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Ep11. 사이공 철수 작전 (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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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도망쳤다.
은서가 메콩강(정확히 구분하면 사이공 강)에서 장갑차를 놓고 훈이 오빠와 씨름을 하던 4월 21일의 일이었다. 남베트남의 대통령 응우옌반티에우는 국민을 버리고 도망쳤다.
탄손누트 국제공항이었다. 미군 수송기 한대가 화물칸을 활짝 열어놓으니 검정 양복의 경호원들이 부랴부랴 짐을 옮기고 있었다. 성인남자 한 명이 낑낑대며 끌어야 겨우 옮겨지는 무거운 짐가방엔 수상한 물건이 들어있었고, 하얀 천막으로 가려진 커다란 판때기는 성인남자 둘이서 하얀 면장갑까지 끼고 조심스레 비행기로 실어나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저 분은 대체 뭘 저리 많이 갖고 가시는거지?>
가방에서 작은 보석 하나가 떨어졌다. 짤랑짤랑이는 가방 속에 들은 것들은 다 무엇이었을까? 애국자를 향해 쏟아지는 의심의 눈초리에 그는 이렇게 외쳤다.
"이게 다 미국 때문이야! 미국이 날 배신한거라고! 놈들은 내 등을 찔렀어!"
고위 관료 한명이 달려와 티우 대통령에게 소근소근 했지만 그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냉소적으로 답했다.
"그 계집애가 와봐야 뭘 할 수 있겠어? 자기 국민들 데리러 온거겠지. 알아서 하라 그래!"
그 계집애는 대한제국 황태녀 이은서를 두고 한 말이었다. 은서가 티우 대통령과의 회담을 고대하던 사이 당사자는 비행기를 타고 도망칠 궁리를 했던 것이다.
나라가 망하면 애국자가 먼저 도망을 친다.
티우 대통령을 따라 수 많은 고위공직자들이 부랴부랴 짐가방을 싸고 있었고 하나 둘씩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도망쳤다. 반공의 깃발을 높이 들며 애국을 강조하던 이들의 초라한 뒷모습은 결국 이랬다.
***
그 시각 이은서는 사이공에 위치한 대한제국의 대사관에 도착했다.
전투복을 차려입은 5성장군의 여장부는 사이공 철수작전의 총사령관으로 실질적인 권력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세가지로 요약된다.
군사, 정치, 외교.
첫째는 군사다. 이은서 장군은 사이공 철수 작전에 투입된 대한제국의 지상군과 해군 장병 일체를 지휘할 수 있는 지휘권이 있다. (공군은 본국에서 직접 지휘하므로 제외)
둘째는 정치다. 이은서 장군은 현지 교민들의 철수 작전을 책임지는 총사령관으로 작전에 관한 모든 정치적 결정권을 갖는다.
셋째는 외교다. 은서는 대한제국의 황태녀로 국빈자격을 가졌으며, 제국을 대표해 외교 협상을 할 수 있는 대표권을 가지고 있다.
대한제국 황태녀, 서북방위사령관, 사이공철수작전 사령관, 5성장군 이은서 원수는 실미도 요원들의 특수 경호를 받으며 대사관 직원들의 충성을 받아내니 절도있는 경례자세가 그들 역시 과거엔 군인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전하!"
주베트남 대한제국 대사 김영진이 대표로 황태녀를 반갑게 맞았다.
"이은서입니다. 잘부탁드립니다."
"모든 직원들이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해군참모총장 출신이던 중년의 대사는 아부실력도 남달랐다. 절도있는 예비역 군인은 무언가 필사적인 이유라도 있는듯 감격적인 찬양을 올렸다.
"전하께서 직접 행차하시어 진두지휘하는 철수작전은 이 나라 대한제국의 역사에 길이길이 기억될 것입니다! 민족을 대표하는 고귀한 혈통으로 모범을 보이시는 오늘의 역사는 황실의 권위에도 분명···."
평양의 장군님들 이상으로 쏟아지는 아부에 부담을 느낀 은서는 손사래를 쳤다.
"어, 어우··· 그렇게까지 안하셔도 돼요!"
“저희들에겐 생존이 달린 일입니다. 부디 전하께서 꼭···.”
"그만 그만 그만! 제가 제일 먼저 여기에 왔고 제일 마지막으로 갈거니까 안심하시구요. 단 한명의 국민도 포기하지 않을거니까 굳이 말 안해주셔도···."
그러자 대사님 먹먹한 심정으로 말했다.
"월남의 대통령이 도망을 갔습니다."
"예?"
"한 나라의 국가 원수가 국민을 버리고 도망을 쳤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선···."
그는 털썩 무릎을 꿇으며 흐느끼듯 말했다.
"직접 전쟁터까지 달려와 저희들을 구하러 와주지 않으셨습니까?"
"대사님···."
"직접 자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온 국민이 이 순간의 전하를 영웅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니 제 말을 아부로 듣지 말아주십시오."
그는 미소지어 말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하는 칭찬이니까요."
한명만 죽어도 단절을 맞이하는 위태로운 황실이 유일한 후계자를 전쟁터로 보냈다. 까딱 잘못해서 죽기라도 하면 국가 전체가 난리가 날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에 온 이유는 사이공의 국민들이 보기에 분명해보였다.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
황실의 존망을 걸고 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으로 바뀔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황태녀는 국민을 구하겠다며 달려왔고 황제 역시 그걸 흔쾌히 승인했다. 심지어 13척. 대사관 직원들은 이 사실에 고무적인 반응을 보였다.
<조국이 우릴 구하러 왔어!>
<국군은 국민을 지킨다더니! 역시!>
이런 이유로 대한제국의 대사관 직원들은 은서의 지휘권을 기쁘게 인정했고, 그들의 발걸음이 대사관의 대회의실로 향하니 국민들을 철수시키기 위한 작전 회의가 시작됐다.
가장 앞자리의 상석에 앉은 은서는 김영진 대사에게 못들었던 정보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본국에서 날아온 전문을 봤어요. 쑤안록에서 레민다오 장군이 분전을 하고 있다 들었는데요. 근데 대통령이 도망을 치다니... 대체 뭔 일이 있던거죠?"
"쑤안록은 애국자들의 영웅적인 최후였습니다. 6천의 결사대가 4만대군을 막아냈죠. 기적적인 승리에 공군까지 분전하고, 주위에 흩어진 병력들도 한데 모여 지원해주고. 이제서야 남베트남군이 반격을 시작하나 했는데···."
"4만 명 뒤에··· 더 많은 적군이 있었던거군요···."
"예, 사이공으로 몰려오는 북베트남군만 십수만이랍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격차였을겁니다···."
은서는 먹먹한 마음으로 물었다.
"레민다오 장군은 어떻게 되셨나요?"
"생사가 파악되지 않고 있는 모양입니다."
"......"
"쑤안록이 뚫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티우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했습니다. 모든 책임이 미국에게 있다며 자신은 억울하다는 양 떠들어대는데··· 들리는 소문으론 2t에 달하는 금괴와 미술품을 들고 간다고도···."
참담한 심정으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그게 제가 지키고자 싸웠던 월남의 최후인 거네요···."
"전하···."
황태녀의 무거운 침묵속에 이대현 공사가 입을 열었다.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던 육군 준장 출신의 외교관이었다.
"월남은 지지 않을겁니다."
"예?"
놀라 쳐다보는 황태녀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이대현 공사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한다.
"사이공엔 아직 많은 군대가 남아있습니다. 그들을 지휘하는 장군들 역시 레민다오 장군처럼 조국을 위해 분투하는 애국자들이죠."
"하지만 수적인 우위를 이길수는···."
"미국이 지원하면 됩니다. 미국에서 폭격기 한 대만 띄워줘도 월남은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전하."
그러자 김영진 대사가 힘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대현 공사. 거 헛된 희망은 이제 그만 버리지 그래?"
"대사님!"
"자네 제국익문사 소속이잖아?"
그러자 은서가 놀라 물었다.
"이대현 공사님이 제국익문사 소속이라구요? 외교부 소속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전하. 이 공사는 신분은 외교관이지만 제국익문사에서 보낸 뭐랄까··· 백색 요원 같은 것이지요."
"백색요원?"
"외교관 신분을 달고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요원들을 말합니다. 사실 저도 그렇고 외교관이란 직업 자체가 그렇긴 한데··· 이 공사는 특별히 제국익문사가 직접 보냈던 요원인지라···."
"스파이가 외교관 신분을 달고 공개적으로 정보 수집을?"
"외교관으로 활동해도 들을 수 있는 정보가 많거든요. 정계 인사들과 만나고 다른 나라 외교관 만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다보면 뭐··· 남들은 들을 수 없는 정보도 알게 되고 그런 겁니다. 합법적인 영역 안에서 우방국끼리 허락되는 유일한 스파이 행위랄까요?"
그리곤 이대현 공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저한테 월남 패망에 대한 정보를 넘겨준 것도 이 친구였습니다. 제국익문사가 말하길 북베트남군이 4월 30일에 맞춰서 탱크를 몰고올거라 그러는데 대통령궁 정문을 돌파할거란 소리까지 했더랍니다."
“날짜부터 장소, 방법까지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알아낸거죠?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것도 이상한데요?”
“그래서 이 공사가 반신반의중입니다. 제국익문사 정보라 하니 믿긴 하겠지만서도···.”
하지만 이대현 공사는 부정하듯 외쳤다.
"그럴리가 없습니다!"
"이 공사, 이제 그만 현실을 인정하게."
"본국이 보내온 정보가 사실이라면 미국은 월남을 배신한 겁니다! 조선과 미국, 월남의 삼국동맹은 10년이 넘은 우정이 아닙니까? 함께 싸운 혈맹인데 그들이 월남을 도와주지 않을리가 없어요!"
하지만 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대현 공사님은 군인 출신이셨죠?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준장까지 역임하시고 지금은···.”
"예, 군인이었습니다."
"그럼 월남이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아시잖아요. 폭격기 한 대 띄운다고 어떻게 전쟁을 이겨요? 십만 대군이라는데···."
"월맹 놈들이 두려워하는 건 미국입니다. 미국이 월남을 버리지 않았다. 그 메시지 하나만 보여줘도 놈은 주춤대겠지요. 왜? 그들 역시 베트남전에서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었으니까. 미국의 힘을 봤으니까! 그게 두려울테니까!"
"하지만···."
"붕타우 앞바다에 미국 7함대가 있습니다. 그들이 조금만 월맹을 위협해줘도 월남은 무너지지 않을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대현 공사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저도 압니다. 제국익문사로부터 받은 정보를 밤새 읽고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전 외교관이기도 합니다. 이곳 베트남에서 보았던 미국인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는 강조하여 말했다.
"미국 대사가 제게 말했습니다. 협상의 가능성은 남아있다. 워싱턴이 결심만 해주면 월남은 6개월 이상 버틸 수 있다. 제게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은서는 미국 대사보다도 제국익문사의 보고서를 신뢰했다. 비서실장님의 유능한 후배들은 틀림이 없으니까. 그들은 분명 미국이 월남을 포기할거랬다.
"미국 대사. 가브리엘 마틴이라고 했죠?"
"예. 이곳에서 월남의 정계까지 주무르는 최고의 실세. 월남땅에 황제처럼 군림하고 있는 미국인들의 대표입니다. 그의 낙관론엔 근거가 있지 않겠습니까?"
"미국 대사가 틀렸다면요?"
"틀리다니요?"
"미국이 월남을 도와줄거다. 그게 가브리엘 마틴 혼자만의 착각이라면 어떻게 하실래요? 그 작자의 지나친 낙관론이 철수 작전에 악영향을 줄거에요. 사이공의 시민들은 커녕 현지에 남아있는 미국인조차 철수를 못하는 최악의 참사가 빚어질 수도 있겠죠."
"그럴리가···."
"워싱턴 정계는 베트남전쟁은 끝났다. 더 이상 도움은 없다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어요. 포드 대통령이 요청한 예산안도 부결됐죠. 그들은 버린거에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세계의 경찰을 자부하는 미국이 동맹을 헌신짝처럼 버린다는게···."
"월남은 더 이상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아요."
"......"
"공사님 마음 알아요. 저도 같은 심정이거든요. 10년 넘은 친구가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마음이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그래도 결국 죽는거잖아요."
은서는 주먹을 부르르 떨며 꿋꿋이 말했다.
"보내줘야죠. 이젠."
"......"
은서는 상석을 박차고 일어났다. 결연한 각오로 눈뜬 황태녀는 여장부의 마음가짐으로 결연하게 물었다.
"전 월남을 도와주러 온 게 아니에요. 파리에서 맺은 평화조약까지 어기고 무장병력을 데려온 것도 딱 하나. 국민들의 안전한 호위를 위해서죠. 우린 전세를 바꿀 생각도 그럴 능력도 없어요."
"전하···."
"김영진 대사님. 이곳의 전문가는 당신이에요. 사이공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남베트남의 대사. 그 전문가적 식견으로 제게 조언해주세요. 제가 지금 뭘 하면 될까요?"
황태녀의 각오를 담은 5성 장군의 질문에 그 외교관은 굳센 마음으로 답한다. 그의 머리 속엔 오랫동안 고민해온 문제가 있었고 이 순간 힘을 빌리고 싶었다. 바로 그 힘이 눈앞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월남 패망의 확신을 가슴에 품고 조언을 올렸다.
"이곳 사이공에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발이 묶인 국민들이 많이 있습니다."
"불법 체류자? 우리 국민이?"
"여행이나 사업차 왔다가 비자가 만료돼 불법체류자가 되버린 경우도 있고, 탈세나 비리, 밀수 등의 행위를 저질렀다가 체포된 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우리 국민이니 우리가 책임져야겠죠."
"예. 저희가 책임져야죠. 우리 국민이고 월남은 망할거니까."
"월남의 패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가 이대현 공사 말고도 더 있습니다."
"누군가요? 그 사람."
"월남 사람들입니다."
"......"
당연했다. 베트남 공화국은 남베트남 사람들에게 조국이다. 조국의 패망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없을리 없다. 고위 공직자가 도망치고 애국자들이 죽어나가도 한 나라가 망한다는건 너무 거대한 파도였기에 마치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말처럼 허황되게 넘겨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저희들이야 제국익문사의 보고서를 알고 있으니 월남 패망을 확신하는거지, 여기 사는 평범한 공무원이나 시민들은 여전히 반신반의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진 그래도 '미국이 도와주겠지' 하는 기대를 품으며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보고서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인거군요."
“예, 그 차이가 너무도 큽니다. 이 나라가 그래도 주권국가인데 '우리는 아직 망하지 않았다. 조선 사람도 우리 법을 따라라' 현지 공무원들이 그렇게 말해버리면 대사인 저도 할 말이 없더랍니다."
"당장 패망이 눈앞에 있는데도···."
"그만큼 미국의 존재가 큰 것도 사실입니다. 두 나라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나라니까요."
"그럼 제가 나서야겠네요. 조국으로부터 부여받은 외교권을 써보죠."
권력을 써보기로 했다. 대사관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외교관이 되어보자.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얼굴로 협상을 벌이고 국민들을 구출할 수 있는 기회. 비자가 없는 자들에게 비자를 부여해주고, 감옥에 같힌 자들을 석방시켜 조국의 품으로 데려올 수 있는 힘은 오로지 외교로만 가능할 것이다.
'군인에 이어 외교관까지 해보네. 이러다 정치인까지 하겠어···.'
거부하기엔 너무 완벽한 힘이었다. 그 힘은 아버지가 후계 구도를 확고히 하겠다며 만들어놓은 영향력이었다.
황위계승서열 1위이자 유일인 황태녀. 39만 서북방위사령부를 직접 지휘하는 5성 장군. 거기에 통역이 필요 없는 외국어 실력의 소유자. 적재적소를 만난 강력한 힘이 은서를 유혹하고 있었다.
지금은 힘이 있다면 써야할 때였다. 은서는 그렇게 마음 먹고 행동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