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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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은 약간의 숙취를 느끼며 일어났다. 크게 문제가 되는 수준은 아니었으나, 어제의 일은 확실히 무자비 했다. 수현의 핸드폰 바탕화면의 커플 사진을 본 아이들이 그에게 술을 어마어마하게 먹인 것이다.
“미친놈들이었어...”
수현이 머리를 잡고 일어나며 말했다. 다년간의 음주 프로가 아니었다면 정말 오늘 바닥을 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어제 아이들의 눈을 피해 온갖 잔 빼기 기술을 선보였다. 평소였다면 자신도 기분 좋게 당해줬겠지만, 오늘은 연희와의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큼! 큼!”
그는 작게 목을 가다듬었다. 마지막으로 노래방에서 소리를 질렀더니 아직 목소리가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수현은 연희에게 잘 일어났다는 문자를 보내고, 토토의 밥을 챙긴 뒤에 해장을 위해 라면 물을 올렸다.
연희는 보통 일하는 중에는 핸드폰을 보지 않는 편이지만, 오늘은 걱정이 되었는지 금방 답장이 왔다. 수현은 괜찮다고 문자를 보내고는 라면을 넣었다. 칼칼한 냄새가 올라와 식욕을 자극했다.
간단하게 요기를 마친 그는 가볍게 강아지 산책으로 운동을 대신했다. 정상 컨디션이 아닐 때 괜히 운동을 할 필요는 없었다.
샤워를 끝마친 수현은 HTS를 켰다. 기아차 주식은 순조롭게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수현은 목요일에 받았던 과외비를 기아차 매입에 사용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조금 오르는 듯하던 STX의 주가는 다시 조금 하락하여 최저 수준과 비슷한 가격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수현은 약간 조바심이 났다. 조금 수익률이 적더라도 안전하게 4월물을 살걸 그랬나 싶었다.
“후, 아니야. 분명 곧 오른다. 그렇게 급하게 올랐던 느낌은 아니었어.”
수현은 스스로를 다독이듯 말했다.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심적으로 안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현은 STX관련 기사를 찾아보거나, 다른 중공업들을 괜히 확인을 하다가 HTS를 껐다.
그는 비트코인에 대한 정보도 좀 찾아볼까 하려다가 말았다. 그는 머리를 저었다. 아직은 비트코인 쪽은 조금도 건드리지 않기로 했으면서 또 조바심이 일었다. 얼마 전 지갑을 만들어두었으므로, 비트코인 쪽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한 수현은 컴퓨터를 껐다.
채굴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직 채굴 자체가 드문 상황이었다. 수현은 채굴 된 비트코인이 매물로 나오면 조금씩 매입하는 것만이, 비트코인의 역사에 가장 적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을 했다.
수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시간은 넉넉했다. 그는 숙취도 제거할 겸 조금 더 잠을 청하기로 하고, 알람을 맞춘 뒤 침대에 누웠다. 잠은 금방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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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는 집에 어차피 음식도 많으니 맥주만 조금 사서 집에 가자고 했다. 아무래도 저번의 신혼부부 놀이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았다. 수현도 싫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맥주 캔이 든 봉지를 한쪽씩 들고 손을 잡고 걸었다. 해가 제법 길어져 저녁시간이었음에도 길게 노을이 있었다.
“이제 6시 다 되어 가는데도 해가 아직 있다.”
연희가 붉은 하늘을 보며 말했다.
“그러게. 해 길어졌다.”
수현도 문득 느껴진 해 길이에 시간이 지난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생각해보니까, 우리 다음 주면 새터가는 거지?”
연희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수현도 새삼스러웠다. 새터라니.
“그러네. 벌써 다음 주네...”
수현이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시간 빠르다... 그러고 나면 바로 개학이잖아!”
연희가 더 놀라운 이야기라는 듯 말했다.
“개강.”
수현이 작게 웃으며 정정해주었다.
“아, 개강!”
연희가 작게 웃으며 답했다. 생각해보면 웃기긴 했다.
“아, 새터 기대된다. 막 우리는 반도 나뉘고, 조도 나뉜다던데... 우리 같이 들어갈 수 있을까?”
연희가 꼭 그랬으면 좋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응. 그렇다더라... 조야 그렇다 쳐도 반은 같은 반 되어야 좋은데... 어떻게 자를지 궁금하네.”
수현이 기억을 해내려 애쓰며 말했다. 그러나 어떻게 나눴는지는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반끼리 같은 버스를 타고 갔던 것 같긴 한데...
“오늘부터 기도하자.”
연희가 맑게 웃으며 꼭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수현이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랑 다를 게 없네. 누구랑 같은 반 되게 해주세요. 비는 거 보면...”
수현이 생각 없이 말했다.
“뭐어? 누구랑 같은 반 되게 해달라고 빌었어?”
연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에게 물어왔다.
“아니, 고등학생들이 그런다는 거지... 난 그런 적 없지.”
수현이 황급히 덧붙였다.
“흠, 내가 첫사랑이라더니...”
연희가 괜히 삐친 척을 했다. 수현이 작게 애교를 피우며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연희가 웃지 않고는 못 버틸 때 까지.
둘은 가벼운 걸음으로 대문 앞에 도착했지만, 걸린 전적이 있던 만큼, 연희가 먼저 들어가 문들을 살피고 난 후에 수현이 올라갔다.
“우리 무슨 작전 하는 것 같다.”
방으로 들어서 현관문을 닫은 연희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본드, 제임스 본드. 이렇게?”
수현이 살짝 인상을 찡그리고 말했다. 연희가 조금 더 크게 웃었다.
“음, 그럼 난 본드걸인가?”
연희가 약간 섹시한 척을 하며 신발을 벗고 말했다.
“아니, 새신부지.”
수현이 작게 미소 짓고는 연희를 돌려 세워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연희도 대답이 마음에 든 듯 그의 입맞춤에 적극적으로 화답했다.
“이제 프로네...”
수현이 입술을 떼고 가볍게 버드키스를 마치며 말했다.
“누구랑 매일 같이 연습했거든.”
연희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손부터 씻고 밥 먹자. 배고프겠다.”
수현이 신발을 벗고 들어서며 말했다. 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네 명절음식은 생각보다 굉장했다.
“이거 갈비 아니야? 이건 불고기고.”
수현이 당황하며 맛깔나게 재워놓은 고기들을 보며 말했다.
“내가 말 안 했나? 우리집이 고깃집 하잖아. 할머니 때부터 올라갔었어.”
연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식당 한다고만 했었어...”
수현이 생고기도 있는 것을 보고 당황스럽게 말했다. 어쩐지 상추를 엄청 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그냥 쌈이 먹고 싶나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게 더 손이 많이 간다고 엄마는 좋대. 하던 거 올리면 되니까.”
연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응... 그럼 생고기부터 굽자...”
수현이 얼떨떨하게 말했다.
“오늘은 앉아있어. 저번엔 자기가 해줬으니까, 내가 고깃집 딸의 굽기 스킬과 된장찌개 보여줄게.”
연희가 팔을 걷었다.
“어?”
“앉아 있어요~.”
연희가 수현의 엉덩이를 두들기며 뒤로 보냈다. 수현이 어정쩡하게 뒤로 물러섰다가 침대에 앉았다. 앞치마까지 하고 본격적으로 요리에 들어가는 모습이 꽤나 그럴 듯 했다.
“고깃집 된장찌개 궁금하다... 레시피 알려줄 수 있어?”
수현이 한동안 그런 모습을 바라보다가 일어나서 다가가며 말했다.
“수현아, 나 칼 들고 있는데?”
연희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수현이 얼른 책상으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새신부치고는 능숙하게 칼을 다루는 모습이 무언가 신기했다.
“연희야, 네가 나 요리 할 때 왜 안절부절했는지 이제 좀 알았어.”
수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제 좀 이해가 돼?”
연희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응. 익숙해 보이는데 그게 이상한 느낌이야.”
수현이 말했다.
“우린 결혼해도 음식으로 싸울 일은 없을 거야.”
연희가 기분 좋게 말했다.
“왜?”
수현이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내가 지금 칼 들고 있으니까.”
연희가 동의하라는 듯 말했고, 수현이 웃었다.
“뭐야, 동의 안 해?”
연희가 돌아서서 말했다.
“완전히 동의해. 난 투정 안 하는 남자거든.”
수현이 말하자 연희가 씩 웃어주고는 돌아섰다.
밥솥에서 밥이 되어가고, 작은 뚝배기에서는 된장찌개가 맛있게 끓어갔다. 팬을 달군 연희는 고기를 올려 굽기 시작했다. 그 모습도 꽤나 그럴 듯 했다.
수현은 절로 침이 넘어갔다. 다행히 환풍기는 그럭저럭 잘 작동했다.
연희는 거의 동시에 음식들을 완성해냈다. 확실히 요리를 해본 솜씨였다.
“와... 난 뭐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거였네.”
수현이 군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니구. 먹자.”
연희가 쑥스럽다는 듯이 말하며 맥주를 들었다. 수현이 맥주를 가볍게 부딪히는 것을 시작으로 식사는 시작되었다.
둘은 서로에게 쌈을 싸주며 식탁을 비워갔다. 하나 같이 맛이 좋아서 수현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진짜, 된장찌개는 내가 먹어 본 것 중 최고야.”
수현이 말하자 연희가 뿌듯한 얼굴을 했다.
둘은 마지막 상추 하나까지 완전히 비워내고 배를 두드리며 상을 물렸다.
설거지까지 마친 그들은 산책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고 집을 나섰다. 들어왔을 때와 동일한 방식으로 나온 그들은 산의 산책길을 올랐다.
“나 여기는 처음 와 본다?”
연희는 수현의 손을 잡고 가볍게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혼자 오진 마. 오는 길이 좀 어둡더라.”
수현이 말했다.
“응. 그래서 안 와봤지. 자기랑 오니까 좋다. 오늘 날도 그렇게 안 춥고 산책하기 좋다.”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현에게 팔짱을 꼈다. 길지 않은 길이라 금방 오른 그들은 잠시 정자에 앉았다. 몇몇 운동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서울 밤하늘도 생각보단 볼만 하네.”
연희가 수현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수현은 가만히 연희의 어깨를 감쌌다.
잠시 말없이 하늘을 보던 연희가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수현이 그 음을 따라 작게 그녀를 토닥였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같이 노래방 간 적이 없네.”
연희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다음에 가자. 어제 소리 질렀더니 아직 목이 좀 아파...”
수현이 약간 민망함을 담아 말했다.
“우리 자기는 목소리도 좋은데, 노래도 잘 하겠지?”
연희가 기대 반 놀림 반으로 물었다.
“음, 고음 불가? 평범하지 뭐.”
수현이 가볍게 말했다.
“아쉽네. 지금 가보고 싶었는데.”
연희는 머리를 부비적대며 말했다.
“미안. 내일 가자. 내일은 괜찮을 것 같아.”
수현이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응. 내일 자기 상태 괜찮으면 가자. 갑자기 되게 궁금해졌어.”
연희가 말했다.
“가끔 작게는 불러줬잖아.”
수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응. 그때 좋았으니까, 기대 돼.”
연희가 가볍게 수현의 볼에 입을 맞췄다. 수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둘은 조금 더 같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슬슬 내려갈까?”
수현이 말하자 연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가는 길의 그들은 한층 더 가깝게 달라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