 자리 위로 새하얀 막대 자루가 꽂혔다.

돌로 된 옥상에 쩍…. 하고 거미줄 모양으로 금이 벌어졌다.

"실로 위력적이군."

"호오, 이걸 피해?"

창대 옆으로 내려앉은 남자가 대꾸했다. 그것도 죽일듯한 눈으로 무진을 바라보면서.

불어온 바람에 길게 휘날리는 회백색 머리칼이 검은 하늘에 유유히 흐른다. 남자가 바닥에 꽂힌 창신을 회수해, 몸 옆으로 빙빙 돌리며 말했다.

"너, 암시관(暗視官)의 계집은 어디에 두었나. 네가 빼돌린 것을 알고 있다."

"너에게 말해야 할 이유가 있나?"

남자의 목과 미간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어지간히도 화난 모양새가 아닌가.

"이런 육씨럴놈. 곧 만들어 주마."

무진이 놀려 먹으려는 듯이 웃으며 답했다.

"그래, 기대하지. 악가주(岳家主)."

악가주의 손에 들린 창대에서 시뻘건 색의 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봉황신공(鳳凰神功)의 내력이었다.

밤하늘을 유성처럼 가르며 쏘아지는 창대를 피하며, 무진이 건물 사이를 훌쩍 뛰어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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