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 Ep11. 사이공 철수 작전 (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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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마틴.
1912년생. 한국 나이로 64세. 주베트남미국대사. 은서가 그 남자를 찾아간 건 소심한 복수가 섞인 경멸어린 무시 때문이었다.
"대통령마저 도망친 월남 정부를 찾아가라고? 난 놈들 못 믿어."
그렇게 말하는 은서의 눈앞엔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이 있었다. 작은 창문들이 빼곡하게 배치된 순백의 건물은 아직까지 평온해보였고 휘날리는 성조기(미국 국기)도 위풍당당해 보였다. 바로 이 깃발이 월남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있었다.
<저 깃발이 휘날리는 이상 우린 안전할거야!>
<우린 미국이 지켜주잖아!>
하지만 티우 대통령이 믿지 않았듯 은서도 믿지 않았다. 휘날리는 성조기는 조만간 내려갈 것이고 미국은 월남을 버릴 것이다. 버려진 월남은 반드시 패망할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왔다. 그들이 떠나기 전에 담판을 벌이러.
하지만 은서의 비서관인 진희 언니는 말했다.
"불법체류자 문제라면 월남 외교부를 가시죠. 외교부장관만 접견해도 해결될 문제를 굳이···."
"여기에 살고 있는 이 남자가 월남 최고 실세라잖아. 한번 와서 깔끔히 해결될 문제를 왜 굳이 월남 외교부 갔다가 미국 대사관 갔다가 두 번 하겠어?"
"미국 대사를 설득해서 외교부를 움직이겠다는 건데 이건 외교적인 결례가 될 수도 있어요."
김영진 대사도 동의하여 말했다.
"그들이 매우 불편해할겁니다."
하지만 은서 옆에 각목처럼 서서 아무말도 안하던 존재감없는 김진혁씨는 다른 말을 했다. 은서의 사랑스러운 예비 서방님이었다.
"전하께서 국빈 자격으로 방문하셨는데 누구도 마중나오지 않았습니다. 외교적인 결례를 저지른건 월남 애들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전하께서 오신 이유는 따로 있으실겁니다. 불법체류자 문제 때문만은 아니신듯 합니다만···."
그러자 은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역시, 마누라 마음 알아주는건 서방님 밖에 없다니까?"
그러자 김영진 대사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서, 서방님···?!"
"아~ 모르셨구나? 아직 보도 안 나갔나봐?"
그러자 진희 언니가 답했다.
"공식 발표는 철수작전 끝나면 나오기로 되어 있어서요. 대사님께서도 모르셨을거에요."
"이보시오 비서관! 그럼 여기 이 녀석··· 아니, 이분이 바로 대한제국의 부군··· 아니 부마? 국서? 생각해보니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없었군! 황태녀 전하의 남편 되시는 분을 뭐라 불러드려야 되겠습니까?"
대사의 질문에 덕수궁 제2부속비서관 박진희는 전문가적 견해를 담아 말했다.
"조선시대 때 공주의 남편을 부마라 불렀어요. 부마도위(駙馬都尉)의 줄임말인데 중국의 전한 무제 시절에 황제가 여동생을 부마도위와 혼인시킨 게 시초였죠."
"부마도위?"
"황제의 수레를 끌고갈 말을 돌보는 직책이에요. 사소하지만 경호상 엄청나게 중요한 자리죠. 배신이라도 했다간 길 가다 어떻게 죽을지 모를판이니까. 요즘 시대로 비유하자면 리무진 선탑자랑 비슷할거거든요."
"아하···."
"그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겨야 하는데 눈에 들어온 게 황제의 사위들이래요. 그래서 부마 자리를 맡기는 관습이 생겼고 그게 대명사처럼 굳어져서 조선까지 퍼진거죠. 공주의 남편을 칭하는 말로."
"하지만 전하께선 더 이상 공주가 아니십니다. 여제로 즉위하실 몸이 아니십니까? 그럼 부마보다 한 단계 더 높은 호칭이···."
"동양 역사를 통틀어서 황태녀란 직위 자체가 없었어요. 그러니 황태녀의 남편을 칭하는 단어도 존재할리 없겠죠. 그러고보니 영어 번역도 어떻게 할지 고민이네··· Prince Consort 라고 해야하나?"
그러자 은서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무튼! 미국은 월남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어요. 미국도 피난작전을 시작한건 마찬가지구요. 항모전단까지 보낸 친구들인데 우리 국민들 무사히 피난 시킬 수 있다면 보험 하나라도 더 들어야하지 않겠어요?"
"보험이라···."
"배 떠났는데 피난 가지 못한 국민이 남아있다던가, 사람이 너무 많아 태울 자리가 없다던가 그럴 때 손벌릴 수 있는 친구는 미국밖에 없잖아요."
"과연 그렇군요. 보험이라···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하."
그런데 정작 그 미국 대사가 현실 파악을 못하고 있단다. 아직도 월남 패망을 믿지 않는 월남의 실세. 이 남자를 설득해야 한다고 은서는 굳게 믿고 있었다.
보험도 들겸 월남 정부에 압력도 행사할겸. 은서는 대한제국 황태녀 자격으로 미국 대사관에 입성했다. 은서를 알아본 미국 군인들이 경례를 올리고, 대사관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향한 곳은 가브리엘 마틴 미국 대사의 접견실.
황태녀 이은서와 미국 대사 마틴 그리고 김영진 대사까지 자리하는 외교석상의 달달한 커피한잔이 시작되었다.
"황태녀 전하를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대사님!"
유창한 영어가 오가는 외교의 현장. 악수가 오가는 접견실에서 은서는 마틴대사 앞의 소파에 앉아 공손히 말을 시작했다. 어쩐지 옆자리에 있는 김영진 대사가 들러리가 되버린 기분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 은서는 여유로운 표정을 '연기'하며 마틴 대사를 떠보듯 말했다.
"전황이 시시각각 악화되고 있다고 들었어요."
"상황이 어렵기는 하지요. 하지만 괜찮을겁니다. 대사관은 치외법권지대라 함부로 못건들테니."
미국 대사관은 치외법권지대다. 대사관에서 벌어지는 모든 법적 문제는 미국법에 따라 처리되며 사실상 미국 영토처럼 간주된다. 대한제국 대사관도 국제법상 마찬가지 논리로 돌아가지만 둘 간엔 엄청난 차이가 하나 있었다.
미국이라는 차이다.
"설마 제 아무리 공산당 놈들이라 해도 우리 미국을 건들기야 하겠습니까?"
"그래도 사이공의 상황이 시시각각 악화되고 있는걸요? 이거 영 무서워서~"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린 세계 최강입니다. 놈들도 여기 만큼은 쉽게 못 건드릴 겁니다."
미국 대사의 느긋함 속에 오만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은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남자가 오만함을 가지게 된 이유. 결국 모든 믿음의 근원이 '미국'이라는 존재에서 나오니까.
미국이란 존재는 그랬다.
1차대전과 2차대전을 모두 이기며 세계 최강으로 우뚝 선 이 나라는 오늘날 수만 발의 핵미사일을 겨누며 소련과 지구를 양분하고 있다.
베트남에 눌러앉고 있는 자신은 바로 그 미국을 대표하는 외교관. 그런 그에게 이곳 대사관은 자신의 성처럼 느껴졌을 게 분명하다. 미국의 국력이 지켜주는 사이공 순백의 성. 공산당 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과 오만 속에서 대사는 느긋한 표정으로 커피를 즐기며 말했다.
"대한제국 국민들이 위기에 처하면 이곳으로 오라 하십시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충성스런 동맹국이니까."
'충성'이라는 말에 옆에 앉은 김영진 대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은서는 이런 모욕적 언사에도 호호호 웃으며 비위를 맞춰줬다. 단지 이렇게 커피를 마시며 맞장구 쳐주는 것 만으로도 달달한 과실이 떨어졌으니까.
"역시 대사님~ 미국 덕분에 안심이에요! 호호"
망해가는 사이공에서 국격같은건 둘째 문제. 피난을 위한 보험 하나가 생겼다. 유사시 대한제국 국민을 미국 대사관에 보낸다. 그럼 미국이 알아서 지켜주며 미국이 피난시켜줄테다.
'충직한' 동맹국의 사람들이니까.
미소짓는 가면 속에 본심을 숨긴 은서는 다음 단계를 고민하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거 좀 더 맞춰줘볼까? 이 남자의 오만함은 쓸데가 있겠어.'
은서는 기쁜 표정을 연기하며 대사에게 말했다.
"대사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근데 실은··· 걱정거리가 하나 더 있는데요···."
"도움이 필요하신게 더 있습니까?"
"미국은 지금 철수 작전이 진행중이죠? 탄손누트 국제 공항으로."
"그렇지요."
"대한제국도 철수작전이 진행중인데 문제가 하나 생겼거든요···."
은서는 옆자리에 앉은 김영진 대사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대사가 품에 있는 서류 하나를 마틴 대사에게 내민다.
"이건···."
“사이공에 억류되어 있는 국민들이 있다지 뭐에요? 이들 말고도 비자가 만료되어 불법체류자 신세가 된 사람도 있다는데··· 월남이 통 빡빡하게 나올 듯 해서···.”
"그것 참 안됐군요."
"대사님께선 월남 정부에 영향력을 갖고 계시지요? 이왕 도와주시는 김에 월남쪽에 힘을 써주셨으면 하는데. 어떻게 안될까요?”
그러자 대사의 표정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외교 석상에 처음 나오신 분이 이런 간계부터 배우시면 안될텐데···.”
은서의 표정도 굳어버렸다. 전략을 바꿔야겠다는 순간적인 판단이 들었다.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지한 마음으로 냉정하게 판단하는 은서의 본심이 튀어나왔다.
“대통령이 도망갔어요.”
은서는 마틴 대사를 노려보며 유창한 영어실력을 더욱 끌어내 담대하게 말했다.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도망가고 그 밑으로 고위공직자들이 줄줄이 짐가방을 싸들고 있죠."
"그건 잠깐으로 그칠겁니다."
“돈 많은 졸부들은 다르게 생각할거에요. 잃을게 많으니까. 시시각각 다가오는 공산당의 위협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겠죠. 제가 그들을 찾아가 우리 국민 좀 풀어달라고 협상을 걸면 어떤 조건이 돌아올까요?”
"조건?"
"자기들도 피난시켜달라는 조건을 걸겠죠. 금괴부터 보석까지 바리바리 챙겨든 월남의 VIP들이 대한제국 수송선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는 모습. 전 그런 꼴 추호도 보고 싶지 않아서요."
하지만 마틴 대사는 거부하듯 말했다.
"그건 지나친 걱정입니다. 월남의 불안은 잠깐으로 그칠테니까요."
"어째서 그리 보시죠?"
"미국은 세계의 경찰입니다. 자유진영을 대표하는 세계 최강대국으로 국제질서의 수호에 앞장을 서고 있지요. 남베트남은 우리의 동맹이고 그들이 위기에 처했으니 동맹으로서 도와주는 게 순리일 겁니다."
"예. 돕는게 맞죠. 하지만 미국의 국익에 상충되고 있는데요?"
"우리의 국익에 상충이 된다?"
"미국이 그동안 월남 정부 지켜주겠다며 쏟아부은 돈이 얼마일까요? 돈을 따지기 전에 사람부터 따져보죠. 9년간의 베트남 전쟁으로 죽은 미국 장병만 58,209명. 전비는 1,110억 달러가 들어갔어요. 전비 말고 경제 지원금은요? 밑빠진 물통에 물붓듯이 쏟아부어도 차오르지 않는 남베트남 국력.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나요?"
"그건···."
“오만함을 집어 던지고 냉정하게 바라보시죠. 사이공은 지금 포위되고 있어요. 언제 함락될지 모르는 불안한 도시죠. 이 지경이 되도록 도와주지 않은 워싱턴 정가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가브리엘 마틴 대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답했다.
"미국은 남베트남을 도와줄겁니다. 분명히."
“진작 도왔어야죠. 하지만 그것조차 어려웠을거에요. 도와준다는 건 베트남 전쟁을 다시 시작한다는 뜻이니까. 5만 8천명의 미국 장병이 죽었던 그 싸움을 다시 해야하는데 워싱턴이 그걸 받아들일까요?”
"......"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죠? 당장 다음 선거를 걱정해야 할 선출직 공무원들이 5만 8천명의 미국인들을 또 다시 사지로 보냈다간 다음 선거에서 필패할 거에요.”
은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소적으로 말했다.
“저도 아는 미국 정치판을 대사님이 모르신다는 건 실망스럽네요. New York Times부터 다시 보셔야겠어요.”
"재미있는 분이군요."
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대한제국 국민들이 비자 심사 없이 바로 통과되도록 제가 힘을 써드리죠. 구금된 사람들도 즉각 석방되도록 압력을 행사해보겠습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굳건한 믿음을 버리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월남이 망할 일은 없을겁니다. 이건 오만도 무능도 아닙니다."
“무슨 근거로 확신하시죠?”
"우린 핵무기를 보유한 세계 최고의 강대국입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엄청난 힘이 실려서 상대국가를 압박할 수 있죠."
"그건 소련도 마찬가지일텐데요?"
“배짱있는 놈이 이기는 싸움입니다.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맞서는 동안 7함대로 무력시위를 해야죠. 그와 동시에 유엔을 통해 북베트남에게 휴전조약 준수를 강요할 겁니다. 우린 그럴만한 힘이 있으니까요.”
“워싱턴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거에요. 이미 누차례 발표했을텐데요?”
“이런걸 Big Picture 라고 합니다.”
“큰 그림?”
"명심하세요. 휴전조약을 파기한 건 북베트남입니다. 평화를 위한 약속을 저버리고 베트남을 또다시 전화로 몰아넣었죠.”
그는 속삭이듯 은서에게 말했다.
“국제법상 정당한 명분으로 빨갱이들을 짓밟아버릴 최고의 명분이 생긴겁니다. 놈들은 침략자가 됐고 우리는 공격받는 불쌍한 처지가 됐는데. 딱 좋은 그림 아닙니까?”
“그야···.”
“다시 강조하지만 휴전조약을 파기한건 북베트남입니다. 이건 명백한 불법이고 침략행위입니다. 이렇게 유도한 게 워싱턴 정계의 큰 그림이라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모든게 달리 보이지 않습니까?”
은서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그럴리 없다고.
“당신은 지금··· 미국이 북베트남의 남침을 유도했다. 그런 소리를 하는건가요? 말도안돼···.”
“대한제국이 그렇게 통일했을텐데요? 북한의 남침을 기다렸다가 준비된 병력으로 북진통일. 워싱턴 정가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대한제국 황제. 당신의 아버님이 꾸미신 큰그림이었거든요.”
“소설도 정도껏 쓰셔야지···.”
"역사에 필연이란 없습니다. 우린 한국전쟁에서 이겼고 이젠 베트남전쟁도 이길거니까요. 승자는 우리가 될겁니다. 그러니 너무 겁먹지 마시고 기다려보세요."
그 남자의 오만한 미소에 은서는 식은땀을 흘렸다. 불가능한 망상 속에서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다고. 은서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하지만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사이공에 십만 대군이 몰려오는 판국에도 사람들이 월남의 패망을 믿지 않은 이유. 모든 이들의 판단을 흐리게 한 중대한 변수는 미국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대한제국도 북진통일로 끝났잖아! 남베트남도 그리되지 말라는 법이 있어?>
<미국이 도와줄거야! 이겨봤잖아!>
한국전쟁의 승리라는 기억이 사람들의 머리 속에 남아 있었다. 중국조차 한수 접고 물러나게 만든 미국이라면 베트남 또한 그리 만들 수 있을거라고 모두는 그렇게 간절하고 필사적이며 꿈꾸듯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은서는 고개를 저었다.
눈으로 보았고 몸으로 겪었던 전쟁의 악몽이 새겨진 마음속의 트라우마가 뚜렷이 말해주고 있었다.
‘미국이 전쟁을 다시할리 없어. 그건 국민들이 동의해주지 않을거야···.'
어두운 정글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던 군인들의 모습. 포탄을 맞아 사지가 ‘사라져버린’ 형체 없는 시신. 자신이 죽여온 무수히 많은 적군. 전장에서 죽어간 11명의 전우까지.
‘전쟁은 지옥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