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Ep10. 국가가 무너지는 날 (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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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1월 1일.
덕수궁의 집무실에서 이연은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여러 절차를 거쳐 누누히 부탁했을텐데? 사형만큼은 피하게 해달라고. 이범석 총리 통해서도 부탁했고, 법무부장관 통해서도 부탁했고, 비서실장 보내서 직접 절차 밟아 탄원서까지 넣었는데 지금... 사형이라고 했나?"
전화를 받은 이범근 대법원장은 당당하게 말했다.
[법리적으로 따져봤을 때 어떻게 해도 사형입니다. 애초에 3심까지 올 필요가 없었던 사안이지요.]
"내 딸이 피해자야! 가해자도 아니고 피해자라고! 피해자가 용서한다는 데도 끝끝내 사형을 시켜야 했나? 무기징역도 있었잖아!"
[반역죄는 국가의 문제입니다. 이는 황실만의 문제가 아니지요. 저는 법대로 했을 뿐입니다. 앞으론 이렇게 전화로 이야기하지 마시고 절차에 따라주시지요. 전 다음 재판이 있어서 이만···.]
그러곤 전화를 뚝 끊어버린다.
"이런 건방진 놈이!!!"
이연은 화를 내며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내 딸은? 지금 이 소식 들었겠지?"
"아직 못들으셨을겁니다. 헬기를 타고 평양으로 복귀하는 중이시니까요."
"당장 서북방위사령부에 연락넣어. 모든 신문 싹 다 거둬서 치워버리고 사령관실에 텔레비전도 끊으라 그래!"
"하오나···."
"진희에게도 당장 경고해. 최형욱이 사형당하는거 녀석 귀에 못들어가게 하라고. 당장!"
망설이는 이화에게 이연은 재차 강조하듯 말했다.
"월남전에서 부하들을 모두 잃은 아이야. 이제 막 충격이 가시던 참인데 여기서 또 부하 죽는걸 보게 할 순 없지 않겠나? 최형욱은 잠깐이긴 해도 녀석의 부하였다고."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이미 동네방네 다 퍼진 소식을 전하만 못 들으시게 막는건 도저히···."
이연은 괴로워하듯 말했다.
"사형당하는 걸 보면서 월남에서 죽어간 자기 부하들을 떠올리겠지. 그리고 자책할거야. 모두 자기 탓이라고. 그 여린 녀석이···."
"서북방위사령부는 최형욱 장군이 있던 곳입니다. 거기 한가운데 복무하시는 분이 어떻게 사형 소식을 못 들으시겠습니까?"
"황제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부탁하지. 제발··· 내 딸이 사형 장면 만큼은 못 보게 해주게."
그런데 잠깐.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이연이 태도를 바꿔 물었다.
"그냥 확 사면을 시킬까?"
"사면권 말씀이십니까?"
"국가원수인 나한테는 사면권이 있잖나? 최형욱이의 죄를 용서해주는거야. 그렇게 하면···."
하지만 이화는 냉정히 부정하여 말했다.
"반역죄입니다. 황태녀 전하를 인질로 잡고 폐하를 상대로 일으킨 반역이었죠."
"그러니까 하는 소리야. 내 딸이 피해자잖아. 녀석은 최형욱이가 사형되는걸 원하지 않고 있어. 그럼 들어줘야지.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주겠다는데 그게 잘못된건가?"
"국민들은 최형욱의 사형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게 여론입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여론을 정면으로 부딪힐 생각은 아니시겠죠?"
"......"
"국민들이 폐하께 열광하는 만큼 분노도 비례해서 커지는 법입니다. 이순신 장군과 원균의 관계 같은거죠. 이순신이 영웅이 될수록 원균은 악역이 되니까요."
"내가 그정도인가?"
이화가 질타하듯 공격적으로 말했다.
"충무공은 300년 전 영웅이지만 폐하는 현존하는 영웅이십니다."
"그래도 충무공은 너무 나간 거 같은데? 아무튼간에 최형욱은···."
이화가 황제의 말을 끊어버리며 단호히 말했다. 분노어린 비서실장의 간언이 황제의 귀에 따박따박 꽂혀들어갔다.
"태평양전쟁에서 은성무공훈장을 받은 조선인, 조선총독부에 태극기를 꽂은 독립운동가, 북한의 침략을 예견하고 전쟁을 대비하여 승리로 이끈 한국전쟁의 영웅. 그런 영웅이시면 모르는 척은 그만 해주시죠."
"모르는 척이라니?"
"군법의 중요성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순신 장군이 살아생전 가장 중요시하던 원칙을 폐하께서 모르실리 없으니까요."
"......"
"군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기관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전투라도 지휘관의 지시가 있으면 목숨을 걸고 따라서 승리로 이끄는 기관이죠."
그녀는 이순신장군의 활약상을 강조하며 말했다.
"23전 23승 무패. 불가능해보이는 작전도 승리로 이끈 불세출의 해군제독. 그가 군법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았다면, 부하들이 불가능해보이는 작전에 순순히 따랐을까요?"
"그야···."
"못따랐겠죠. 13척의 함선으로 300척과 싸우겠다는데.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따를 부하가 없었을겁니다. 그런데도 따르고 싸워서 이겼던건···."
"적에게 죽는 것보다 군법이 더 무서웠으니까."
"예. 그정도로 군법은 중요한겁니다. 이걸 폐하께서 모르실리 없겠죠. 그러니 따님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 만큼 군법의 중요성도 고려해주시죠."
고심하는 영웅에게 영웅의 비서실장은 말했다.
"지금 여기서 최형욱을 사면시켜줬다간 대한제국 역사에 같은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될 겁니다. 반란을 일으켰는데도 용서받는걸 봤으니까."
이화는 죄책감어린 슬픈 눈으로 말했다.
"제 책임도 있다는 거 압니다. 제가 보안사령부를 좀 더 제대로 컨트롤했다면 막을 수 있었겠죠. 하지만··· 폐하께서 진행하신 숙청이기도 합니다. 전하를 미끼로 보내신 것도 폐하의 결심이셨죠."
결국 이연은 쓴물을 삼키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하지. 김종규에게 전해 사형명령서에 싸인해도 된다고. 이왕 이렇게 된거 빠른 시일내에 법대로 끝내버려."
이화는 고개숙여 말했다.
"전하의 귀에 들어가는 건 최대한 막아보겠습니다."
"정 안되면 내가 직접 평양에 가든 여기로 데려오든 해서 달래줄테니까. 노력이라도 해봐."
하지만 황제도 비서실장도 중요한 변수를 잊고 있었다.
<진혁아~♥>
은서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경복궁의 데이트에서도 은서는 술을 마시고 있었고, 소주병이 3개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경복궁은 문화재가 아니라 황실의 사유지다.
***
이화로부터 연락을 받은 서북방위사령부 부사령관 전 장군은 지휘통제실에서 모든 참모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다들 들었지? 최형욱이 사형 판결난거."
참모들의 표정이 싸늘하다. 모두 새로 임명된 고위 간부들. 군의 명예를 실추시킨 반역자라는 생각에 경멸의 표정이 담겨 있었다.
"말단 병사부터 최고위 간부인 우리들까지 모두 입단속한다. 절대 누구도! 사령부 내에서 그딴 이야기 올리지도 마라! 알았나?"
그러자 참모 한 명이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겁니까? 군의 명예를 더럽힌 반역자입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황태녀 전하의 부하들이었어. 그분이 어떤 과거를 겪으셨는지 너희들이라면 모두 알겠지?"
"부하들을 모두 잃은···."
"그래. 그 충격에서 겨우 벗어나신 참인데 여기서 또 부하를 잃는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아프시겠냔 말이야."
"하지만··· 그들은 전하께 반역을 일으킨 놈들입니다. 오히려 꼴좋다 생각하지 않으실까요?"
"괜히 떠벌대다가 트라우마를 자극하면? 과거의 아픔이 다시 떠올라서 심기가 불편해지시면 어떻게 책임질거야?"
"그건···."
전장군이 확실히 강조하며 말했다.
"대한제국 황실의 유일한 계승권자시다. 그분이 성심을 가다듬고 올곧은 황제로 성장하시려면 정신의 건강도 우리가 지켜드려야 하는 거야."
그의 논리에 참모들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뉴스 나오는 시간이 되면 텔레비전도 꺼버리고 아니면 다른채널 돌리게 해. 신문지도 다 치워버리고. 입도 뻥끗하지 말라고. 알겠나?"
"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작전이다. 대한제국 83만 국군 장병으로 중국 대륙을 정벌하라는 것보다 더 어려운 전쟁이라고 전장군은 생각하고 있었다.
'젠장, 도대체 어떻게 전하를 속이란거야? 사방팔방 다 알려져있는데'
잠시 후 저녁 7시쯤. 황태녀 전하를 모시는 헬기가 서북방위사령부에 도착했고, 반쯤 죽어있는 눈동자를 봤을 때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역시 이미 알고 계시는거야···.'
아무튼 헬기장. 전하의 도착을 반기는 전장군과 부하들이 일제히 도열하여 경례를 올리니 황태녀 전하께선 이렇게 반겼다.
"응 그래, 반가워···."
"휴, 휴가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은서가 반쯤 죽은 목소리로 한숨을 쉬며 답했다.
"휴가? 잘 다녀왔지. 어떤 빌어먹을 녀석 때문에 잡쳤지만."
"빌어먹을 녀석? 설마 최···."
그러자 은서가 불타는 눈동자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김진혁···."
"......?"
황태녀의 분노가 엉뚱한 사람을 향하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김진혁이라면 분명 전하를 모시는 부관인데···.
"부관이 무슨 짓을 했길래···."
"몰라! 나 배고파! 밥먹으러 갈거야! 식당 아직 안 닫았지?"
"예? 예! 아직 안 닫았긴 합니다만··· 밥이 다 식었을건데요? 그러지 마시고 비서진을 시켜 수라상을···."
"됐어. 사령관이면 병사들 먹는 밥을 먹어야지."
은서는 옆에 각목처럼 우물쭈물 서있는 진혁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도 찬밥먹어!"
"예···."
진혁군을 쳐다보며 전장군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런 남자 구실도 못하는 새끼···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놈은 따로 있었구만? 쯧쯧···."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내 아들을 소개시켜드려볼까? 잘 어울리는 한쌍이 될 수도 있어. 결혼하고 황손까지 보시게 되면 우리 가문은···.’
눈이 번뜩이는 멋진 미래.
‘출세의 길!!!’
조선시대 하면 흔하게 보였던 외척이 이런 거였을까? 출세의 길이 코앞에 있었음에 전장군은 벌써부터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분명 출세의 길이다. 제한 속도 없이 무제한으로 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다. 아우토반 같은 출세의 길!
그래서 전장군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김진혁, 넌 역시 고자여야 해. 황제 폐하의 사위는 내 아들이어야 하니까.’
***
KBC 방송국이 뒤집어지고 있었다. 갑작스레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쳐들어와 뉴스를 준비하라며 스튜디오를 독촉하니 그들의 말은 이러했다.
<뉴스를 새로 준비하라니! 저녁 뉴스까지 2시간 밖에 안 남았단 말입니다!>
방송사 관계자의 항변에 중정 요원은 이렇게 닥달했다.
<뭔 소리야? 니들 뉴스엔 관심 없어! 전하께서 보실 전용 뉴스를 따로 만들어달란 말이야!>
<예? 아니 왜 굳이···.>
<모든 프로그램 포맷을 그대로 가도 되니까 최형욱이 보도들만 빼서 따로 만들어! 니들 예비 진행자도 있고 장비도 있을거 아냐?>
<아, 아니··· 그래도 당장 2시간 이내로 준비하기엔···.>
<얼마면 돼?>
거절하기엔 너무 많은 돈이었다.
이런 짓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이화로서도 별다른 선택이 없었다. 황태녀 전하는 매일 저녁 9시에 뉴스를 챙겨보시니까. 당장 오늘 뉴스부터 최형욱의 소식을 빼내야 했는데 그럴려면 언론통제를 해야한다.
<뉴스의 30% 이상이 반역자에 대한 소식들이야. 전하 한 분 때문에 전국민의 눈을 속일 수는 없어.>
최형욱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이 너무 뜨거웠다.
그렇다면 전하를 위한 특별 뉴스를 따로 편성한다. 그것을 위해 황실의 내탕금을 써서 방송사에 외주를 맡기고 가짜 9시 뉴스를 제작해 별도의 채널로 날린다. 그럼 진혁이가 관사에서 약속된 채널을 미리 틀어놓을것이고, 은서는 아무것도 모른채 진혁이가 틀어주는 가짜뉴스를 보게될 것이다.
모든 소식이 그대로지만 최형욱에 대한 보도들만 빠져있는 9시뉴스.
밥도 배불리 먹고 따뜻한 샤워도 마친 은서는 관사에 돌아와 아무것도 모르고 뉴스를 챙겨봤다.
"응? 오늘은 진행자가 다르네?"
뉴스를 찍는 스튜디오도 묘하게 달라보였지만 아무튼 뭐 상관없겠지.
같은 시각 이번에는 독립신문, 제국신문, 황성신문이 중정요원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최형욱이 기사를 빼서 신문 한부씩만 내놔!>
신문사 기자들은 군말없이 신문을 갖다 바쳤다. 돈에 길들여진 귀여운 강아지들은 중앙정보부의 말을 참 잘 듣는다.
그렇게 준비된 아침 신문은 새벽녘 평양까지 날아가서 황태녀 전하의 관사로 배달됐고, 아침 일찍 일어나 진혁이랑 운동을 하고 돌아온 그녀는 땀을 닦아내며 이렇게 생각했다.
"신문 1면 기사가··· 동물의 왕국이라고?"
KBC 방송의 인기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의 재개 소식을 다루는 기사가 1면에 올라가있었다.