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Ep10. 국가가 무너지는 날 (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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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5일. 며칠 째 뉴스가 이상했다.
서북방위사령관의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5성장군 이은서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상해···."
그러자 진희가 식은땀을 흘리며 물었다.
"뭐가요?"
"앵커가 며칠째 다른 사람으로 나온단 말이야."
"앵커요?"
"내가 매일 저녁에 뉴스를 챙겨보거든? 11월 1일부터 지금까지 계속 아침뉴스 진행하던 앵커가 대신 나오고 있단 말이지. 뭔가 이상한데···."
"사정이 있었나보죠. 예컨대 어디가 아프다던가?"
"솔직히 말해. 언니. 나한테 뭐 숨기고 있는거 있지?"
은서의 물음에 진희가 딴청을 피우듯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숨기긴요. 매일 같이 전하 옆에 붙어있는데요?"
"수상한데···."
그러자 이번엔 옆에 서있던 김훈 중령을 쳐다보며 물었다.
"오빠는 알고 있지?"
"뭘?"
"다들 뭔가 나한테 숨기는 분위기거든? 오빠는 솔직히 말할 수 있잖아. 그치?"
"난 몰라. 부대 훈련시키느라 바빠서 말이지."
"경비대 훈련하는게 뭐 얼마나 바쁘다고?"
"평범한 경비대가 아니라 네 호위병이야. 서북방위사령관의 직속 친위대. 항상 최고의 전력을 유지해야 하지 않겠냐?"
"흠···."
그렇게 매일같이 이상한 나날이 계속되었지만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부사령관 전장군도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지으며 모르는 척을 하고, 지나가던 병사를 붙잡고 물어도 모른다 그랬다. 진혁이는···.
"넌 찬밥먹어!"
"예···."
미워죽겠다. 고자새끼. 10월 말 이후에도 계속 차여서 139회차 도끼질도 실패했다. 무슨 놈의 나무가 140번을 찍어도 안 넘어가게 생겼으니 깝깝할 노릇이다.
'그냥 얘 버리고 다른 남자 만나볼까?'
그렇게 생각하자니 이 녀석이 늘어놓는 변명들을 보면 또 미련이 생기고 마는게 두 사람의 관계였다. 진혁이에게 차이는 이유는 간단하게 말해서 황태녀와 평민 사이에 생기는 부담감이 원인이었으니까.
<전 성격이 소심해서요. 도저히 전하를 행복하게 해드릴 방법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노력해보곤 있는데···.>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데 행복하게 해줄 방법을 모르겠으니 기달려달라는게 골자다. 이런···.
결국 은서는 매일 같이 하루 일과가 끝나면 관사로 돌아와 술을 퍼마시는 게 일상처럼 되어버렸다. 불빛이 아른거리는 저녁 날의 관사. 장군의 집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은서는 소주병을 까놓고 외로이 중얼거렸다.
"최형욱 중장 재판 결과가 나올 때가 됐는데··· 어떻게 된건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최형욱의 재판이 진행중인걸 은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를 모른다. 텔레비전 뉴스에선 노골적으로 해당 소식을 빼먹고 있었고, 신문지 1면은 동물의 왕국 같은 이상한 소식만 실어놨다.
"원래 그 자리 최형욱 중장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을 거 같은데··· 중정이 검열이라도 하는걸까?"
뭔가... 타자기 같은 자판만 따닥따닥 두드리면 원하는 정보가 1초만에 튀어나오는 마법의 전기 상자라던가, 한손으로 들고다니는 만능 전화기 같은게 있다면 좋겠는데 그런 건 없다. 정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책이나 신문, 뉴스, 라디오 같은 것 뿐인데 라디오조차 최형욱의 소식이 나오질 않는다.
결국 은서는 힘없이 탁자에 앉아 소주를 병나발째로 불어버리는 거 말고는 슬픔을 달랠 길이 없었다.
"다들 미워···."
그렇게 식탁에 쓰러져 술에 취해 잠이 드는 황태녀 전하를 바라보며 진혁이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전하···."
방에 들어가 침대에 주무시라 권해도 굳이 부엌에서 잠을 자는 공주님이 안쓰럽다. 그래서 부르는 게 몇차례 반복되니 신경질적인 외침이 튀어나왔다.
"꺼져!"
"여기서 주무시면 안됩니다. 방에 들어가셔서 편히···."
"꺼지라고! 이 고자새끼야!!"
은서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다들 나한테 숨기는거 있지? 최형욱 중장! 어떻게 됐는지 누구도 말해주지 않아!"
"그건···."
"왜? 사형이라도 판결났대? 죽는대? 내 부하였는데 왜 말을 안해주냐고! 숨길거면 제대로 숨기던가! 씨발!!!!!"
"최형욱 중장은··· 무기징역이랍니다."
진혁이는 거짓말을 해보기로 했다. 진실을 털어놓을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폐하의 허락도 비서실장님의 허락도 없으니 고육지책으로 짜낸 둘러대기였다.
"거짓말하지마. 누가 봐도 사형감인데 그게 어떻게 무기징역이야?"
구슬피 우는 황태녀의 울음소리가 관사 전체로 나지막이 울려퍼졌다. 누가 봐도 아는 거짓, 누가 봐도 수상한 분위기,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진실에 서러워 슬피 우는 은서에겐 같은 편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사형이잖아! 사형이니까 숨기는거지? 다 알아! 안다고!"
"폐하께서 직접 사면을 요청하셨죠. 황실은 피해자니까요. 재판 결과가 사형으로 나올거라고 어떻게 확신하시는겁니까?"
"거짓말! 사형일거야··· 분명히 사형일거라고···."
그리곤 죄책감이 느껴졌다.
"내가 유능했다면··· 지도자로서 휘어잡을 리더십이 있었다면 반란 같은건 일으키지 않았을거야."
"그건···."
"내가 나쁜 년이었어. 미끼로 오는게 아니었는데. 덕수궁에서 그림이나 그리고 놀았으면 누구도 죽지 않았겠지. 난 이용당한거야. 아버지의 숙청을 위해 미끼가 됐고 그걸 난 동의해버린거라고."
"전하···."
"결국 내가 죽인거잖아? 그렇지?"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남은 소주를 꿀꺽꿀꺽 한번에 마셔버렸다.
"내가 죽일년이지. 무능한 년이 지휘관으로 쳐 들어와선 부하들을 반란으로 몰아넣고, 월남에서도 자살에 가까운 작전으로 뛰쳐 나가서 부하들이 사지로 따라오게 만들고. 결국 죽은 11명의 부하들까지 내가 죽인···."
"공주님!!!!!"
진혁이 쩌렁쩌렁 큰소리로 외쳤다.
"공주님을 지키겠다며 스스로 나선 부하들입니다. 그들의 희생을 그런식으로···."
"그럼 틀려?"
은서가 풀린 눈빛으로 항변했다.
"내가 월남에서 철민이한테 뭐라고 한 줄 알아? 박철민 상사. 공수지구대 3팀 최고의 에이스한테 용병이라고 욕했어. 남의 나라 지켜주겠다고 사명심 가득차있던 애한테 실적으로 고용한 용병이라고, 훈장만 따박따박 받아가는 새끼들이라고 매도했다고! 내가!"
"......"
"최고의 군인? 이딴 년이 최고의 군인이라고? 19번도로 전투의 영웅? 대한제국 황태녀? 까고있네. 난 그냥 살인자야!"
그리곤 주저 앉아 탁자 밑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쭉 잠을 자면 내가 죽인 사람들이 꿈에서 나와. 잊을수가 없어. 매일같이 태연한 척 웃고 떠들고 의연하게 공부하는 황태녀 연기를 해보지만 가면일 뿐이지."
"전하···."
"술이 없으면 참을 수가 없어. 그 때부터 쭉 매일같이 술 마시고 있는거 알지? 데이트를 빙자해서."
"저희는··· 술친구였으니까요."
139번의 도끼질. 술김에 고백해본 139회의 술주정. 그리고 오늘은 140번째. 은서의 데이트는 이랬다.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했는데··· 행복하게 살아도 불행이 지워지지 않아. 행복은 행복대로 누려도 불행은 불행대로 매일 밤 찾아오고 말지."
그리곤 고개를 떨궜다.
"나 그동안 연기 잘했지? 완벽하게 치유된 척 행복하게 사는 연기. 실은 하나도 낫지 않았어."
바닥에 굴러다니는 텅빈 소주병이 황태녀의 눈에 들어왔다. 19번 도로 전투의 영웅. 월남전의 참전용사 대한제국 황태녀는 주정뱅이가 되어 동태 같은 눈동자로 허망히 웃으며 말했다.
"난 살인마야···."
은서는 그 뒤로 소주를 2병이나 더 마셨다. 30도나 되는 74년의 희석식 소주를 무식하게 들이마시고 은서는 11시가 되어서야 잠에들었다.
쓰러져버린 황태녀 전하를 힘들게 침대로 옮기고 이불까지 덮어주는 진혁이는 방문을 닫아버리고 덕수궁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의 일을 반드시 보고해야 했다.
[네, 비서실장입니다.]
덕수궁의 비서실장님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안 주무셨습니까?"
[한미정상회담이 코앞이라서요. 당분간 철야 근무거든요. 왜요? 전하께 무슨 일이 생기셨나요?]
"오늘도 술을 드셨습니다. 평소엔 제가 가볍게 술친구가 되어드리는 정도였는데 오늘은 혼자서 3병이나···."
그러자 이화가 물었다.
[혹시 악몽 이야기도 하시던가요?]
"예. 월남전 때 기억이 계속 꿈에 나오시는 모양입니다."
[역시···.]
그리곤 한 1분 정도 깊은 침묵이 이어졌다. 진혁이도 이화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최형욱 중장. 사실대로 털어놓으면 안되겠습니까? 이미 다 알고 계시는데요."
[사형 집행일이 내일이에요. 내일까지만 버텨주세요.]
"말씀 드려야 합니다."
[지금 말씀드렸다간 사형장에 가겠다며 뛰쳐나오실거에요. 안되잖아요 그건. 전하의 두 눈으로 사형 장면을 보게 만들었다간···.]
"역시 좀 그럴까요?"
[내일까지만 버티면 돼요. 최형욱 중장의 사형이 끝나면 폐하께서 직접 가셔서 달래드릴테니까. 그때까지만 부탁할게요.]
"예. 어떻게든···."
[전하는 조만간 전역을 하실거에요.]
그러자 진혁이 놀라며 물었다.
"전역이요?!"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셨어요. 군대 때문에 병이 악화되고 있다고 그렇게 판단하고 계시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궁으로 모시는게 낫지 않을까 판단하던 참이었거든요.]
"하지만 그건···."
진혁은 결심을 굳혀 단호히 말했다. 비서실장님을 향해서 군인 김진혁이 할 수 있는 최대 한도의 지식을 동원한 간언이다.
"전역은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전하께 악영향만 줄겁니다."
[전하의 트라우마는 군생활에서 비롯됐어요. 군에서 멀리 떨어뜨리는게 근본적인 해결책일텐데요?]
하지만 진혁의 생각은 다르다. 전하 옆에 붙어서 1년 넘게 있어본 자신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전하께선 국민을 지키는 걸 삶의 이유로 여기고 계십니다. 국군은 국민을 지킨다. 요즘 입버릇처럼 강조하시는 말씀이셨죠."
[국군은 국민을 지킨다?]
"새로 제정된 서북방위사령부의 구호입니다. 전하께서 직접 하달한 39만 서북 장병들의 신조였죠. 제 생각엔 이게 전하께서 갖고 계시는 삶의 목표라고 생각되는데 이걸 실천할 기회를 뺏어버리면··· 분명 안좋아지실겁니다."
[그렇다면···.]
"최형욱 중장이 재판중인 것 부터 사형당하는 것까지 전하는 모두 알고 계십니다."
진혁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전하께 필요한 건 진실입니다.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게 허락해주시면 전하의 심기는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드리겠습니다."
[어떻게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뭐든지."
[뭐든지?]
"평생을 지켜드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전하를 위해서라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그 뭐든지에 대해 비서실장인 이화와 은서의 수행원 김진혁이 생각하는 건 미묘하게 다른 듯 했다.
[생각해보니··· 도움이 될 수도 있겠네요.]
그리곤 번뜩이는 눈동자로 말했다.
[폐하께는 제가 말씀드리죠. 약속하신거에요. 진짜 뭐든지 하겠다고.]
"예. 목숨을 바쳐서라도···."
[뭐가 필요한지는 전하께 직접 여쭤보세요. 목숨은 아닐테니까요.]
"예···?"
진심으로 의지할만한 친구라면 도움이 될 수 있겠지. 이화는 그렇게 생각했다. 친구의 범주가 어디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황태녀 전하의 마음은 이미 확인했고 이 답답한 친구의 마음도 약속으로 받아냈다.
뭐든지 하겠다고.
뭐든지 안하기만 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