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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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은 즐거운 마음으로 목요일 수업을 마치고 일어났다. 오늘 저녁에 연희의 자취방에서 함께 자고 금요일부터 2박3일 새터를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 점심 드시고 가세요.”
안주인이 수현에게 다가와 제안했다. 수현이 약간 난감하게 위층을 바라보았다.
“쟤도 좋다고 하더라구요... 선물 들어온 한우 구웠으니까 좀 들고 가세요.”
안주인이 부탁했다.
“네... 그럼... 저야 뭐...”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식당 쪽으로 움직였다. 밥 시간은 기가 막히게 맞추는지, 위에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두 자매 사이에는 여전히 냉기가 있었지만, 싸움이 있지는 않았다.
식탁은 굉장히 화려했다. 수현은 감사인사를 하며 앉았다. 식사는 그다지 버겁지 않게 시작 되었다. 의외로 소향은 발랄하게 굴었다. 약간은 과장되 보일 정도로.
“쌤? 음,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
소향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수현은 여태껏 이리저리 알아서 잘만 불러 놓고는 갑자기 지금 와서 라는 생각이 들었다.
“편하신대로 부르세요. 쌤도 좋고, 야도 좋고, 제 이름은 황수현입니다.”
수현이 약간 삐죽하게 말했다.
“음, 그럼 수현아? 나보다 한 살 어리잖아.”
소향이 말했다.
“네. 그러세요.”
수현이 말했다.
“소향아...”
안주인이 그녀를 작게 다그쳤다.
“음, 뭐...나도 쌤으로 할게. 부르기도 편하네.”
소향이 작게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수현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부터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쌤, 이것도 먹어봐요.”
소향이 잘 구워진 양념불고기를 그에게 얹어주며 말했다. 존댓말도 마음대로였지만, 행동도 마음대로였다. 안주인은 당황했고, 소현은 인상을 찡그렸다.
“감사합니다.”
수현은 적당히 맞춰주며 그냥 음식을 먹었다. 맛이 좋았다.
“맛있네요.”
수현이 음식을 씹어 넘기고 말했다.
“그거 내가 한 건데.”
소향이 기분 좋게 말했다. 수현은 의외라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지가 하긴 무슨... 섞기만 해놓고는...”
소현이 중얼거렸다.
“야, 섞는 것도 중요해. 골고루 퍼지게 하는 게 중요하거든?”
소향이 말했다.
“네, 맛있어요.”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타입이랑은 싸우는 게 피곤한 일이다.
“들었지?”
소향이 자기 좋은 쪽으로 듣고 말했다. 수현이 소현에게 작게 윙크를 했다.
“그래. 잘 섞었네.”
소현이 말하고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안주인이 안도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두어 차례 그런 상황이 지나가고 작은 머핀이 후식으로 나왔다.
“이건 진짜 내가 만든 거다? 먹어 봐.”
소향이 약간 기대에 찬 얼굴로 말했다. 이번에는 소현도 가만히 있는 걸로 보아 진짜인 모양이었다. 수현이 한 입을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요. 음식에 소질 있나 봐요.”
수현인 가볍게 칭찬했다.
“내가 귀찮아서 그렇지 하면 또 못 하는 게 없지.”
소향이 우쭐해 하며 말했다.
“카페 같은 거 하면 잘 어울리겠어요.”
수현이 수긍해주었다.
“뭐, 생각해볼게.”
소향이 말했다. 수현은 그러든지 말든지라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이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서자 안주인이 감사를 표하며 과외비를 주었다. 수현이 고개를 숙여 받고는 인사를 했다. 소향은 그 사이에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아, 두 모녀와 인사를 한 수현은 문을 나섰다.
정원을 지나 문을 나선 수현의 등 뒤로 급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현이 놓고 간 것이라도 있나 싶어 등을 돌렸다.
“쌤, 나랑 같이 가요!”
소향이 운동 가방을 들고 나오며 외쳤다. 수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소향은 그의 곁으로 와 먼저 대문을 나섰다.
“복싱가요? 먹자마자 하면 안 좋을 텐데?”
수현이 한숨 쉬듯 물었다.
“아니...거긴 남자 놈들이 너무 노골적으로 봐서 그냥 접었어.”
소향은 간단하게 말하며 웃어보였다. 확실히 남자들의 이목을 끄는 몸매와 얼굴이긴 했다. 거기다 저 운동복은 솔직히 눈이 안 갈 수가 없지 않은가?
“...전 버스 타러 가요. 어디 데려다드리지 않아요.”
수현이 경고하듯 말하고는 움직였다.
“응. 나도 기대 안 해. 근데, 쌤은 운동 뭐했어요?”
소향이 물었다. 보니까 쌤 소리 할 때만큼은 ‘요’자를 붙이는 게 웃겼다.
“복싱이랑 격투기 조금이요. 왜요?”
수현이 사실이자 사실이 아닌 말을 했다. 미래에 한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최근에도 쉐도우는 계속 해주고 있다.
“와, 우리 쌤 생각보다 엄친아였네....”
소향이 드물게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그래서 뭐 나한테 관심이 좀 생겼어요?”
수현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음, 약간? 내가 요즘 남자를 별로 안 만났는데... 슬 만날 때도 됐고, 보니까... 쌤은 좀 신선한 타입이라서.”
소향은 당당했다. 한 번도 거절 당해본적이 없는 당당함이었다. 수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신선?”
수현이 약간 기분이 나빠 물었다.
“내가 엄친아 타입 인간을 안 만나 본 건 아닌데, 뭔가 쌤같은 부드러운 샌님 타입은 안 만나 봤거든. 볼 때마다 향기롭고. 향기로운 남자는 진짜 흔치 않거든.”
소향이 간단히 말했다.
“...저 여자친구 있습니다.”
수현이 말했다. 그는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음, 그래서 여태 철벽이었나... 나름 순정파네...아님 아직 사귄지 얼마 안 됐나?”
소향이 떠보듯 물었다.
“... 적당히 하세요. 전 여기서 버스 탈 테니, 운동 가세요.”
수현이 기분 나쁜 티를 내며 말했다.
“음, 방금은 좀 선 넘었나? 오케이. 근데 뭐 좀 친하게 지내자는 건 괜찮지 않나? 나랑 싸워서 좋을 건 없잖아?”
소향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수현이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척을 질 관계도 아니긴 했다. 돈을 주는 건 소현의 부모님이었다.
“쌤, 그럼 가요. 다음에도 말동무나 해줘요.”
소향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등을 돌렸다. 수현은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꽤 피곤한 타입에게 걸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
수현은 토토와의 산책을 길게 가졌다. 앞으로 2~3일 정도는 산책을 못 할 것이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지만, 맡길만한 곳이 없었다.
수현은 간단한 홈트레이닝 후 샤워를 마치고 더플백에 옷을 챙겨 집을 나섰다. 연희를 만나러 가는 길은 항상 즐거웠다. 그게 골치 아픈 일이 있던 날이더라도. 하지만, 오늘 만큼은 약간 마음이 무거웠다.
수현은 연희를 기다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능력이 생각보다 유용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하루였기 때문이다.
“자기야!”
수현은 깜짝 놀라 앞을 바라보았다. 연희가 약간 걱정스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무슨 일 있었어?”
연희가 손을 들어 걱정스레 수현의 이마와 얼굴을 만지며 물었다.
“아... 과외 때문에 잠시 생각 좀 하느라.”
수현이 얼른 말했다.
“과외?”
“응. 우리도 개강이고, 걔도 개학이고. 시간 바꾸고 해야 하잖아...”
수현은 얼른 말을 지어냈다.
“아...”
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까 대학 생활이 빡빡하겠다 싶어서.”
수현이 말했다.
“음... 하긴 나도 시간대 조절하느라 좀 그렇더라... 약간 줄일까 봐.”
연희도 말했다.
“그럴 수 있으면 그렇게 해. 그나저나 3월부턴 내가 못 데리러 올 것 같은데 어쩌지?”
수현이 약간 민망하게 웃으며 말했다. 과외는 밤으로 바뀌면서 11시에 끝나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나도 11시에 끝나는 걸로 해주셔서 지하철 타고 가면 돼.”
연희가 말했다. 아마 그녀의 미모를 보고 오는 손님들 덕에 야간을 빼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일 끝나고 집 가면서 통화하자. 그럼 되겠다.”
수현이 아쉽다는 듯이 말하며 연희의 손을 자신의 패딩 주머니에 넣었다.
“응. 그것도 좋겠다!”
연희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나저나 우리 오늘이 마지막 고기의 날이지?”
수현이 말을 돌렸다. 연희의 냉장고에 있던 고기는 수현이 합세한 덕에 드디어 바닥을 보였다.
“응. 엄마는 너무했어. 아무리 그래도... 그 양을... 혹시 엄마가 이거 예상했나?”
연희가 설마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수현이 말했다.
“울 엄마는 자기 알긴 하거든...”
연희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어? 말씀...드렸어?”
수현이 조금 놀라 물었다.
“응... 뭐 나쁜 것도 아니고, 엄마랑은 나 그냥 다 말하거든. 우리 핸드폰 배경화면도 커플사진이잖아. 엄마가 보고 묻길래... 말했지.”
연희가 말했다.
“어... 그래도 그냥 나눠주라고 주신 정도겠지... 같이 방에서 먹으라고는 아닐 거야...”
수현이 말했다.
“그, 그렇겠지? 아무리 우리 엄마라도...”
연희가 말했다.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나 보고 뭐라셔?”
수현이 슬쩍 물었다. 연희가 살며시 미소지었다.
“잘생겼대.”
연희의 말에 수현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근데, 얼굴 값 할 수 있으니까 조심하래.”
연희가 조금 악마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순간 수현은 오늘 일이 생각나 뜨끔했으나, 초인적인 힘으로 내색을 하지 않고 버텨냈다.
“사진 빨이 좀 심했나보다.”
수현이 말했다.
“겸손 떨기는... 아, 도장 찍어놓고 싶다.”
연희가 말했다. 수현이 머리를 연희 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의 볼에 가벼운 입맞춤이 찍혔다가 사라졌다. 둘의 얼굴에 만족스런 웃음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