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화 〉26 (26/94)



〈 26화 〉26

*

하지만, 수현의 화요일은 그렇게 심심하고 단순하지 않았다.

과외를 끝내고 문을 나선 수현은 소향을 마주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는 이대로 집으로 가서 토토와 놀고, 운동을 하며 하루를 나름대로 보람차게 보낼 작정이었다. 연희의 문자를 받기 전까지는.


-수현아! 우리 방에 칫솔이랑...그 콘돔!-

대문을 나서다  내용이 그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다행히 시간은 아직 있었다. 수현이 뛰기 직전이었다.

“안녕?”

소향이 그를 향해 밝게 인사했다. 화사한 얼굴이었다. 복장은 어디 운동을 다녀오는 모양새였다.

“네. 안녕하세요. 그럼!”


수현은 얼른 인사만 하고,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소향이 황망한 표정으로 자신을 지나치는 수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존심이 구겨지는 기분을 오랜만에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무언가 오기가 생기게 만드는 타입이었다.

수현은 그러거나 말거나 초조하게 달렸다. 시간이 모자란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 몰랐다. 그는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뭘 치워야 되지...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의외의 부분에서 걸릴 수도 있었다. 그냥 청소를 한 번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현은 아예 제대로 전체 화장실 까지 청소를 해두겠다고 연희에게 문자를 보내두었다.

-응. 고마워! 사랑해!-


연희에게서 얼른 답장이 왔다. 수현이 뒷말에 길게 미소를 지었다. 너무 마음에 드는 말이다. 그는 똑같이 답장을 해주고는 머리를 뒤로 기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왜 어제는  생각을 못했나 싶었다.


*


수현은 부엌부터 꼼꼼히 정리를 시작했다. 둘이 먹은 티가 나는 듯한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물론 하루에 한 번 설거지 했다고 하면 될 듯하기도 하지만, 연희 성격상 그럴 성격이 아니었다. 깔끔했기에 수저 정리 정도만 하면 되었다.

방도 크게 청소할 것은 없었다. 간단히 이불과 베개를 한 번  털어내고, 콘돔은 아예 자신이 챙기고, 초콜릿은 혹시 몰라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화장실은 머리카락이나 면도기, 그리고 칫솔이 있었기에 가장 열심히 정리를 해야 했다. 그는 주변을 슥 돌아보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도면 완벽했다.

수현은 연희에게 완료 문자를 보내고 집을 나섰다. 어쨌든 여자 전용이기에 그는 최대한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비밀번호를 치려던 옆집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수현은 낭패어린 표정을 지었다.

“...도둑은 아닌  같고... 쫄지마요. 여기 사는 애들 중에 남자 안 데려온 애가 드무니까.”

여자는 천천히 수현을 위아래로 스캔하듯 확인하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알싸한 알코올냄새와 담배냄새가 얽혀있는 눈꼬리가 사나운 미녀는 진한 화장에 피로한 표정이었다.


“근데, 옆집 애기는 집 내려간 걸로 아는데...”

여자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 청소 좀 해주려고...”


수현이 뜨끔해서 말했다.


“좋은 남친이네... 부모님이라도 오시나?”

여자는 피식 웃더니 알만하다는 듯이 말했다. 수현이 대답하지 못하고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귀엽네요.  다. 가요.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여자는 피곤한  자신의 말만 끝내고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수현은 찝찝한 얼굴로 문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문을 나섰다. 그는 일단 말은 해둬야 할 것 같아서 연희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 옆집 언니면 괜찮아! 오늘 수고했어! 고마워!-

연희가 담백하게 괜찮다고 하자, 수현은 마음이 좀 놓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약간 진이 빠진 느낌이 들어 터덜터덜 길을 내려왔다. 운동을 빡세게  것보다도 어째 더 힘든 것 같았다.


*


수요일이 되자 수현은 오랜만에 연희를 만날 생각에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그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연희가 알바를 하고 있는 영화관 앞으로 나갔다. 그런다고 연희가 일찍 나오지는 않겠지만, 개인적인 마음의 문제였다.


“자기야!”

연희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원래 그녀도 저렇게 멀리서부터 티를 내며 오지는 않았다. 거의 일주일 만에 보는 반가움이 그녀에게도 큰  같았다. 어떤 커플들은 주말만 보는 게 좋다고 하던데, 참 커플도 커플마다 각양각색이었다.


수현이 벽에서 몸을 떼고 연희 쪽으로 다가갔다. 연희도 그를 향해 달려왔다. 연희가 그의 품에 폭 안겼다.

“오랜만이야! 완전 보고 싶었어!”


연희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오늘 아침부터 기분 좋더라.”


수현도 맑게 웃어주며 말했다. 둘의 미소가 짧게 맞닿았다.


“흠, 좋다.”


연희가 수현의 품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안정감이 느껴져?”


수현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응. 좋아. 그리고 어제 완전 잘 넘어갔어. 자기, 정리 잘했더라. 아빠도 의외로 별 말은 없으시더라. 엄마가 미리 말했었나봐. 대신 내년엔 옮기라고 하시더라.”

연희가 엄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다행이다. 어머니랑 아버지는 오늘 내려가셨고?”


수현이 연희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아니, 어제 분당에 있는 이모네로 바로 가셨어. 잘 곳이 마땅치 않잖아. 근데, 언제 챙긴 건지 명절 음식 꽉꽉 채워두고 가셨다니까. 내가  가져와도 된다고 그랬는데...”


연희가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다. 냉장고 상태가 어떨지 알만했다.

“그럼... 내가 모레 먹으러 가줄까? 상하면 아깝잖아.”

수현이 연희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연희가 그의 몸을 괜히 밀쳤다.

“왜? 싫어?”


수현이 약간 능글맞게 말했다.


“...음식 때문에 오라는 거야. 상하면 아까우니까...”

연희가 부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응. 고마워.”


수현이 가볍게 대답했다.


“치, 가져간 거  가져와. 또 사면... 아깝잖아...”


연희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어제 나 들킨  괜찮은 거 맞지? 뭐, 크게 신경 쓰는 느낌은 아니긴 했는데...”


수현이 생각난 김에 물었다.


“응. 괜찮아. 현아 언니, 생각보다 되게 친절해.”

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고. 처음 마주치고, 나 사실 좀 쫄았거든...”


수현이 이실직고하자 연희가 웃어댔다.


“언니가 좀 날카롭게 생기긴 했지.”

연희가 동의하며 말했다.


“응. 거기다  거기 있으면 안 되긴 했으니까...”


수현이 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리고 뒷말을 삼켰다. 아무래도 대학생은 아닌 것 같았다. 굳이 말하자면 술과 관련된 계통의 직업을 가진 여자로 보였다.


“응. 근데 보기보다 좋은 언니야. 나 처음 이사 왔을 때도, 이것저것 주변도 알려주고... 여튼, 잘 끝났어! 끝!”


연희도 더 말하기 애매했는지 말을 마쳤다. 수현도 그럼 됐지 뭐 하며 웃어보였다.

둘은 간단한 저녁을 먹고, 맥주 한잔을 했다. 이야기는 대부분 명절 때의 일이었다. 사실, 대부분은 이미 통화를 하며 아는 이야기였지만, 또 듣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둘은 처음 듣고 말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했고, 친절하게 받아주었다.

“음, 보내기 싫다.”

연희가 그를 안고 말했다.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수현이 피식 웃어버리며 말했다. 연희도 약간 부끄러운 웃음을 흘렸다.


“뭐, 모레 오니까...”

연희가 수현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내일은 미안. 지방 내려가는 애들이 내일 갑자기 모이자고 해서...”

수현이 아쉬움을 담아 말했다.


“아냐. 오래 못 볼 텐데. 봐둬야지. 금요일 남겨둔 게 어디야?”


연희가 수현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둘은 가벼운 미소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스르르 눈을 감고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맞춤이 천천히 이어졌다.

“흐음-.”


연희가 만족스러운 콧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마무리는 가벼운 버드키스였다.

“들어가. 나도 가볼게.”


수현이 연희의 머리를 괜히 넘겨주며 말했다.


“응... 조심히 가. 도착하면 연락하고.”


“응. 춥다. 들어가.”


둘은 다시 한 번 서로를 껴안고 떨어졌다.


수현은 연희를 굳이 대문 안으로 들여보낸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좋을 때네.”

연희가 대문으로 밀려들어오고, 부끄러운 미소로 대문틈을 보고 있을 때였다.

“엄마야!”


연희가 깜짝 놀라 작게 튀어 올랐다. 현아가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들고 작게 손을 흔들었다.


“아...언니...안녕하세요.”

연희가 애매하게 인사를 했다.

“응. 늦게 다니네.”


현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놀다 보니까...”


연희가 어색하게 말했다. 뭐라고 더 말해야 할지 말이 궁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출근  하셨어요? 그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생리 터져서 못 나갔어.”


현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연희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궁금한 얼굴이길래. 들어가 봐. 난 담배나 한  피고 들어가려니까.”


현아가 귀엽다는 듯이 웃고는 고갯짓을 했다.

“아...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연희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계단을 올랐다. 뭔가 어려운 언니였다. 여러모로.

현아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도 저런 때가 있던가...”


그녀가 중얼거렸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첫 남자가 누구였는지도. 마지막 남자가 누구였는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다.


“후-. 괜히 쓰네.”

그녀의 담배가 빠르게 타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